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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유적

도계서원 도계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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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계서원

  • 종목전북특별자치도 문화재자료 제79호
  • 시대조선 헌종 14년(1673년) 창건, 1962년 중건
  • 소재지정읍시 덕천면 도계1길 34-13

상세정보

1673년인 헌종(顯宗) 14년(癸丑)에 김창집(金昌集), 민진원(閔鎭遠)의 주창으로 창건(創建)한 서원으로 익재(益齋) 이희맹(李希孟), 오봉(鰲峯) 김재민(金齋閔), 모암(慕菴) 최 안(崔 安), 태천(苔川) 김지수(金地粹) 선생 등을 향사(享祀)하다가 1697년인 숙종(肅宗) 23년(丁丑)에 죽헌(竹軒) 김제안(金齊顔)을 배향하고, 1840년인 헌종(憲宗) 6년(庚子)에 학산(鶴山) 김 흔(金 昕)을 추가 배양하여 오다가 1868인 고종(高宗) 5년(戊辰)에 조령(朝令)에 의하여 훼철되었다가 1913년(癸丑)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우고 1962년 4월 18일 중건(重建)하여 퇴휴재(退休齋) 김 섬(金 暹), 안식와(安息窩) 김 습(金 習)을 추가 배향하여 총 8현(賢)의 연벽서원(聯壁書院)이다.

사우(祠宇)의 건물로는 오봉(鰲峯) 김재민(金齋閔)의 서당(書堂)이였던 도계서원(道溪書院)과 유물각(遺物閣)이 있는데 유물각에는 오봉(鰲峯)의 문집목판(文集木板)이 13매가 所藏되어 있고, 태천집목판(苔川集木板) 30매가 보관되어 있다.
오봉집(鰲峯集)은 1684년인 숙종(肅宗) 10년 도계서원에서 간행(刊行)한 것이다.
제사 지내는날은 음력으로 매달 9월 중정(中丁)이다.

제사 받는 사람(享祀人物)

이희맹(李希孟)

영주인(瀛州人. 古阜)이다.
자(字)는 백순(白醇)이고 호(號)는 익재(益齋)이다.
시호(諡號)는 문안(文安)이며, 문헌공(文獻公) 경조(敬祖)의 후예(後裔)로 1475년에 태어 났다.

영특(英特)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하며, 1492년인 성종(成宗) 23년(壬子)에 18세로 사 마시(司馬試: 朝鮮時代 生員과 進士를 뽑는 科學. 小科라고도 함)를 거처 문과(文科)에 합 격하여 해남현감(海南縣監)을 지내고 중종(中宗) 때 전라(全羅), 충청(忠淸) 관찰사(觀察使)와 도승지(都承旨)를 거쳤으며, 많은 외직(外職)을 역임하여 그 치적이 많았으며, 뒤에 는 청백리(淸白吏)에 올랐었다.

무오사화(戊午士禍)에는 김일손(金馹孫)등을 구하려고 했고 연산정변(燕山政變)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여묘(廬墓)를 6년을 하였다.
변무사(辨誣使)로 명(明)나라에 가서는 항절(抗節) 치충(致忠)하여 중국 사람들이 감탄하 고 그 화상(畵像)을 그려 주었다.
명(明) 나라에 갔다 돌아와서 신병으로서 이승을 다하니 그 때가 1516년으로 중종(中宗) 11년(丙子)이니 그의 나이가 42세이다.
왕은 예장(禮葬)을 명하고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증(贈)하였다.

김재민(金齋閔)

의성인(義城人)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창의(倡義)한 선비이다.
사효(士孝)를 자(字)로 불렀고, 호(號)는 오봉(鰲峯)이라고 하였다. 뒤에 내린 시호(諡號)는 충강(忠剛)이다.
거익(居翼)의 후예(後裔)로 1527년인 중종(中宗) 22년(丁亥)에 출생하여 일제(一齊) 이 항(李 恒)의 문인(門人)이며, 1573년인 선조(宣祖) 6년(癸酉)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 였다.

화순(和順), 함양(咸陽), 순창(淳昌)의 수령(守令)을 지내어 외직(外職)을 두루 거쳐으며 내직(內職)으로는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 아들을 데리고 삼례역(參禮驛)에서 창의(倡義)하여 웅치(熊峙) 전투에서 전공(戰功)을 세우고 아들 안(晏)이 전사하였다. 뒤에 두 아들을 호종(扈從: 임금 이 탄 수레를 모시어 좇음)하게 하였다.

장성(長城) 남문(南門)에서 창의하여 직산(稷山)과 南海에서 큰 공(功)을 세웠다.
1599년인 선조(宣祖) 32년(乙亥)에 "보방요무(保邦要務)" 42조(條)를 선조(宣祖)에게 올 리고 나서 그해에 한양(漢陽)에서 세상을 떠나니 그 때의 나이 73세 였다.
뒤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고 충강(忠剛)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려갔다.

김재안(金齋顔)

조선(朝鮮) 중기(中期)의 학자이다.
의성인(義城人)이며, 호(號)는 죽헌(竹軒)이다. 1530년에 태어났으며, 김재민(金齋顔)의 아우이다.
김린후(金麟厚)의 문하인(門下人)이며, 천자(天資)가 고매(高邁)하여 학문이 깊었다.
사단칠정(四端七情)과 이기설(理氣說) 등에 통하였으며, 기대승(奇大升) 등과 도의(道義) 로 사귀며 담논(談論)을 하였다.

형인 재민(齋閔)과 같이 전후(前後)하여 6년 간 시묘(侍墓)하였다.
1594년인 선조(宣祖) 27년(甲午)에 세상을 떠났다.

최 안(崔 安)

전주인(全州人)이다.
자(字)는 사지(士址)이고 호(號)는 막암(幕庵)이며, 문성공(文成公) 아(阿)의 후손으로 1545(乙巳)에 태어났다.
성수침(成守琛)의 문하인이고 자질이 총명하여 행실이 독실(篤實)하였다.
전후상(前後喪)에 시묘(侍墓)하여 효성이 지극 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창의(倡義)하여 전공(戰功)이 있어 선공 감직장천(繕工 監直長川) 에 제수되었다.

만년에 봉선교람(奉先巧覽)이란 책을 저술(著述)하고, 학당(學堂)을 지어 후진양성에 온 힘을 다 했다.
1615년에 세상을 떠났다.

김 흔(金 昕)

의성인(義城人) 이다.
자(字)가 숙승(叔昇)이고, 호(號)는 학산(鶴山)으로 김재민(金齋閔)의 넷째 아들이며, 1558 년에 태어났다.
임진란(壬辰亂)이 일어나자 아버지를 따라 창의근왕(倡義勤王)하여 많은 공을 세우고 웅 치(熊峙) 싸움에도 나아갔다.

또 장성(長城)에서 창의하여 권율(權慄)의 막하(幕下)에 들어가 선봉장(先鋒將)이되어 언 양(彦陽)을 지켰다.
이 공(功)으로 좌승지(左承旨)의 벼슬이 내려지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이 되어었 다.
인조반정(仁祖反正)에도 참여하여 정사근(靖社勤)에 들었다.
나주(羅州) 충열사(忠烈祠))에서 제사(祭祀)를 지낸다.
1629년에 세상을 떠났다.

김 섬(金 暹)

의성인((義城人)이다. 자(字)는 이승(李昇)이고, 호(號)는 퇴휴재(退休齋)이며, 김재민 (金齋閔)의 다섯째 아들로 1560년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과묵하고 경학(經學)의 깊은 뜻을 관통(貫通)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모두 이 재(異才)라 여기고 사림(士林)의 종장(宗匠)이 되리라 했다.

임진왜란이 나자 집안일을 보라는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는 등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할 머님을 정성껏 봉양(奉養)하여 집안을 잘 지켰고 또 군곡을 모아 아버지의 진영(陣營)에 보 내었다.
상(喪)을 당하자 시묘(侍墓)를 정성껏 하였다.
천거(薦擧)되어 선공감역(繕工監役), 군자감(軍資監)부정(副正)에 제수되었으며, 뒤에 벼 슬에서 물어나와 천태산(天台山) 기슭에 집을 지어 퇴휴(退休)라 하고 학문에 정진하여 후 진양성에 온 힘을 다 하였다.

세상을 떠나니 그때가 1619년이다.

김 습(金 習)

의성인(義城人)이다. 자(字)는 계응(季鷹)이며, 호(號)는 안식와(安息窩)이다.
김재민(金齋閔)의 조카로 1574년에 태어 났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인(門人)이며, 문장(文章)과 학업(學業)이 크게 나아가 니, 사림(士林)이 추중(推重)하였다.

곤궁(困窮)하게 살면서 효성을 다 하여 시묘(侍墓)를 하였고 말과 행동이 정대(正大)하 니, 김장생(金長生)이 천거(薦擧)하여 경기전(慶基殿) 참봉(參奉), 태능참봉(泰陵參奉)에 제수되였다.
1636년인 인조(仁祖) 14년(丙子)의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의병(義兵)을 이르키 다가 도중 에 병으로 집에 돌아 왔으니, 1638년인 인조(仁祖) 16년에 세상을 떠났다.
 

김지수(金地粹)

조선 중기(中期)의 문신(文臣)이다. 의성인(義城人)이며, 김재민(金齋閔)의 손자이다.
자(字)는 거비(去非)이며, 호(號)는 태천(苔川)으로 시호(諡號)는 정민(貞敏)이다. 1581 년에 출생하였다.
1616년인 광해(光海) 8년(丙辰)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字),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을 지냈다.

폐모론(廢母論)에 몰려 부령(富寧)에 7년 동안 유배(流配)되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풀려나 종성부사(鍾城府使)에 이르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1626년인 인조(仁祖) 4년에 만수절 (萬壽節) 진하사(進賀使)로 김상헌(金尙憲)을 따라가 항절치충(抗節治忠)하니, 명제(明帝) 가 감탄하고 어필(御筆) 등을 특사(特賜)하였다.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창의(倡義)하여 천안(天安)에 이르렀을 때 화의(和議) 소식을 듣고 통곡하고 해산하였다.

그 뒤 벼슬에 나아가서 않았으며, 고향인 천태산(天台山)에 들러가 "대명일월(大明日月)" 넉자를 벽에 크게 써 붙이고 은둔(隱遁)하였다.
순조(純祖) 29년인 1829년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 되었다.
세상을 1639에 떠났다.

◇ 道溪書院 柱聯

도계서원 묘정비문(道溪書院 廟庭碑文)

先賢이 미덕으로 백성을 다스리면 그를 흠모하여 뒤에 제사를 받게됨으로 죽은 後에야 祭祀를 받게 되는 것이다.
영주(瀛州, 古阜)의 道溪書院의 여덟 선생을 祭享함도 그러함이다.
이 서원은 顯宗 癸丑년에 창건하여 李益齊, 金鰲峰(김오봉) 崔慕庵, 金苔川 네 선생을 제 향하고, 肅宗 丁丑년에 金竹軒 선생을 憲宗 庚子년에 金鶴山 선생을 추가(追加)하여 제사를 지내다.

그 뒤 高宗 戊辰년에 사당이 朝廷에 의하여 헐리니(毁損), 선비들이 사모하며 잊지 못하 여 96년을 지나 癸卯년에 다시 사당을 중건하고 金退休齊 金安息窩(김안식와) 두 선생을 다 시 모시고(追享), 오래동안 제사를 지내지 못 했던 제사의 禮를 이루니, 선비들은 흡족하게 여기었다.
그 뒤 丁巳년에 서로가 費用를 내어 모아 묘정비(墓庭碑)를 세울 것을 의결하고, 院任 金徵洛 金秀洛이 나에게 記文을 청하여 박식하여서 감당치 못하나 그 분들을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사양하지 못하였다.

익제 선생의 이름은 希孟이며 古阜李氏이다. 諡號(시호)는 文安인데 김점필제의 으뜸가는 제자로 일찌기 文科에 합격하여 都承旨 벼슬을 하였다. 이는 변무사로 황명에 들어가 절개 를 지키고 충성을 다 하여 나라에 중요한 신하가 되었으며 禮曹判書를 贈職하였다.
오봉(鰲峰) 선생의 이름은 齊閔이요, 義城金氏이며 시호는 충강이며, 李一齊의 제자로 文科에 합격하여 承旨였다. 壬辰倭亂때 長城에서 두 차례나 義兵을 일으켜 여러번 크게 이겨 이 湖南이 兵禍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으며, 그 충절이 해와 별보다 더 하여 宣茂勳에 기록되 고 吏曹判書가 贈職되었다.

竹軒선생의 이름은 齊顔이요. 충강의 동생이다. 金河西 문하에서 공부하고, 郡王이 친필 로 태극도의 조서를 받고, 奇高峰과 四七說을 의논하니 선비들이 함복(咸服)하였다.
慕庵선생의 이름은 안(安)이요 全州李氏이다, 成廳松(성청송)에게서 수업하여, 깊숙하고 효도가 지극하며, 임진왜란에 倡義(창의)하여 軍穀을 모아 우리의 軍隊를 도우고, 繕工監 (선공감) 직장(直長)의 벼슬을 받았다.
鶴山 선생의 이름은 흔이요 충강공의 아들이다. 임진왜란에 아버지를 따라 王의 배를 저 어 피란하게 하였으며, 권율 장군을 도와 행주대첩을 하여 정란공신에 참열하여 훈신으로 서훈하고 左承旨를 贈職하였다.

退休齊선생의 이름은 건 이요 충강공의 아들이다. 龍蛇(용사)의 난리에 아버지를 따라 의 병하다가 마침내 아버지의 명을 받아 家庭을 돌보고, 子姪의 育成에 힘쓰니 나라에서 군자 감 부정의 벼슬을 주었다.
안식와(安息窩) 선생의 이름은 습(習)이요 충강공의 조카인데, 산림에 숨어 살다가, 金沙溪가 천거하여 參奉의 벼슬을 하였다. 丙丁년 난리에 의병을 도웁고 나라 일에 힘을 썼다.
태천(苔川)선생의 이름은 지수(地粹)요, 號는 정민(貞敏)이며 충강 선생의 손자이다. 문 과(文科)에 급제하여 承旨벼슬을 하다가 정부의 잘못을 항변하여 상소하다가 富寧에 귀양을 갔다. 仁祖 丙寅년에 金淸陰과 같이 중국 임금의 生日에 나아가서, 賀禮하고, 나라의 모함 을 변명하고 나니, 임금이 특별히 벼루를 주어 받아 왔다. 병자란때 義兵을 일으켜 싸우다 가 和議가 되니, 그만 痛哭하며 天台山에 숨어 들어가 나라에서 여러번 불렀으나 다시 나가 지 아니하고 그 깨끗한 절개가 백세에 까지 뻗치었다.
정난 공신에 참렬하며 勳臣으로 제사하고, 史曹判書에 贈職되었다.
슬프다! 여러 선생님의 功德과 學行과 忠節이 이 世上에 심어지고 百世에 模範이 됨이 넉 넉하다.

여러 선비들이 追慕하고 報答하는데 힘써야 할 것은 당연한 바이다.
원하건대 이 書院의 일이 다 끝난 것으로 여기지 말고, 여러 선생의 공덕과 충절을 잊지 말고 行動하여, 이 書院이 더욱 빛나고 여러 선비들에게 큰 복의 시초를 이루어 지기를 바 라는 바이다.


大韓光復 三十三年 丁巳 月 下浣
第一無任所長官 仁 同 張 坰 淳 謹撰
第一無任所長官 平 山 申 鉉 琦 謹書

도계(道溪)마을

이 마을은 마한시대-고비리국(古卑離國), 백제-중방(中方) 고사성(古沙城), 신라 평왜 현(平倭縣) 본고사부촌(本古沙夫村). 고려와 조선시대 고부군 답내면 조교리(俎橋里)라 하였으나, 1914년 부군제(府郡制) 실시로 정읍군(井邑郡) 이평면(梨坪面) 도계리(道溪里) 도계(道溪)마을이 되었다가 1987년 1월 1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편입, 정읍군(井邑郡) 덕 천면(德川面) 도계리(道溪里) 도계(道溪)마을이 되었다.

마을 앞들을 동서(東西)로 달리는 태고선(泰古線: 전주~태인~고부~무장)이 있어 고을 수령, 방백들이 왕래했으며, 남쪽 두승산(斗升山)에서 발원되어 마을 동편을 스쳐 북쪽 만경강에 합류되는 한수천(漢水川)이 마을 앞에서 태고선 十자를 이루는데 이 곳에 도마 와 같이 다듬어진 4간반석 다리가 있어 마을 이름 조차 다리 이름으로 불리워지기도 하였 다.

이 곳은 풍수지리설에 동산삭월혈(東山朔月 )이라 하여 만인이 우러러보는 인물이 끊 이지 않을 것이라 하며, 이 정기를 따라 하절기에는 수백마리의 학이, 동절기에는 하늘을 덮는 까막까치가 뒷산 노송밭을 찾아 들었다.
이 마을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때 의병대장인 오봉 김재민 선생이 만년에 후진 양성 에 전념했던 도계서원(道溪書院)이 있고, 효자로 김영균(金榮均) 부자(父子)와 김환성(金煥成) 부자가 살았으며, 임오군란때 의병장인 김환익(金煥益)과 만석군(萬石君) 김상훈 (金相訓) 고가가 각각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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