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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북부농민군

동학농민혁명과 지리산의 관계에 대해선 간과되는게 보통인데 앞으로 보겠지만 지리산이 상당히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원평, 보은집회 이후 집회의 주모자들이 잠깐 은신하기도 한 지리산은 갑오동학농민혁명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지리산 일대의 갑오동학농민혁명에는 두 흐름이 있었다.
한 줄기는 남원, 운봉 등 지리산 북쪽에서 전개되었고, 또 한 줄기는 순천, 하동, 진주 등 지리산 남쪽에서 전개되었다.
남원과 운봉을 잇는 농민전쟁의 과정을 살펴보자. 남원은 하동에서 띄운 배가 섬진강을 따라 구례, 곡성을 거쳐 광한루 앞의 나루터에 도착하는 뱃길 덕분에 예부터 물산이 풍부하였고, 또 육로로는 운봉, 함양을 거쳐 진주까지 쉽게 갈 수 있어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였다.
이런 점을 이용하고자 김개남이 이곳에 진출한 것은 6월 25일(음력)이었다.
이때 김개남은 막강한 농민군세를 바탕으로 다른 곳보다 강력한 농민통치를 수행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농민통치가 수행되고 있던 중 일본군의 경복궁 침범과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농민군 내부는 다시 기병해야 한다는 분위기로 술렁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농민군의 군웅할거로 명령계통이나 일선활동이 원활하지 못했다. 전봉준은 7월 2일 남원의 김개남을 찾아가 이후 농민군이 취할 대책을 숙의하고 7월 15일 농민군 단합대회를 남원에서 열기로 하였다.

이로써 남원은 단합대회장이 되었고, 농민군 지도부는 재기병의 들뜬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급변하는 정세에 차분히 대처할 방안을 논의하였다.
중앙의 정세 변화에 따른 자신의 선택을 고민하던 전라감사 김학진은 이런 소식을 전해 듣고 농민군을 인정하여 전봉준과 손을 잡고 농민통치에 협조하였다.
이후 김개남은 잠시 남원을 떠나 임실로 갔다가 남원으로 다시 들어가 부사 윤병관을 몰아내고 교룡산성을 수축하는 등 남원을 완전한 자신의 거점으로 삼았다.
그리고 10월 14일까지 참서의 기록을 핑계로 전봉준의 재기병을 외면한 채 남원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는 이곳에서 독자적으로 행동했던 것이다.
김개남이 남원을 떠나 전주로 올라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박봉양은 남원, 운봉의 민보군을 이끌고 남원을 들이쳤다. 대장이 없는 농민군은 저항 끝에 남원성을 비우고 달아났다.
박봉양은 남원에서 며칠 머문 뒤에 남원의 수성을 이곳 사민(士民)과 관속에게 맡기고 운봉으로 돌아갔다.
이에 농민군 지도자 유복만, 남응삼 등은 농민군을 이끌고 다시 성안으로 들어와서 운봉을 넘어 영남으로 진격할 채비를 하였다.
그리하여 11월 13일 경에는 남원의 농민군이 남원 산동방 부동촌까지 나와 진을 치고 있었다. 이에 운봉의 민보군 2천여 명은 관음재에서 진을 치고 맞서 싸울 준비를 서둘렀다.
11월 14일 새벽부터 싸움이 붙어 다음날 아침에야 결판이 났다. 농민군은 수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남원으로 퇴각했다. 남원의 농민군 3천여 명은 성을 굳게 지키고 나가지 않았다.
진주병영의 지원으로 군세를 강화한 박봉양은 11월 25일 운봉을 출발하여 반암방, 원촌(院村)에 진을 치고 동정을 살폈다. 그러나 농민군의 기습을 받게 되자 28일 남원의 네 성문을 포위하고 공격을 서둘렀다. 민보군은 남문을 주공격 목표로 삼았다.
민보군은 성 주변에 섶을 쌓아 불을 붙였고 이어 대나무 사다리를 엮어 한꺼번에 올라 방포하였다.
농민군은 밤이 깊었을 적에 동, 서, 남 세 문이 불길에 싸이자 북문을 열고 달아났다. 입성한 박봉양은 수백명을 베어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리하여 순천, 하동 방면의 길이 막혀 지리산 남 북의 농민군은 서로 제휴하는 데 실패했다.

지리산남부농민군

순천에서 진주를 잇는 동학농민혁명의 과정은 이와는 약간 달랐다.
진주에서는 동학농민혁명이 시작된 직후 4월부터 동학도 중심의 농민들이 소규모로 봉기했고 진주병영에서는 이곳 농민군 30여 명을 잡아 감옥에 가두거나 처형하였다.
그 후 지금의 서부경남지역은 농민집강소가 전라도, 충청도에서 시행될 무렵, 전라도 농민군을 끌어들여 이 지역에도 설치하려는 계획이 있었다.

1894년 7월 광양의 농민군이 하동세력과 힘을 합해 하동에 도소(都所)를 설치하고 집강의 일을 보자, 화개동 중심의 민포군(民砲軍)들이 불시에 이들을 습격하여 광양으로 쫓아냈다.
전라도 금구 출신 김인배는 6월에 농민군을 이끌고 순천에 내려와 영남, 호남의 연계작전을 모색하면서 광양, 하동에서 크게 세력을 떨쳤다.
그는 순천의 농민군과 함께 하동을 9월 1일 공격하여 승리하고 도소를 재설치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진주의 농민군이 크게 고무되어 다시 움직였다.
이때 김인배는 영호대접주(嶺湖大接主)의 이름을 내걸고 진주로 진출하면서 남해, 사천, 곤양, 고성 등지의 관아를 접수했다. 9월 14일 진주 농민군이 목사를 굴복시켰고 17일 김인배의 농민군이 들이닥치자, 목사 유석과 병사 민준호가 마중을 나와 항복했다. 진주병영을 무혈점령한 것이다.
김인배는 진주병영을 점령한 지 1주일 만에 그곳 출신 정운승에게 맡기고 주변고을을 석권했다.
이때 경상감영의 판관 지석영과 함께 일본군은 부산에서 일본상선 2척과 화륜선 1척에 배꾼, 관군 그리고 일본군이 새로이 모집한 조선병 260여 명을 나누어 태우고 마산을 거쳐 진주로 향했다.
이즈음 진주의 농민군은 진주 백목리에 모여 있었다. 김인배 등이 이끄는 농민군은 진양군 수곡에 집결해 있다가 고성당산으로 옮겼다.
10월 13일 농민군 5천여 명은 일본군 170여 명과 관군 지원부대와 전투를 벌여 패전하고 흩어졌다.
그러나 농민군의 활동은 쉽게 그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창궐했다. 심지어 사천, 남해, 단성, 적량의 군기를 깡그리 빼앗아 갔고 그들이 지나는 동네는 텅텅 비다시피 했다.
영남감영에서는 "저들이 믿는 것은 지리산 골짜기이다.
만약 군대를 파견치 않고 또 일본군을 하동, 진주, 단성, 곤양 등지에 주둔케 하지 않으면 반드시 저 무리들이 다시 유린할 것이다"라고 보고할 정도였다.

일본군과 관군은 농민군을 추격하여 하동으로 들어갔고 김인배의 농민군은 다시 순천, 광양의 세력을 규합하여 하동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김인배는 잔여 농민세력과 승주 선암사에 근거를 두고 있던 농민군을 규합해 여수 좌수영 공격에 세 차례나 나섰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렇게 해서 지리산 남북의 농민군은 두 지역에서의 활동을 멈추었다.
이 두 지역은 후방의 방비뿐만 아니라 주력 농민군을 지원하는 주요 요충지였다.
이 두 곳이 차단되어 독자적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던 점은 지리산 일대 농민군의 힘을 반감시키는 요인이 되었고, 농민전쟁의 전개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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