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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시 문화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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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관광|전통문화|풍류|단체|아앙계(峨洋契)

아앙계(峨洋契)

풍류는 여러사람이 모여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것에 비하여 단체가 잘 조직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풍류가 풍류방을 중심으로 전승되었던 이유도 그것이 조직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풍류는 꼭 고정적인 조직 속에서만 행해진 것은 아니었다.
풍류는 여러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이었지만, 꼭 인원수의 제한을 받지는 않으며, 모이는 대로 하면 그만이었다. 누구든 풍류를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같이 연주할 수 있었다.

풍류는 누구에게 들려주기 위한 음악적 성격보다는, 연주자들끼리 함께 즐기는 자족적인 성격이 강한 것이었다.
그래서 전업적인 전문 연주자들보다도 아마추어 연주자들이 더 많았다.
또한 풍류는 예전부터 선비들도 연주를 해 온 전통이 있기 때문에 판소리나 춤과 같이 신분적인 제약이 심했던 다른 예술에 비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단체에 참가하여 연주를 할 수가 있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풍류는 다른 음악에 비하여 단체의 지속성이 강했다.

풍류는 또한 다른 지역의 율계와 교류가 많았으며, 어떤 경우에는 더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지역의 율계나 개인과의 교류도 많았다.
이번 조사기간 중에도 멀리 구례나 서울에서부터 율계의 모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따라서 풍류와 관련된 율계는 조직적인 성격이 강함에도 불구하고 매우 개방적인 것으로 생각 되었으며, 율계가 순수한 음악 연주만을 위한 것이었다기보다는 친교적인 성격이 강했음을 알 수 있었다.

정읍 지역에서 언제부터 풍류가 연주되었으며, 풍류객들이 조직 혹은 단체를 이루어 활동을 시작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현재 정읍 풍류에 관하여 증언을 할수 있는 사람들을 광범위하게 만나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정읍지역의 풍류 대가였던 전계문의 시대(1872-1940)까지는 별다른 조직이나 단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본래 향제풍류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오늘날과 같은 형식으로 완성되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당연한 일로 생각된다.
물론 향제풍류의 초기 형태가 그 동안에도 존재했을 것이지만, 그것은 민간에 널리 유포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전계문의 시대에 향제풍류는 완성되었고, 그에 따라 많은 수의 풍류객을 확보하면서 전계문 이후의 세대인 전추산(1884?-1964?)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대중적인 조직을 갖춘 것으로 볼 수 있다.

전추산은 1938-9년 경부터 정읍의 대부호였던 박문원의 산정에 머물면서 제자들을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박문원은 정읍의 대부호였을 뿐만 아니라, 음률을 좋아하여 그가 지은 산정에는 항상 소리꾼이나 풍류객이 끊일 새가 없었다고 한다.
아마 전추산도 박문원의 집에 식객으로 오래 드나들며 풍류에 관심있는 사람들을 만나 가르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전추산과 함계 풍류를 연주하거나 배웠던 사람은 정읍 태인 출신의 김용근, 김제 출신의 나금철, 이리 출신인 황성규, 정읍 감곡 출신의 신달룡, 정읍 출신인 이기열, 나용주 등이었다고 한다.
박문원의 산정에서 풍류를 익힌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나자, 이들을 중심으로 한 풍류의 조직이 생길 만한 여건이 갖추어지게 되었고, 해방 직후에는 그 구체적인 결실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정읍 지역 풍류객들의 최초의 조직은 아양계(峨洋契)이다.
아양계는 후에 초산율계(楚山律契)로 발전하였고, 다시 정읍정악원으로 통합되어 오늘에 이르면서, 정읍지방 풍류의 전통을 이끌어온 모체가 되었다.
이제 이 조직에 대하여 차례차례 알아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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