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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지정유산

송우암수명유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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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우암수명유허비

  • 종목전북특별자치도 문화유산자료
  • 지정일1974년 09월 27일
  • 시대조선 영조 7년(1731년)
  • 소재지정읍시 우암로 54-1 (수성동)

상세정보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선생은 조선조 숙종 15년(1689) 2월에 제주도로 귀양갔다가 같은 해 5월 28일 조정(朝廷)의 명령으로 다시 서울로 압송(押送)하는 도중(途中)에 6월 7일 밤 정읍에 도착하여 객관(客館)에서 사약(賜藥)을 받고 6월 아침 진시(辰時)에 돌아가니 그 때 나이 83세였다.

그 뒤 6년이 지나서 우암(尤庵)의 무고(無辜)함이 밝혀져 숙종 21년(1995) 5월에 지금의 정읍시 하모리 모촌(井邑市 下茅里 茅村)에 고암서원(考庵書院)이 세워졌고, 영조 (英祖) 7년(1731)에 이 곳에 수명 유허비(受命 遺墟碑)가 세워졌다.
이 비각(碑閣)은 영조(英祖) 44년(1768)과 순조(純祖) 11년(1811)에 고쳐 수선(重修)하고 지금의 비각은 여섯 번째나 고쳐 지은 것으로, 1925년 군수 이동한(郡守 李東漢)이 고쳤으며, 군수 김삼주(郡守 金三柱)가 앞면(前面)의 흙담을 헐어내고 철책(鐵柵)으로 만들었다.

송우암수명유허비문(宋尤庵受命遺墟碑文)

아아! 여기는 우암 송선생이 명을 받은 곳이다.
그 해, 기사(1689)년에 군흉들이 장차 큰 일을 행하는데 선생의 도덕성이 세상에 큰 스승이 되거늘 먼저 독한 솜씨를 써서 이 해 이월에 제주로 귀양 보냈다가 또다시 글을 올려 잡아 올리기를 청하였는데 이 고을에 이른 뒤에 그 명령이 이르니 그 때가 유월 팔일이었다.

아아! 옛적 공자와 주자의 불행은 오히려 아철의 화에 벗어났는데 이제 선생은 이를 면하지 못했으니 어찌 이 어려움이 소매를 돌리고 옥살이를 하고 숨어사는 세상보다도 심함이 있음인가. 아 슬프도다. 선생이 계실 때에 곤전 자리가 기울어짐을 듣고 통곡하며 식음을 끊고 권수암 상하에게 이별을 고하되 학문은 주자를 주로하고 사업은 효종의 유지를 따를지니 아픔을 참고 원통함을 먹으므로 박부득이 「인통함원 박부득이」 여덟자를 주노니 잊지 말라 주자께서 임종에 문인에게 곧을직 한 자를 가르쳤는데 내 말도 또 이에 지나지 않는다 하고 이로부터 선생은 식음을 아니한지 이미 여러 날이라 기운은 점점 미약하되 더욱 스스로 신칙하며 여러 번 약을 올리라 하며 말씀하되 한 목숨 끊는데 명령을 받는 데 미치지 못할까 두렵다 하더라 하루 전에 흰 기운이 하늘을 지나고 이 날 밤에 규성이 땅에 떨어지고 붉은 기운이 집을 꿰었다.

육년 지난 갑술(1694)년에 성상께서 크게 깨닫고 특별히 선생의 벼슬을 회복하고 시호를 문정이라 주었다.
선생의 휘는 시열이요 자는 영보이요 은진 사람이니 만력 정미(1507)년에 낳았으며 효종께서 큰 뜻이 있어 연하여 유자의 석인에 올라 선생을 먼저 부르고 뜻이 합하여 밝고 화더니 현종조에 이르러 좌상이 되었고 숙종 초에 소인들의 말로써 바다섬으로 귀양갔다가 돌아옴에 예로 높임이 더 지극하더니 이윽고 세상 도가 무너지고 괴변이 일어나 선생은 마침내 큰 화를 입었으니 아아 차마 말하랴. 이 고을은 선생의 서원이 있고 유족이 있는지라 남쪽 선비들은 이르되 이 옛 땅에 또 가히 기록이 없지 못하리라 하고 드디어 뜻을 모아 도를 갖추고 의현에게 글을 쓰라 하는데 식견이 어둡고 글이 옹졸하여 감히 크게 펴서 말하지 못하고 삼가 선생 임명시에 일을 기록하여서 뒷 사람 이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선생은 조선조 숙종 15년(1689) 2월에 제주도로 귀양갔다가 같은해 5월 28일 조정(朝廷)의 명령으로 다시 서울로 압송(押送)하는 도중(途中)에 6월 7일 밤 정읍에 도착하여 객관(客館)에서 사약(賜藥)을 받고 6월 아침 진시(辰時)에 돌아가니 그 때 나이 83세였다.

그 뒤 6년이 지나서 우암(尤庵)의 무고(無辜)함이 밝혀져 숙종 21년(1995) 5월에 지금의 정읍시 하모리 모촌(井邑市 下茅里 茅村)에 고암서원(考庵書院)이 세워졌고, 영조 (英祖) 7년(1731)에 이 곳에 수명 유허비(受命 遺墟碑)가 세워졌다.
이 비각(碑閣)은 영조(英祖) 44년(1768)과 순조(純祖) 11년(1811)에 고쳐 수선(重修)하고 지금의 비각은 여섯 번째나 고쳐 지은 것으로, 1925년 군수 이동한(郡守 李東漢)이 고쳤으 며, 군수 김삼주(郡守 金三柱)가 앞면(前面)의 흙담을 헐어내고 철책(鐵柵)으로 만들었다.

교통

역, 터미널에서 도보로 15분, 승용차로 5분

주변관광소

시내권, 충렬사(충무공원), 정읍향교, 정읍사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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