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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봉기

전라북도 동학농민혁명의 흐름
선정비

태인 태성리 소재의 피향정에 있는 탐학군수 조병갑의 아버지 조규순이 태안현감을 지낸 치적을 기리는 선정비

농민전쟁이 본격적으로 불붙기 전, 1893년 한양과 삼남지방에서는 온통 척왜양의 물결로 술렁거렸다. 이러한 물결은 찬바람이 불면서 잠시 수그러지는가 싶더니 1894년 1월 10일 고부에서 다시끓어 올랐다.
흔히들 말하는 고부군수 조병갑의 탄학만행이 고부봉기의 도화선이 되었다. 조병갑은 부임 초부터 온갖 노략질을 일삼고 있었는데, 그러던 중 1893년 11월 30일에 익산군수로 전임발령이 났으나 전라감사 김문현을 통해 고부군수 재취임의 공작을 벌여 마침내 1894년 1월 9일에 재부임하였던 것이다.

다음날 전봉준은 오래 전부터 긴밀한 관계에 있던 동지들에게 연락하는 한편, 군민들을 말목장터로 모았다. 전봉준은 말목장터에 모인 군중을 두 패로 나누어 고부관아로 달려갔다. 새벽공기를 가르는 함성과 함께 고부관아는 힘 안들이고 점령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조정에 알려져 김문현과 조병갑은 그 책임을 추궁당하고, 조병갑의 후임으로 용안현감이었던 박원명이 임명되고 또 장흥부사 이용태가 안핵사로 임명되었다.

2월 말쯤 신임군수로 부임한 박원명은 농민군과 민정을 의논하고자 이들을 초대하여 크게 잔치를 베풀면서,
"모든 것이 고부군에서 잘못하였고, 여러분의 뜻을 받들어 읍폐를 시정하겠다"는
뜻을 전달하였다.
이런 유화책에 말려든 농민들은 하나 둘 해산하기 시작했고, 3월 초 전봉준 이하 간부들은 다음을 준비하기 위해 고부를 표연히 떠났다.

무장에서 1차기병

기병 고부를 떠난 전봉준은 무장으로 달려가 손화중을 찾았다. 거기서 전봉준은 손화중과 손잡고 4천여명의 농민군을 모아 '호남창의소'라는 이름 아래 「창의문」을 선포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1894년 3월에 일어난 농민전쟁의 제 1차 기병이었다. 전봉준은 농민군을 이끌고 3월 20일 무장을 출발하여 고부로 쳐들어갔다.
고부를 점령한 후 쌓인 민원을 처리하고 25일에는 백산으로 본진을 옮겼다. 이리하여 부근에서 몰려와 집결된 농민군의 수는 약 8천여 명. 정부에서는 이런 사태에 접하여 3월 29일 장위영 정령관 홍계훈을 전라병사로 제수하였다가 4월 2일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장위영 병정 5대 800여 명을 3척의 전함에 분승시켜 군산항으로 출발시켰다.
김문현은 별장 이경호로 하여금 영병과 포군을 이끌게 하여 백산으로 출동시켰다.

이리하여 농민군은 감영군을 황토재로 유인하여 4월 7일 이른 새벽에 패배를 안겨주었다. 황토재에서 승리를 거둔 농민군은 해질 무렵 정읍을 들이쳤고, 8일에는 흥덕과 고창을 휩쓸었다.
9일 정오경 고창을 출발하여 4시경 무장 동헌에 돌입하였다.
전봉준은 농민군을 2대로 나누어 12일 이른 아침 무장을 출발하여 영광으로 쳐들어갔다. 영광에 도착한 농민군은 터져나오는 함성과 함께 거침없이 성문을 열었다. 농민군은 영광에서 요호들의 전곡과 마필을 징발하여 군량과 무장을 확보하고 16일 오전에 함평을 향해 출발했다. 농민군은 함평의 관문도 부수어 버렸다.

4월 7일 오후 전주성에 들어간 홍계훈은 농민군의 위세에 눌려 정부에 증원군을 요청하고, 한편으로 외국군, 즉 청나라 군사를 불러들이도록 건의하였다.
정부에서는 홍계훈의 증원 요청을 받고 16일 강화도 수비병을 강화병방 황헌주의 인솔아래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또 18일에는 김문현을 전라감사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외무협판 김학진을 신임 전라감사로 제수하였다.

이렇게 되자 홍계훈은 더 이상 전주성에서 머뭇거릴 수 없어 18일 아침 일찍 전주성을 출발하여 태인, 정읍, 고창을 경유하여 21일에 영광에 들어갔다.
농민군이 장성과 나주 방향으로 각각 진격해 갔음을 보고받은 홍계훈은 대관 이학승에게 병정 3백 명을 주어 장성으로 급히 보냈다.
이즈음 전봉준의 작전대로 농민군은 장성의 황룡촌에서 경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23일 농민군의 주력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황룡촌에 다다른 경군은 농민군을 공격하였고, 경군의 선제공격을 받은 농민군은 황룡촌 뒷산인 월평삼봉의 정상에 올라 대나무로 만든 장태를 굴려 경군을 짓밟았다. 이것이 장성 황룡총전투인데, 이 전투로 농민군의 사기는 어느 때보다도 드높았다.
정부는 장성에서의 패전 보고에 깜짝 놀라 4월 27일 이원회를 양호순변사(兩湖巡邊使)로 임명하고 강화, 청주의 군사를 내어 주었고 홍계훈의 군사를 통제할 권한을 부여했다.
농민군은 발걸음을 재촉하여 곧바로 갈재를 넘어 정읍을 향해 달렸다. 25일 정읍을 한 번 더 휘젓고 12시쯤 태인으로 향했다. 농민군은 금구를 거쳐 26일 전주성 턱밑인 삼천(三川)에 이르렀다.
다음날 농민군은 용머리고개로부터 전주성의 서문과 남문을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이렇게 하여 4월 27일 농민군은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전주성 공방전과 전주화약

홍계훈은 전주성이 함락된 하루 뒤에 용머리고개에 도착하여 완산칠봉 일대에 진을 치고 포열을 폈다.
이날 오후 농민군이 선제공격을 날렸다. 농민군은 경군과 한바탕 싸움을 벌이고 큰 전과 없이 성안으로 철수하였다.

이렇게 하여 4월 29일, 5월 1일, 2일에도 접전을 벌였다.
5월 3일의 전투에서 농민군은 지휘관 김순명과 어린 장사 이복용, 그리고 5백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전주성으로 퇴각하였다.
이번 싸움은 경군도 상당한 타격을 받았지만 농민군에게도 피해가 컸다.
이즈음 조선정부가 원병을 요청하여 청군이 5월 5일과 7일 각각 아산만에 도착하였고, 또 천진조약에 따라 역시 일본군도 뒤이어 상륙하였다.

이런 안팎의 위급상황은 전봉준과 홍계훈으로 하여금 화약을 검토하게 하였고, 결국 폐정개혁을 실시한다는 조건으로 전주화약이 5월 7일 맺어졌다.

남원대회

일본군에 의한 경복궁 침범사건이 일어나고 청일전쟁까지 터지는 가파른 국면이 전개되자 전봉준은 통문을 날려 각 지방의 농민군을 남원으로 불러들였다.

이렇게 하여 농민군 대집회가 7월 15일에 열렸는데, 이 남원대회는 일본군의 침략으로 들뜬 농민군 내부의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또 각 지방으로 흩어져 있어 일사불란한 명령체계를 갖추지 못했던 농민군에게 내부결속을 강화하는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전봉준은 일본의 동향을 신중히 지켜보면서 김학진과 손을 잡는 등 2차 기병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삼례에서 2차기병

전봉준은 9월 초 금구·원평에서 전주로 나아가 직속부대의 준비를 완료하고 삼례로 향했다.
삼례에 도착한 전봉준은 9월 12일 일본군을 몰아내고 봉건잔재를 척결하기 위한 본격적인 기병을 확정짓고 삼남의 농민군에게 봉기할 것과 삼례로 모이라는 통문을 띄웠다.

삼례에 모인 전봉준 직속의 농민군은 4,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스스로 의병이라 불렀다.
이는 일본의 침략으로 존망의 위기에 떨어진 나라를 구하고자 일어났다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었다.
이리하여 전주·고창·태인·남원·금구·함열·무장·영광·정읍·김제·고부 등지에서 투쟁의 횃불을 높이 쳐들고 달려온 농민군은 다시 전봉준을 대장으로 받들고 손화중과 김덕명에게 총지휘의 임무를 맡겼다.
그리고 농민군 북상에 걸림돌이었던 동학교단과의 갈등을 해결하고 드디어 농민군은 9월 하순 진격의 나팔을 불었다.
초겨울의 날씨는 알맞게 싸늘했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농민군의 사기는 드높았다.
농민군은 가벼운 걸음으로 여산을 거쳐 은진과 강경 두 방향으로 진격하다가 10월 초에 강경포에 이르러 진을 쳤다.

이때 전라감사 김학진은 농민군의 운량관이 되어 관청의 세곡은 물론이고 가을걷이한 양곡 혹은 소·말을 징발하여 농민군 진영에 실어 날랐다.
전봉준은 불어나는 농민군을 이끌고 다시 북상하여 논산 풋개(草浦)에 진을 쳤다.
전봉준은 10월 9일 호서농민과 합류한 후 10일 충청감사에게 격문을 띄워 농민군과 함께 항일전선을 펼칠 것을 촉구하는 한편, 정부·일본 연합군과 맞서 혈전을 벌일 공주를 향하여 농민군의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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