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시 문화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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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하하는관군

당시경기도죽산읍지도

당시경기도죽산읍지도

일본군이 6월 21일 경복궁을 침범하여 민씨 정권을 붕괴시키고 새로운 친일내각을 출범시키자 조선의 정국은 급변하였다.

농민군은 이러한 위급상황을 접하고 한 때 재기병의 물결로 술렁거렸으나 남원대회를 통해 일본의 술책임을 간파하고 급변하는 사태에 신중히 대응하기로 하였다.

정부는 9월 10일 장위영 영관 이두황을 죽산부사로, 경리청 영관 성하영을 안성군수로 삼아 먼저 내려보냈다.

이어 9월 21일 호위부장 신정희를 도순무사로 삼아 모든 군사를 지휘케 하고 양호순무영(兩湖巡撫營)을 설치하여 남쪽의
농민군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신정희는 순무영별군관 이규택을 좌선봉장으로, 이두황을 우선봉장으로 삼았다.

당시충청도천안읍지도

당시충청도천안읍지도

관군 중에서 맨 먼저 내려간 이두황은 9월 20일 1개 중대병력을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여 용인을 거쳐 23일 죽산에 도착했다.
이두황은 죽산관아에 머무르면서 인근의 농민군 동향을 정탐하고 휘하의 병정을 보내 농민군을 잡아들였다.

진천 구만리장터와 충주 무극장터에 수만의 농민군이 모였다는 보고에 따라 이두황은 10월 9일 죽산을 출발하여 다음날 무극장터에 나가보니 이미 농민군이 괴산읍을 불지르고 보은으로 달려가 버린 뒤였다.

이두황은 농민군 뒤를 쫓아 청주를 거쳐 13일 상당산성 뒷산을 넘어 미원장터에 이르렀다.

당시충청도목천세성산지도

당시충청도목천세성산지도

다음날 보은 장내리에 들어가니 농민군의 본대는 이미 공주 쪽으로 떠나 버리고 텅 비어 있었다.

이두황군은 초막과 빈집을 불태우고 근처에 있던 농민군을 잡아 포살하였다. 16일 호남농민군이 노성, 논산에 엄청난 세력으로 올라와 있으니 속히 공주감영으로 오라는 전령을 받고 17일에는 부강, 18일에는 공주를 코앞에 둔 연기 봉암동으로 나왔다.
그러나 20일 목천 세성산에 비도들이 웅거해 있다는 청주병영의 연락을 받고 북쪽으로 진군방향을 돌렸다.

세성산전투

세성산부근약도

세성산부근약도

세성산에는 9월 말에 이미 천안의 김화성, 목천의 김용희가 이끄는 수천의 농민군이 천안, 목천, 전의 등의 고을을 습격한 후 둔취하고 있었다.
이들은 관군의 후방을 찌르고 호남의 농민군과 호응하여 농민군의 서울진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두황이 21일 새벽에 세성산 밑에 관군을 이끌고 나타났던 것이다.

이곳에서 처음 전투다운 전투를 벌인 이두황은 승리의 여흥에 취해 늘어지게 놀다가 26일에야 공주로 출발하여 27일 금강을 건넜다.

공주로 집결하는

중부지역도

중부지역도

10월 11일 서울을 출발한 이규태는 과천을 거쳐 12일 수원에 도착하여 일본군 3중대와 합류하여 17일 진위로 나아갔다.

18일 일부 병력을 안성과 평택, 아산 등지로 파견하고 성환에 들어갔다.
다음날 천안을 향해 출발한 이규태는 느릿느릿 진격하고 있다가 농민군이 공주로 육박해 온다는 급보를 듣고 24일 서둘러 공주에 도착하였다.
한편 거물정객 이노우에(井上 )까지 조선주재공사로 파견할 만큼 일본은 농민군의 재기병을 주시했다.
일본군은 농민군이 재기병하자 무력을 서서히 증강하기 시작하였고, 본격적인 토벌작전을 준비하였다.

일본군은 10월 15일 용산을 출발하여 동(가흥, 충주, 문경, 대구로 향함), 서(수원, 천안, 공주, 전주로 향함), 중(용인, 죽산, 청주, 성주로 향함)의 3로(路)의 분진대로 나누어 진격시켰는데, 동로의 군사를 먼저 출발시켜 농민군을 서남방으로 쫓아 중로의 군사와 연락하고 또 전라도 해안 쪽으로 해군의 상륙작전과 함께 포위 공격을 벌여 일거에 초멸하려는 작전을 세웠다.

일본군은 호남과 호서의 농민군이 공주를 향해 돌진해오자 서로분진대를 10월 24일, 중로분진대를 10월 29일 공주에서 합류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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