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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녹두꽃이 떨어지면…
작성자 관리자

갑오동학농민혁명(甲午東學農民革命)을 주도한 전봉준(全琫準) 장군의 이야기를 펼치고자 한다.
갑오동학농민혁명은 농민을 주체로 한 반봉건적인 민중 봉기였으며 그 배경은 동학(東學)의 근대적인 사상과 종교적인 치밀한 조직체계에 의한 것이었다.
직접적으로는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대한 고부 농민의 봉기로서 시작하여 민족의 자위(自衛)를 위한 민중의 항쟁이었으며 근세사의 횃불이었다.

또한 동학혁명의 주역들 즉 전봉준(全琫準), 손화중(孫華仲), 김개남(金開南), 최경선(崔景善) 등이 모두 정읍(井邑) 출신이라는 데에 향토사(鄕土史)에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어려서부터 키가 작아 녹두란 별명을 가진 전봉준 장군, 그는 1855년 태인현 산외면 동곡리(東谷里) 지금곡에서 태어났다.(고부군 이평면 조소리 출생이라는 설도 있음)
그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담력이 남달리 컸으며 눈빛이 날카로운 가운데 말이 없어 두려움마저 갖기도 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은 녹두라 부르며 함부로 가까이 하지를 못했다. 그가 있기까지에는 뒤에서 큰 뜻을 길러준 그의 부친의 힘이 컸었다 한다. 부친은 글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었으나 방랑하는 모습이 보였다고 한다. 그것은 생활의 기본이 되었던 농토마저 너무 적었기 때문이었다고들 말한다.
부친은 특히 노자(老子)의 도교(道敎)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익힌 곡식은 잘 먹지 아니하고 생식을 연구하고 구름을 타고 하늘은 나는 비행술을 연구하고, 땅을 주름잡는 축지법을 많이 연구했다 한다.
부친은 이런 점에 흥미가 컸기 때문에 전우치전을 극히 좋아했다 한다. 전우치는 조선 중종때 전남 담양사람으로 송도에 와 살았다는 이인(異人)이다. 전우치전 중에서도 "전우치가 밥 한 숟가락을 입에 놓고 질겅질겅 씹다가 마당에 뱉었는데 그것이 모두 흰 벌레 알로 변했다. 이어서 벌레알이 나비로 변하여 마당 가득 날아 마치 꽃잎이 흩날리는 것 같았다"...(생략) 라는 이런 장면을 좋아했다.
전봉준 장군은 출생부터 신비에 싸여 있었다.
장군이 잉태될 무렵 그의 부친이 태몽(胎夢)을 했는데 별안간 고창(高敞)의 소요산(逍遙山)의 만장봉이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꿈이었다.
참으로 기이하고 신비한 꿈이었다.
옛부터도 산을 짊어지거나 산을 떠밀고 들어올린 꿈을 꾸면 강대한 세력이나 단체를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실권자가 된다 했는데, 하물며 산이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꿈을 꾸었으니 실력자가 될 꿈은 틀림없었으나 한편 그 꿈의 신비성 때문에 해몽에 고심을 했으리라는 짐작도 간다. 전봉준 장군 자신도 어려서부터 자기의 이 태몽을 부친으로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전봉준 장군이 어려서 천자문을 떼고 동몽선습(童蒙先習)을 배우고 있을때 선생님께
『선생님, 우리 나라에서 제일 중대하고 귀한 일이 무엇입니까?』 어린 학생이 묻는 이 말에 선생님도 얼떨떨했다.
『그야, 농사가 제일 중요하지.』
『농사는 누가 짓습니까?』
『그걸 몰라? 농민이 짓지.』
『그럼, 농민이 가장 중요하겠네요?』
『그런셈이지』
『선생님, 그렇다면 왜 농민이 가장 푸대접을 받아야 하고 가장 못살아야 합니까?』 하고 꼬치꼬치 묻는 것이었다.

아마 장군에게는 어려서부터 장군으로서의 지혜와 총명을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장군이 13살 때 고창군 덕정면 바닷가에서 낙지를 잡는데 어른도 잡기 힘든 것을 별 힘들이지 않고 한 쾌(20마리) 씩을 재빨리 잡아오는 것 보고 주민들이 놀라곤 했다 한다.
15살때 부모로부터 결혼 권유를 받았다.
효심(孝心)이 깊은 장군은 부모님의 주선으로 송씨집안의 딸과 결혼했다. 나이 20세에는 벌써 슬하에 두 자녀를 두었다. 뿐만 아니라 15세부터 시작한 의학(醫學)공부도 꾸준히 계속되어 구하기 어려운 의서를 이곳저곳에서 구해보기에 전력투구했다하니 갖가지 방면에 걸친 그의 능력과 재주를 짐작할 수 있다.

한번은 부친의 주선으로 알게된 김순영이 찾아왔다.
김순영은 별안간 『여보게 전대장』
그때 나이 어린 장군은 깜짝 놀랐다.
어린 자기를 보고 대장이라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어째서 제가 대장입니까?』
『나는 자네를 처음 보았을 때, 뚫어 보는 눈이 있었네, 본래 인물이한 산하(山河)의 정기를 받고 태어나는 법인데 자네는 저 백산(白山)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음이 분명하네.』 하는 것이었다. 백산은 해발 50m도 안되는 작은 산이었다. 그러나 들 가운데 높이 솟아있고 또 강이 삼면을 구비돌고 있어 천연의 요지였다.
그러나 태몽을 생각해 본다는 소요산의 정기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어느땐가 아내 송씨부인이 시름시름 않고 자리에 눕는 일이 많아졌다.
병은 좀처럼 나을 줄을 몰랐다.

자기가 약방을 손수하고 있으니만큼 좋은 약이라고는 다 써보았으나 차도가 없었다.
유명하다는 의원을 청해 진찰을 받을 때마다 의원들은 고개를 흔들었다. 한 명의(名醫)가 와서 진찰을 하고 맥을 짚어 보더니 『어허, 이 병은 이미 깊어 있습니다. 돌이킬 도리가 없겠습니다. 병이 뼈 속에까지 깊이 침범했으니 말입니다….』 하는 것이었다.
아내는 의원이 돌아간 후
『여보, 저는 다 알고 있어요. 이제 눈을 감아도 한이 없어요. 저는 제 몸의 병을 알고 있어요. 곧 죽을 거예요. 걱정을 많이 끼쳐드려 미안해요. 그리고 또 저 때문에 큰 결심을 미루고 있는지도 알고 있어요. 이제 저를 잊어주세요.』 하는 것이었다.
아내가 죽은 후 장군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장군은 김순영에게 여러분 가족의 병도 고치지 못하는 주제에 어찌 의원노릇을 더 하겠소. 하는 말을 누차 했다고 한다.

그후 약방문을 닫게 되었다. 그리고 장군은 서당(書堂)을 경영하였다.
1894년(高宗 31年) 갑오년 동학혁명의 불길은 이미 지난 가을부터 싹트고 있었다.
그것은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이 만석보(萬石洑)라는 제방을 쌓는데 터무니없는 물세를 농민들에게 부과한데서 비롯되었다.

보는 방죽으로서 수리(水利)관개 시설이었다.
장군은 이때 세 마지기의 논밭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오히려 서당 훈장을 하여 생계를 꾸려 가는 실정이었다.

장군은 추운 겨울날 밤 혼자서 황토현(黃土懸) 공동묘지 부모님과 아내의 묘소를 찾았다.
『아버님, 어머님, 불효자를 용서하십시오. 저는 마침내 교도를 이끌고 봉기하기로 수백 번 결심했습니다. 목숨을 바치기로 이미 피로써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남겨진 어린 자식들이 불쌍하오나 이 아비를 원망하지 않을 줄로 압니다….』
장군은 먼 훗날 민주(民主)의 중추가 되고자 이렇게 결심했던 것이다.
장군이 농민의 주력 부대를 마항 장터로 옮기고 일부는 고부(古阜)에 남겨 두었다.
장군은 이 마항에서 대장간 주인을 독려하며 무기를 만드는 한편, 백산(白山)에 일부 병력을 보내어 진지를 구축할 때였다.
이때 다음과 같은 소문이 나돌았다 한다.
전봉준 장군은 희대의 참 영웅이다. 또 그는 신출귀몰(神出鬼沒)하는 이인(異人)이다.
구름을 타고 다니는 조화(造化)를 부린다.
총알에 맞아도 죽지도 아니한다.
적군의 총구멍에 물이 나오도록 조화를 부리고 있다.
이런 소문이 들끓자 농민들은 백산으로 가자고 외치며 수만 명의 교도가 모였는데 모두 흰옷을 입어 이름 그대로 백산(白山)이었고, 그 수만 명이 모두 죽창을 가지고 있어 산이 대나무 숲을 이룬 것처럼 보여 죽산(竹山)이었다.
황토현 싸움 때였다.
장군이 농민군을 부안군 부흥역과 태인현 인곡 북촌에 전진 배치할 때 농민군은 행진하면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군가(軍歌)처럼 불렀다 한다.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되면 못 가보리

가보세는 혁명이 일어난 갑오(甲午)년을 의미하고 을미적은 을미(乙未)년까지 적을 무찌르자는 것, 만일 병신(丙申)년까지 질질 끌면 안 된다는 내용이다.
그는 속전속결을 목표로 했던 것이다.
황룡촌 싸움 때였다.
장군은 머리에 백립(白笠)을 쓰고 흰옷을 입고 손에는 백팔염주를 들고 주문을 외웠다. 최후 결전, 세성산 전투에서 동학군의 패배로 김복용이 잡혀 총살되는 등 장군의 계획에 차질이 빚어질 때였다.
그러나 장군은 그럴 때일수록 앞에 서서 목숨을 걸고 지휘했다.
공주 남쪽 경천점으로 진출함과 동시에 잇달아 격전을 벌일 때는 장군은 가마를 타고 소라고동을 불며 진두지휘 했다고 한다.
갑오동학혁명의 3걸(三傑)은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이다.
전봉준은 전주, 손화중은 나주, 김개남은 남원에서 전라도를 관장했다. 그런데 손화중(孫華仲)의 일화를 하나 기억하면 흥미가 있다.

손화중은 지금 정읍시 과교리(井邑市 科橋里) 출생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쓰고 대망을 품은 채 지리산 청학동(靑鶴洞)으로 들어가 때마침 영남지방을 휩쓸고 있던 동학에 입문하게 되었던 것이다.
1892년 8월, 전라도 무장현 선운사 도솔암(禪雲寺 兜率庵) 남쪽편에 수십척 되는 절벽 앞면에 불상이 있었다.

이 불상은 3천여 년 전에 금당선사(黔堂禪師 : 선운사를 창건했다는 전설의 高僧)의 불상이었다. 그 석불(石佛) 배꼽 속에 신비스러운 것이 들어 있다는 것이었다. 즉 세상을 흔들만한 큰 비결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이 배꼽에서 비결이 나오는 날에는 한양이 멸망해 버린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그런데, 그 무렵 전라 감사로 발령을 받아 이서구(李書九)라는 사람이, 부임후 며칠이 지난 다음 이상한 기운이 남쪽에서 일어남을 보고, 도솔암에 있는 그 석불을 찾아 배꼽을 떼고 속에 들어있는 비결을 꺼내고 말았다.

꺼내자마자 갑자기 뇌성병력이 일어나 정신을 잃게 되자 겁에 질려 책을 얼른 넣고 봉해 버렸다.
그때 이 서구는 책장 첫머리에 이서구 개탁(開坼)이란 글자만 보고 덮어버렸다 한다.
그후 어느날, 동학 접주 손화중 주변에서 이 비결이 큰 화제에 올랐다.
이 때를 놓치지 말고 배꼽을 뜯어야 한다고 뜻을 모아 청죽(靑竹) 수백 개와 새끼 수백 발을 준비하여 석불 앞에 발판을 만들고 석불의 배꼽을 부순 후에 그 속에 있는 신비의 책을 꺼냈다.
이 비결이 나온 후에 무장, 고창, 영광, 장성, 흥덕, 고부, 부안, 정읍 등지의 사람들이 관리나 평민을 가리지 않고 수만 명이 동학(東學)에 뜻을 함께 하게 되었다 한다.

갑오동학혁명을 전후해서 전라도 지방에 유행했던 동요(童謠)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
전주(全州) 고부(古阜) 녹두새야
어서 바삐 날아가라
댓잎 솔잎 푸르다고
봄철인 줄 알지 마라
백설(白雪)이 휘날리면 먹을 것 없다.

또 농민들 사이에 전해진 파랑새 노래는 녹두장군을 추모하는 깊은 정이 담겨 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 밭에 앉지 마라.
녹두 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가.

파랑새는 청나라 군사를 말하고 녹두는 전봉준 장군을, 청포장수는 백성들을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어쩌면 파랑새는 청병이 아니고 일병(日兵)을 뜻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야만 녹두장군이 뜻을 펴려던 동학혁명과 그 실패를 설명하는 의미가 담기기 때문이다.
1895년 41살의 나이로 교수대 앞에 선 전봉준 장군, 법관이 마지막으로 그에게 물었다.

『가족은 있는가?』
『6명이 있다.』
『가족에게 전할 말이 있으면 전하라.』
『없다. 다만 나를 죽일진대 종로 네거리에서 나의 목을 베고 지나는 사람들에게 내 피를 뿌려 주는 것이 옳거늘 어찌 컴컴한 도둑의 소굴에서 몰래 죽이려 하느냐?』

그리고 형장 앞에서 시를 읊었다 한다.
장군이 가신지 오래지만 그분의 높은 정신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하여 매년 정읍시(井邑市) 주최로 갑오동학농민혁명 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자료제공:[ 정읍의 전설 ] 김동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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