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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8일 밤 최영두는 아들 익서와 고창 박정집(朴正執) 등 32명을 거느리고 고부군아를 습격하여 양총(洋銃), 천보총(千步銃), 조총(鳥銃), 화약(火藥)과 철환(鐵丸)을 탈취해 가지고 입암면 왕심리로 와서 미리 집결해 있는 농민 3백여 명에 무장을 갖추었다.
이들은 전라도에 각 고을에서 모여든 동학의 여당들이었다.
무장을 갖춘 농민들은 19일 밤 흥덕(興德)으로 진격하고 21일밤 무장(茂長)으로 진격해 들어가니 때마침 무장관아가 텅 비어있고 무장읍민들이 놀라 달아나는 지경이었다. 그리고 22일에는 고창(高敞)으로 향했다.
이날 밤 고창 수성군(守城軍)과 접전을 벌였으나 때마침 비가 내려 패하고 말았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들이 비가 내리는 데서는 사용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최영두가 이끄는 일부 농민군은 미처 고창에 이르기 전 10리 밖 증대점(曾大店, 속칭 점대올(現 高敞郡 雅山面 鳳德里)에서 패보를 듣고 정읍으로 돌아왔다.
고창 싸움에서 패한 농민군은 난산장터(卵山, 속칭 알뫼장터, 現 高敞郡 富安面)로 후퇴했다가 다음 23일 관군과 접전을 벌였으나 패하고 많은 농민군이 관군에 잡혔으니 그 수가 2백여명에 이르렀다.

최익서는 고창성을 습격하여 이곳의 무기를 거두어 가지고 영암(靈岩)으로 내려가 당시 민란의 두목이었던 '최옵바시'와 합세하여 광주(光州)를 습격하고 이어서 전주감영(全州監營)을 함성한 뒤 서울로 진격한다는 계획이었으나 고창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정읍농민봉기는 일본의 침략으로 위기에 처해 있는 나라를 구하려는 민중의 구국항쟁으로 갑오동학농민혁명의 맥을 이은 민중의 거사인 것이다.
주역의 지도자들이 갑오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인물들인 최영두, 최익서, 최방서, 김여중(金汝中, 喆中), 김문행(金文行), 김태서(金台書), 홍락관(洪洛寬), 홍계관(洪桂寬), 손치범(孫致凡), 김상흠(金相欽), 김철중, 성재명(成在明) 등이다.
특기할 것은 최익서 일족의 활동과 차치구(車致九)의 아들 차관순(車寬淳, 京石, 普天敎主) 일가의 활동이다.
갑오년(甲午年, 1894)의 동학여당들은 정읍농민봉기 뒤에도 재기를 도모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갑오동학농민혁명은 안으로 민주주의를 추구하였고 밖으로는 민족의 자주독립을 표방한 민중봉기로 역사적으로 그 의의가 자못 큰 것이다.
일본의 침략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한 동학농민군 여당(餘黨)들은 좌절하지 않고 일본의 침략에 맞서 의병항쟁을 전개하였으며 1919년에는 항일 민중봉기인 기미(己未) 3·1운동에 주도적인역할을 했다.
갑오(甲午) 정신(동학혁명)은 3·1정신으로 이어졌으며 또 3·1정신은 바로 우리의 민족정신으로 맥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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