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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을 때 강원도 지방의 사정은 어떠했을까?
동학농민혁명은 전라도와 충청도 일대에서만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동학농민혁명보다 30여 년 앞서 1862년에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전국 72개 고을에서 농민들이 치열하게 반 봉건 농민항쟁을 일으켰을 때 강원도에서는 농민항쟁이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채 잠잠했다.

그런데 개항 이후 사회모순이 깊어지면서 강원도에서도 농민항쟁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1869년 3월부터는 2세 교주 최시형이 강원도에도 동학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동학이 전파되고 항쟁의 전통이 쌓이면서 고립 분산되어 있던 강원도 농민들은 조직으로 묶이기 시작하였다.
1893년 3월 보은 장내리에서 열린 교조신원운동에 강원도에서도 관동대접주 이원팔, 홍천대접주 차기석, 인제대접주 김치운 등이 참가하였다.
그러나 1894년 전라도 평야지대를 중심으로 제1차 농민전쟁이 전개될 때 강원도에서는 아직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음력 9월에 접어들면서 들판에서 타오른 갑오동학농민혁명의 불길이 강원도 산골까지 치붙기 시작하였다.
강원도 갑오동학농민혁명은 크게 두 세력에 의해 전개되었다. 하나는 정선, 평창, 영월, 원주 세력이었다. 이들은 충청도 제천, 청주세력과 연계하여 강원도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연합세력이다.

다른 하나는 차기석을 중심으로 홍천군 일대에서 활동한 중부내륙 세력이었다.
남부 연합 세력은 세를 모아 9월 4일 대관령(정선 삽당령?)을 넘어 강릉부 관아를 점령하였다.
그때 관아는 부사가 자리를 비워 공관 상태였다. 관아를 점령한 농민군은 가혹한 세금을 감면토록 하고 악독한 지주들의 땅문서를 빼앗았다.
수탈에 앞장 섰던 이서(吏書)들을 잡아 가두고 억울한 옥사도 스스로 해결해 나갔다.

강원도 동부지역

강원도 동부지역

관아의 동쪽 문에는 "삼정의 폐단을 뜯어고치고 보국안민을 이룩한다"는 방문을 내걸었다.
농민군은 관아의 일이 자리가 잡히자 2,3일 뒤 경포대 옆 선교의 이회원 집을 공격하려고 계획하였다.

강릉의 부호지주요 유림세력의 대표격이었던 이회원은 교활한 술수로 농민군을 안심시킨 뒤 민보군을 조직하여 기습으로 농민군이 점령하였던 강릉 관아를 탈취했다.
평창으로 퇴각한 농민군은 다시 강릉 관아를 점령할 기회를 엿보면서 세를 모아 나갔다.
한편 중부 내륙지방 차기석의 지휘 아래 있던 농민군은 10월 13일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의 동창(東倉)을 들이쳐서 건물을 불태웠다.

10월 중순을 넘어서면서 보수 지배세력은 농민군에 대해 적극 반격을 가했다.
홍천과 가까이 있는 경기도 지평의 감역 맹영재는 포군을 이끌고 홍천의 농민군을 향해 진격해 왔다.
이에 맞서 농민군은 10월 21일 맹영재 부대와 장야평(장평)에서 전투를 벌였다. 서석으로 후퇴한 농민군은 풍암리 구릉 위에 진을 쳤다.
다음날 10월 22일 서석에 집결한 농민군은 횡성현감 유동근이 이끌고 온 관군과 맹영재가 이끌고 온 민보군에 맞서 800여 명이 넘는 희생자를 내는 처절한 싸움을 전개하였다.

이 무렵 강릉부 중군 이진석과 전찰방 이영찬은 150여 명의 군정을 이끌고 정선을 거쳐 평창으로 출발하였다.
봉평과 내면 일대의 농민군이 이들의 목표였다. 11월 3일에는 일본군 2개 중대가 평창의 농민군을 진압하러 기어내려왔다.
춘천의 순중군(巡中軍)도 파견되었다. 그때 농민군은 정선에 3천여 명, 평창에 1천여 명이 집결하여 강릉부로 향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11월 이후 보수지배세력과 침략외세 일본군에 맞선 농민군의 반봉건 반침략 투쟁은 평창, 정선 일대와 봉평, 내면 쪽에서 전개되었다.
11월 5일에는 평창, 후평에 집결한 농민군 수천명이 관군과 크게 붙었다. 접주 이문보를 비롯하여 100여 명의 희생자를 낸 평창 쪽의 농민군은 정선을 거쳐 삼척 쪽으로 후퇴하였다.

차기석 부대의 근거지인 내면 쪽 전투도 치열하였다.
11월 4일 봉평의 포군대장 강위서가 내면 창촌으로 침입해 들어왔다. 산꼭대기에 진을 치고 있던 농민군이 밤중에 그들을 기습하여 3명을 사살하였다.
패배한 강위서의 포군부대는 8명의 부상자를 이끌고 내면에서 후퇴했다.

11월 9일부터 14일에 걸쳐 내면 창촌, 원당, 청도, 약수포에서 강원도 갑오동학농민혁명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졌다.
농민군은 험준한 산악지대를 요새로 삼아 오대산, 계방산 기슭의 산하를 피로 물들이며 치열하게 유격전을 펼쳤다.
그러나 연합전술을 펴면서 사방에서 포위망을 좁혀들어온 관군에게 강릉, 양양, 원주, 횡성, 홍천의 관동대접주 차기석을 비롯한 농민군 지도자들이 체포되거나 포살당함에 따라 강원도 지방의 1894년 갑오동학농민혁명은 일단 투쟁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흰 눈이 온 산하와 농민군이 흘린 핏자국을 하얗게 뒤덮던 음력 11월 중하순 무렵이었다.
그러나 반봉건 반침략이라는 시대의 과제를 해결하려는 강원도 농민들의 투쟁은 여기서 완전히 막을 내리고 만 것은 아니었다.
눈이 녹아 계곡의 물을 불리고 새싹이 움트듯이 1894년 갑오동학농민혁명의 핏자국 위로 다시 항일의병전쟁의 싹이 자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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