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읍시 문화관광

정읍관광

|정읍관광|문화유적|도지정유산

도지정유산

임병찬창의유적지 임병찬창의유적지 임병찬창의유적지 임병찬창의유적지 임병찬창의유적지

이전 이미지 다음 이미지

임병찬창의유적지

  • 종목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
  • 지정일1998년 01월 09일
  • 시대한말
  • 소재지정읍시 산내면 종성리 276-1

VOD

상세정보

이 곳은 구한말(舊韓末), 둔헌(遯軒) 임병찬(林炳瓚)이 일제(日帝)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求)하고자 의병(義兵)들을 모아 훈련시키던 장소(場所)이다.
이 지역은 해발 450여m 이상인 산간오지(山間奧地)로서 한말(韓末) 일본이 우리나라 침략을 노리는 시기인 고종(高宗) 30년(1893) 둔헌(遯軒) 임병찬(林炳瓚)이 산내면 영동마을에서 이 곳으로 이거하여 후일에 대비하여 후진(後進)을 양성하기 위하여 공자(孔子)를 모시는 영소전(領昭殿)과 학당(學堂)을 지어 제자(弟子)를 가르쳤는데, 단순히 학문을 익히게 한 것이 아니라 병기창(兵器廠) 및 탄약제조소(彈藥製造所), 숙영지(宿營地)를 분산(分散) 설치(設置)하고 활쏘기와 말타기 등의 문무(文武)를 익히게 하였다.

임병찬은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을 스승으로 모시고,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체결된 이듬해인 1906년에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호남의병(湖南義兵)을 창의(倡義)하였으며, 8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순창(淳昌)전투에 참전하였으나, 최익현과 같이 체포되어 대마도(對馬島)에 2년간 감금되었다.

1914년 고종황제(高宗皇帝)의 「독립의군지사사령총장」(獨立義軍之師司令總將)의 밀칙(密勅)을 받아 의병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거문도(巨門島)에서 구금생활중 1916년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이 지역 출신 의병들이 전국 곳곳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일운동(抗日運動)의 모태(母胎)가 되었다.
이곳은 천연(天然)의 요새(要塞)이다. 해발 450여m에 위치한 종성(宗聖) 2리(里)인 상종성(上宗聖) 마을이다.
회문산(回文山)의 솔봉 줄기에 위치한 이 마을은 들어오는 입구가 하나밖에 없다.
구한말(舊韓末) 일제(日帝)에 항거(抗拒)하여 민족정신을 드높인 의병운동(義兵運動)은 세 단계로 나눈다. 첫쩨, 을미의병(乙未義兵) 둘째, 을사의병(乙巳義兵) 셋째, 정미의병(丁未義兵)이다.

을미의병은 1895년에 일어났던 민비시해사건(閔妃弑害事件)이 있을 때 일어난 의병이며 을사의병은 1905년에 있었던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에 분에 못이겨 일어선 의병이다.
정미의병은 1907년 일제(日帝)에 의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의 군대(軍隊) 해산(解散)이 계기가 되었다.
그들이 보여준 의로운 정신은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支柱)가 되었고 우리 민족의 뿌리가 되었다.
임병찬(林炳瓚)은 구한말(舊韓末)의 의사(義士)이며, 의병장(義兵長)이다. 여기에는 임병찬의 추호당이 있었던 곳이다.
이는 평택인(平澤人)이며, 자(字)는 중옥(中玉)이라고 하고 호(號)는 둔헌(遯軒)이다. 옥구현(沃構縣: 지금의 群山市 沃構邑) 서면(西面) 대사리(大寺里)에서 임용래의 큰 아들로 1851년인 철종(哲宗) 2년(辛亥) 2월에 태어났다.
세 살 때 말과 글을 알고, 다섯 살 때 당서(唐書)를 통하고, 오언고시(五言古詩)를 지으니 신동(神童)이라고 하였다.
열여섯 살 때 전주(全州)에 나가 지방시(地方試: 鄕試)에 수석(首席)을 하였다.
1882년 그의 나이 31살 때 태인현(泰仁縣) 산내면(山內面)으로 이사를 했다. 이는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는 등 어지러운 세태를 보고 산속에서 은둔(隱遁) 생활을 하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1886년 조정(朝廷)에서 거문도(巨文島)에 진(鎭)을 설치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감독관(監督官)에 추천하자 관직에 나아갔다.
고종(高宗) 26년인 1889년에는 절층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임명하고 그의 선대(先代) 3대를 추종하는 은전을 베풀었다.
다시 낙안군수(樂雁郡守: 지금의 昇州) 겸 순천진(順天鎭) 절제사(節制使)로 있으면서 농정(農政)에 공(功)을 세웠다. 이 때 고을 농민들이 군수(郡守)의 선정(善政)에 감복하여 온갖 방법으로 사례하려 해도 받지 않고 비(碑)를 세우는 것도 말렸으며,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자녀 교육에 힘쓰며 조용히 지냈다.

고종(高宗) 31년인 1894년 甲午東學革命이 일어나니, 무남영 우령관(武南營右領官)에 오르라 하여도 듣지않고, 정국(政局)을 문란(紊亂)을 걱정하더니, 광무(光武) 9년인 1905년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맺어지자 스승인 최익현(崔益鉉)을 찾아가 그와 함께 의병 (義兵)을 일으켰다.
태인(泰仁), 정읍(井邑), 순창(淳昌), 곡성(谷城) 등지에서 모병한 2백여명의 병졸들을 이끌고 담양(潭陽)으로 향하다가 왜적(倭敵)과 접전(接戰)하여 패(敗)하니, 최익현과 함께 사로 잡혀 1909년인 융희(隆熙) 3년 6월에 쓰시마(對馬島)에 감금되었다.

최익현은 몸이 늙어 단식(斷食)으로 자결(自決)하고, 임병찬은 2년만에 돌아왔다.
1910년 한 일합방(韓日合邦)의 직전에 왕명(王名)에 의하여 종2품(從二品)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고, 독립의군부(獨立義軍部) 전남순무대장(全南巡撫隊長)에 올라 항일구국 투쟁을 전개하다가 1914년 6월에 왜경(倭警)에 체포되어 거문도(巨文島)에 유배(流配)되었다.

1916년 5월 23일 단식(斷食)을 감행하여 결국은 자결(自決)하였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 단장(斷章)을 받았다.
저서로 『둔헌문집』 이 있다.
묘소는 회문산 최고봉인 지붕산(일명 회문봉 830m) 바로 아래에 있다. 원래 유적지 뒤편에 있었으나 손자들이 지난 1943년 5월 이곳으로 옮겼다.

독립운동 호남의병 유적지(獨立運動 湖南義兵 遺蹟址)(井邑市 山內面 宗聖里 上宗聖 一帶)

이 지역은 해발 400m이상인 산간 오지로서 韓末 일본이 우리나라 침략을 노리는 시기인 고종 30년(1893)에 옥구출신으로 (昇州)군수를 지낸 遯軒 林炳瓚장군이 산내면 영동마을에서 이 곳으로 移居하여 후일을 대비하여 후진을 양성하기 위하여 공자를 모시는 領昭殿과 興學齋 라는 학당을 지어 제자를 가르쳤는데 단순히 학문을 익히게 한 것이 아니라 병기창 및 탄약제작소 숙영지를 분산 설치하고, 활쏘기와 말타기등의 文武를 익히는 등 호남의병 발상지의 면모를 갖추었다.

임병찬장군은 勉菴 崔益鉉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이듬해인 1906년 칠보 武城書院에서 호남의병을 倡義하였으며 8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순창전투에 참전하였으나, 면암선생과 체포되어 대마도에서 2년간 감금되었으며, 그후 1914년 高宗皇帝 의 「獨立義軍之師司令總將」의 密勅을 받아 의병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거문도에서 구금생 활중(1919)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 지역 출신 의병들이 그후 호남지역 곳곳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일운동의 母胎가 되었다.

임병찬선생 창의 기념표석(林炳瓚先生 倡義 記念標石)

先生은 沃溝출신으로 樂安郡守를 지냈으며, 1893년 이곳에 移居하여 聖學과 鄕學으로 民風醇化에 힘쓰던 중 1905년 乙巳條約이 締結되자 先大夫人의 墓所를 回文山에 옮겨 追喪居廬 를 내세워, 擧義를 획책 義兵을 訓練하던 즈음, 忠南靑陽에서 勉菴 崔益鉉先生이 擧義에 요구하자 그를 스승으로 맞아 義兵總師로 추대 1906년 閏 4월 13일 武城書院에서 出兵하였으나 실패한 뒤 1914년 高宗皇帝의 密勅으로, 獨立義軍府 陸軍副將 全羅南北道 巡撫總將의 직을 받아 全國的인 擧義를 도모하던 이 곳은 韓末義兵倡義의 搖籃地이다.

교통

역, 터미널에서 산내행 시내버스로 50분, 승용차로 35분

주변관광소

난국정, 운주사지

목록

  • 관리부서동학문화재과/문화재정책팀
  • 연락처063-539-6911
만족도 조사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