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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1894년 연대기를 온통 차지하고 있는 '일대 사건'이 1백년이 넘은 오늘날까지 마땅한 제 이름을 갖지 못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은 한동안 역사의 뒷전에 익명으로 묻혀 있었고 한동안은 오명을 뒤집어쓴 채 역사의 왜곡에 시달리기도 했다.
최근에는 그 익명과 오명을 보상 받으려는 듯 너무 많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한 때의 명명법은 시대적 정치적 편의에 따르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집권세력의 의도에 가름된 적도 있었다.

오늘날은 '동학농민혁명'을 연구하는 여러 학자들에 의해 여러 가지 명칭이 제시되고 있다.
대사건에 대한 저마다의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성격규정에 따라 제각기 다른 이름을 내놓고 명명의 정당성과 타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지난 90년 6월에는 명명 문제만을 놓고 학계의 대규모 토론회가 열리기도 했으나 아직까지 일치된 결론이 도출되지 않은 상태다.
여기에서 채택한 '동학농민혁명'도 공증을 받은 정통 역사용어가 아님은 물론이다.
1894년 사건의 이름짓기가 아직까지 현재 진행형으로 남아있는 까닭은 사건 자체가 복합적인 성격을 지닌 채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던 데에는 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그동안 사실복원과 규명에 있어 끈질기고 치열한 역사적 조명을 받지 못했던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 1894년 사건은 역사의 적자(嫡子)로서 떳떳하고 당당한 이름이 지어져야 한다.
사건과 관련된 유물이나 유적, 각종 기념비나 기념관을 준비하는 기념사업 등의 이름이 제각각으로 불리고 있음은 안타까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올바른 명명이야말로 모든 재조명 작업의 시작이자 끝이다.
동학농민혁명에 처음 부여된 이름은 '동적(東賊)의 난(亂)', '동학배(東學배輩)의 난', '동학비도(東學匪徒)의 난', '동학도당(東學徒黨)의 난', '동학비란(東學匪亂)', '동학변란(東學變亂)' 등 이었다. 이는 구한말 봉건 지배세력의 시각에 비친 모습이었다.
사건 당시나 직후에 기록된 각종 관찬 사료나 양반 지배계급에 의해 씌어진 문집 등이 이 같은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일제시대인 일본인 관학자들의 연구시각도 당연히 이러한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
동학농민군들이 제거하려 했던 외세가 바로 일제(日帝)였음에 비추어 그들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사학자들이 사건 자체를 공정하게 다뤄주기란 애초부터 기대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오직 동학농민혁명을 축소왜곡하고 박제화, 형태화 하는 데만 기여했을 뿐이었다.
결국 구한말부터 일제기간 동안 동학농민혁명은 '난'(亂)의 개념으로 정리된 채 일반화 됐다.

저서《한국통사》(1914)를 통해 '동학란'이 양반 지배층의 압제와 관리의 탐학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지적하고 이를 봉건적 모순을 극복하려는 반봉건운동으로 파악해, 당대의 유학자들과는 달리 탁월한 역사적 식견을 보여주었던 사학자 박은식(朴慇植, 1859∼1925)도 용어사용에서는 '동학란'을 벗어나지 못했다.
또한 '동학란'을 조선 민중운동사의 일대 선구로 평가했던 김제출신 사학자 김상기(金庠基)도 1931년 8월 21일부터 10월 9일까지 당시《동아일보》에 36회에 걸쳐 연재했던 본격적인 학술연구 논고의 효시를 이름하여 '동학과 동학란'이라 했다.
해방이전까지 '동학란'(東學亂)이라는 용어는 대중적인 명칭이기도 했으며 학계에도 보편화되었을 뿐 아니라 완고하게 사용되었다.
용어 사용에서 엄정해야 하고 따라서 조심스러운 입장인 학계와 달리 천도교측에서는 1920년대부터 '동학혁명'(東學革命)을 고집하고 있다.
그러나 천도교에 의한 '동학혁명'은 동학이라는 종교사상의 근대성과 민족 주체성만을 부각시켜 반외세 반봉건의 역사적 변혁운동을 동학과의 연관속에서만 인식하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하여 학계의 일반적 동의를 얻지 못하고 있다.
'東學革命'이라는 명명은 한편으로 60년대 후반부터 교과서의 공식용어이기도 했다.
이전까지 난(亂)으로 평가절하됐던 표기법을 주체적, 근대적, 발전적으로 한 차원 끌어올리자는 시대적 요구에 의한 것이었다.
4·19를 계기로 한 시민의식의 용출, 식민주의사학의 극복이라는 학계의 부담 등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내놓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이 시대의 '동학혁명'이라는 이름짓기도 의욕만 앞선 근대화와 철저하지 못한 식민주의 사관의 극복으로 인해 ' 동학농민혁명 '의 사회경제적 배경 및 성격 규명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따르고 있다.
더욱이 당시 정권을 담당하고 있던 5·16의 주체세력들이 5·16을 혁명으로 명명받으려는 노화한 착상에서 교과서의 용어를 '난'(亂)에서 '혁명'(革命)으로 '승격'시켰다는 분석까지 제기되고 있다.
오랫동안 용어에서 '동학'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인자로 보였다. 이에 일대 타격을 가한 시도가 월북 경제학자인 전석담(全錫淡)에 의해 이뤄졌다.

그는 저서《조선사 교정》(1947)에서 1894년 사건을 '농민전쟁'이라는, 당시에는 다소 생소하고 획기적인 개념으로 파악하려 했다. 동학이라는 종교적 껍데기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참가 민중의 절대 다수가 농민이었고 지도자가 농민적 의식을 가졌으며 투쟁구호가 반봉건적이었다는 점을 지적하여 사실상 농민전쟁이라는 것이 전석담의 주장이었다.
여기에서 태동한 '농민전쟁'이라는 명명법은 국내외 학자들의 많은 공감을 얻었고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북한 학계에서는 '동학'을 거세한 '갑오농민전쟁'을 공식용어로 채택·사용하고 있다.
그들은 1959년 동학의 역할이나 연관성 문제를 놓고 일대 토론을 벌인 뒤 "농민전쟁의 발발과정에서 동학도들과 동학의 조직망이 담당한 역할을 도외시하거나 과대평가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을 내리긴 했으나 공식용어에서는 이를 배제한 채 '갑오'(甲午)라는 연대명을 붙여 사용키로 했다는 것이다.
지난 1989년 월북작가의 작품이 원전 그대로 출간 판매됨으로써 화제를 모았던 동학혁명을 소재로 한 박태원(朴泰遠, 1908∼1986)의 대하역사소설 제목이 ≪갑오농민전쟁≫이었음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교과서를 통해 '동학난'이나 '동학혁명'으로 배웠던 대부분의 일반 대중에게 여전히 낯설기만 한 '농민전쟁'이라는 용어는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농민전쟁'은 흔히 봉건사회 내부에서 개혁을 목적으로 전개되는 일종의 농민운동으로 정의되고 있다.

14세기 프랑스와 영국에서, 15세기 독일에서, 17세기 이후의 러시아에서 발생했던 영주권력과 농민(농노) 사이의 계급투쟁이 여기에 속하는 것이다.
이때의 투쟁은 봉건체제를 전복해 버리려는 혁명적 의지가 배제된 채 영주의 권력을 부정하거나 농민층의 요구를 관철시키려는 제한적 소극적 항쟁의 권력을 부정하거나 농민층의 요구를 관철시키려는 제한적 소극적 항쟁에 불과한 형태였다. 좁은 지역적 이익에 의한 결합, 통일된 조직의 불비, 취약한 계급의식 등의 한계로 인해 실패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농민전쟁'의 명명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1894년 조선의 농민들에 의해 번진 변혁운동이 중세유럽의 농민전쟁과 내적 성격이나 외적 형태면에서 모두 일치한다고 지적한다.
즉 1894년 사건이야말로 역사 발전의 내재적 흐름에 따라 조선봉건사회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농민전쟁'의 전형이라는 것이다.
또한 사회 계급적인 제한성을 갖는 농민들이 혁명적 부르조아나 노동계급의 영도를 받지 못한 한계 때문에 봉건제도 자체를 철폐하는 문제와 결합하지 못했던 중세 유럽 농민전쟁의 결함을 그대로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반면 '농민전쟁'이라는 용어는 한민족의 독특한 변혁운동을 역사발전의 세계사적 도식 속에 지나치게 틀 지으려 하며 따라서 '동학농민혁명 '의 성격이나 역사적 의의를 왜소화하지 않나 하는 일부의 우려에 부딪혀 있다.
특히 역사학에 정통하지 못한 일반 대중들은 '전쟁'이라는 어휘에 정서적으로 공감하지 못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오늘날 '1894년 사건'에 대한 용어 규정은 크게 두 가지의 논점에서 다뤄지고 있다.
하나는 '동학'(東學)이라는 종교사상적 요소를 포함시켜야 하느냐 하는 치장의 문제이고 또 다른 하나는 '농민전쟁', '혁명운동', '혁명'등 성격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하는 본질의 문제가 그것이다.
이 두 가지 요소가 곧 사건의 주체와 동력을 어디에 설정하는가의 문제이다.
즉 동학사상이나 동학교문의 비중을 어느 정도 인정하느냐에 대한 편차이다.
여기에는 전면 부정과 완전 인정이라는 양극단의 주장과 외피론과 절충론 등으로 설명되는 중도적 견해들이 스펙트럼처럼 깔려 있다.
동학의 역할을 전면 인정하거나 부분적으로 연관짓되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연구자들은 접두어로서 '동학'을 반드시 사용해야 한다는 쪽이다.
반면 동학사상이 지도이념으로서 역할을 하지 못했으며 동학교문의 활약도 사건의 전개에 영향을 주지 못할 만큼 미미했다고 보는 학자들은 '동학'을 아예 사용하지 않고 대신 '갑오', '1894년' 등의 연대명을 이용하자는 입장이다.
두 번째는 혁명이냐 농민전쟁이냐는 논쟁이다. 동학사상이 지닌 혁명적 요소를 중시하거나 사건 자체가 근대 부르주아 혁명으로서의 위상과 성격을 갖추고 있다고 보는 경우 '혁명'이라는 용어를 택하게 된다.
그러나 사회경제적 지향, 투쟁방법, 조직 등에서 보이는 느슨함과 특히 결과적으로 실패했음을 지적하는 학자들의 입장은 이와 다르다. 봉건사회의 해체기에 농민들에 의해 전개되는 유럽식 농민전쟁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한편 신용하(愼鏞廈·서울대) 교수는 "형태적 방법으로 볼 때는 농민전쟁의 특징을 갖고 있으며 역사적 성격으로 볼 때는 농민혁명운동의 특징을 갖는다"고 지적, 성격규정의 어려움과 함께 양자의 입장을 함께 수용하는 명명법을 제시한 적도 있다

최근 학계에서는 일단 동학난, 동학농민봉기, 동학혁명, 동학농민운동 등의 용어사용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쪽에 잠정적 합의가 이뤄져 있다.
따라서 '갑오(또는 1894년 )농민전쟁', '갑오농민혁명', '동학농민전쟁', '동학농민혁명' 등 4가지 조합이 학계나 일반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함께 학계의 일각에서는 '새로운 가치나 신념체계'를 뜻하는 한국적 어휘인 '개벽'(開闢)의 사용을 검토해 보자는 주장도 나와 관심을 끌고 있다.
이들은 서구적인 역사관으로 한국사의 특수성을 제대로 파악해낼 수 없다는 지적과 함께 동양적인 역사발전론을 찾고자 하는 그룹으로 최제우(崔濟愚)가 제시했던 '다시 개벽'이라는 용어를 주목하고 있다.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여러 개의 얼굴과 성격을 지니고 있는 ' 갑오동학농민혁명 '이 한 가지의 통일된 이름을 갖기란 애초부터 기대하기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특히 학계에서 이름짓기를 합의해 낸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숙제가 아니다.
따라서 학계의 전문용어와 일반인들이 부르는 대중용어가 따로따로 정리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 관리부서토탈관광과/동학농민혁명선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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