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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사상

동학농민혁명에 있어

동학은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가.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의 관련성을 따지는 이 같은 문제는 동학농민혁명의 전체적인 성격을 규명하는 기초가 된다는 점에서 일찍부터 학계의 주요 연구과제로 부각됐다.
그동안 많은 연구자들의 활발한 연구성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쟁점으로 남아있는 이 문제는 동학사상의 내용과 성격을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따라 달리 해석되고 있다.
기존의 연구경향은 대체로 동학사상을 단순한 종교사상으로 이해하는 견해, 동학사상을 그 자체 내의 부르조아 혁명 원리를 내포하는 혁명이념으로 보는 견해, 동학사상은 혁명의 원리나 이념은 아니지만 그것이 지닌 현실부정 성격에서 드러나고 있는 반봉건·반침략적 지향들이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의 결합에 의해 혁명적 원리로 전환되었다고 보는 견해 등으로 나뉘어 있다.

농민혁명과의 관계뿐 아니라 농민혁명의 성격, 농민혁명의 주도·주체세력에 대한 문제들을 해석하는 데에도 중요한 열쇠가 되는 동학(東學)은 어떤 사상과 이념으로 당시대 민중들에게 파고들었는가를 살펴보자.

수운(水雲) 최제우(崔濟遇)의 창도

19세기 중엽 조선왕조는 정치적으로는 세도정치와 과거제도의 문란으로, 사회·경제적으로는 수취제도의 문란과 지방수령들의 일반 민중들에 대한 가혹한 수탈이 가중되는 가운데 민중들의 봉기로 인한 지배체제의 모순이 날로 심화되었다.
또한 주기적인 전염병의 유행과 자연재해는 민중을 궁지로 몰아넣었고 지배체제를 주체적으로 개혁하고자 등장했던 실학사상마저 이 시기에는 거의 영향력을 잃고 있었다.
이와 함께 전통적으로 중국을 중심으로 하던 동아시아 문명권은 물밀듯 밀려오는 서구제국주의 열강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던 시기다.
특히 중국에 대한 서구 열강의 침략과 조선연안의 잦은 이양선 출몰로 인해 민중들의 위기의식이 고조됐다.
이러한 위기의 시대, 왕조 말의 혼란한 사회 속에서도 주목할 만한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다름아닌 피지배층들의 의식의 변화였다.
민중들은 악화된 삶의 환경개선을 수령들에게 요구하기 시작했고, 그 같은 요구는 점차 조직화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정감록(鄭鑑錄)≫에 의지하거나 '미륵불사상'을 빌어 봉기한 민란이었기에 조직이념은 아직 엉성하였고, 지역성의 한계를 뛰어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동학은 이 같은 시대적 배경에서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遇)에 의해 창도 됐다.
1824년 경주(慶州)의 몰락양반 최옥의 서자로 태어난 그는 젊은 시절 내내 혼란한 시대 속에서 방황하고 고뇌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겪어야 했던 고난과 시대의 아픔을 이중으로 안으며 상당기간 동안 전국을 유랑하였고, 유랑기간동안 수련을 거듭한 끝에 1860년 4월 5일 동학을 창도했다.
동학은 조선후기에 이르러 일정하게 성숙하고 있던 민중의식을 기반으로 삼아 피지배층들의 요구와 이해를 집약적으로 대변하여 창도되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동학은 이중의 모순에 의해 시달리던 조선후기 민중들이 시대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제시한 '조선민중의 자기확립사상'이었던 것이며, 최제우는 바로 조선후기 민중을 대표하여 당시의 민중의식을 조직화한 인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수운(水雲) 최제우(崔濟遇)의 창도

동학의 모든 사상적 요소는 최제우에 의해 거의 완성된 것으로, 그가 저술한 동학경전인 ≪용담유사(龍潭遺詞)≫와 ≪동경대전(東經大全)≫에 담겨 있다.
이 두경전은 사본으로만 전해지던 것을 수운이 처형된 이후 2대 교조인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의 구송(口誦)으로 대신 씌어져 편찬되었다고 한다.
수운이 동학을 창도하는 데 활용한 지적 자원은 일차적으로 종래의 유교·불교·선교의 지식체계와 서적들이었다.
이와 함께 그는 또 민간에 전승되어온 주술적 신앙이나 도참사상까지 포섭하여 개인의 구제와 새로운 사회질서의 도래를 예언하였다.
수운에 의해 확립된 이 같은 동학사상의 특징은 대체로 후천개벽(後天開闢)사상, 시천주(侍天主)와 수심정기(修心正氣)사상, 치병(治病)과 유무사상(有無相資), 척왜(斥倭)와 반서양(反西洋)사상, 정감록적 민중사상의 수용 등으로 집약할 수 있다.

후천개벽종말론 주장

수운은 한글경전 ≪용담유사≫에서 자신이 득도하기 전까지의 시대를 '개벽 후 5만년', '하원갑', '전만고' 시대라고 표현하고 이 시대는 '각자위심'(各自爲心, 진리로부터 이탈하여 자기 멋대로 행동한다는 뜻)의 시대로서 모순이 가득찬 시대임을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이와 대비되는 다가오는 새로운 시대는 '다시 개벽', '상원갑', '후만고', '오만년지운수'의 시대로서 이 시대는 '동귀일체'(同歸一體)의 호시절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의 혼란한 시대가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종말론(終末論)을 주창하면서도 다가오는 새 시대야말로 이상시대가 될 것이라는 낙관적 종말론을 주창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수운자신이 확립한 동학사상이야말로 오만년 동안 지속되어온 지금까지의 문명을 해체시키고, 다시 오만년 동안 지속될 새로운 문명을 열기 위한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무극대도(無極大道)라고 천명한다.

시천주(侍天主)와 수심정기(修心正氣)

수운은 ≪동경대전≫ 속의 <논학문> 에서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 '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이라는 말과, ≪용담유사≫ 속의 <교훈가> 에서 '나는 도시 믿지 말고 한울님만 믿었어라 네 몸에 모셨으니 사근취원(捨近取遠) 하단 말가' 등의 표현을 통해 한울님과 인간이 둘이 아님을 나타냈다.
즉 한울님은 어떤 초월적 존재로서의 의미가 아닌 바로 자기 안에 모실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도 수련을 통해 한울님과 일체화할 수 있고 자기 안에 모셔진 한울님을 체험할 수 있다는 수운의 한울님사상을 시천주(侍天主)사상이라고 한다.
동학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이 사상은 당시 반상(班賞)·적서(嫡庶)·남녀(男女) 구별이 엄격한 봉건체제를 전면으로 부정하는 반계급적 평등사상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수운에의해 확립된 동학의 평등사상은 최시형을 통해 실천적으로 전개되어 동학농민혁명을 가능케 하는 힘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그러면 인간이 한울님과 일체화를 이루는 길은 무엇인가.
수운은 '수심정기'(修心正氣)라는 수행법을 통해 자기 안에 모셔진 한울님을 체험할 수 있다고 제시했다.
마음을 닦고 기운을 바르게 하는 이 수심정기를 이루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그는 주문과 성경신(誠敬信)의 수행법을 말하였다.

척왜양(斥倭洋)의 민족사상

수운은 자신의 깨달음을 동학(東學)이라 명명한 것은 바로 서학(西學)을 제압하고자 한 것이라 하여 민족주체적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또 자신이 제정했던 동학의 주요 의식인 검무(劍舞)와 검가(劍歌)를 통해 당시의 조선에 밀려들고 있던 서양 오랑캐에 대항, 전투적 의지를 고양시켰다.
이와 함께 임진왜란 당시 왜(倭)의 침략을 상기시키는 내용의 '개같은 왜적놈들'이라는 직설적인 표현에서 일본에 대한 수운의 격렬한 적개심을 살필 수 있다.
이 같은 척왜양사상은 그 후 1890년대에는 보은취회의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반침략사상으로 발전하게 되어 1894년 반봉건 반침략노선으로 이어지게 된다.

치병(治病)과 유무상자(有無相資)사상

수운은 동학을 전파하면서 조선후기 널리 유행하던 콜레라와 같은 전염병에 대한 약방문도 제시한다. 즉 자신의 가르침을 성심으로 믿고 따르게 되면 병도 자연 치유된다고 했다.
이때 자신이 천주로부터 받은 신령스러운 부적(부적 혹은 乙 적)을 그려 태워 물에 타서 마시면 효험이 있다고 전파했다.
또한 수운은 그의 제자들 중 경제적 여력이 있는 자들로 하여금 가난한자를 돕도록 했다.
이 유무상자(有無相資)사상은 동학조직이 수운 당시부터 매우 끈끈한 공동체로 자리잡아 그가 처형된 후에도 수십년간 지하조직으로 존립하는 것이 가능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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