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시 문화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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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봄과 가을, 농민군이 사회개혁과 외세배척의 구호를 내세우고 무장 봉기함으로써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의 중심지는 전라도와 충청도였다.
경상도를 비롯한 강원도와 경기도 그리고 황해도 지역은 그 중심부가 아니었지만 일부 군현의 상황은 전라, 충청도와 다르지 않았다.

동학 조직을 거점으로 결집한 농민들은 각 군현에서 지방 관아의 지나친 조세 수탈을 막고 무단 토호행위를 자행한 불량양반들을 징치하였으며, 일본군과 곳곳에서 전투를 벌였다.
경상도에서 동학 교세가 급격히 증대되는 시기는 1894년 3월경이다.
전봉준 장군이 이끄는 전라도 농민군이 황토현에서 감영군까지 격파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경상도 각 지역의 동학도들은 이에 크게 자극을 받았다.
그래서 몰래 숨어 포교해 오던 동학도들은 이제 공공연히 드러내어 각처에 있는 근거지에 접(接)을 설치하였다.

경상도 지역에서 특히 동학교의 교세가 강력했던 곳은 소백산맥에 인접한 북서부 각 군현과 지리산에 연결되는 남서부 여러 군현이었다.
이 지역은 1860년대 초부터 2세 교주 최시형에 의해 포교가 시작되었던 근거지였다.
따라서 1894년 당시 이 지역에서 동학조직을 관장하던 핵심 교도들은 입도한 지 수십 년이 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오래된 교도들은 탄압을 피하여 표면에 드러나지 않고 지하에 잠적해서 교세를 확대해 왔던 것이다.
이러한 세력을 배경으로 동학 조직은 각 군현을 연결시키는 조직망을 형성할 수 있었다.

1894년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경상도 지역의 동학은 그 세력을 한층 더 확대시키게 되었다.
양반지배층을 압도한 곳에선 농민군이 양반과 향리들의 잘못된 관행을 시정하기 시작했다.
공권력을 행사하는 관아와 향리에게 대항하는 과정에서 점차 무장까지 갖추게 되었다.
이들은 조선국가의 체제를 개혁하는 농민군대, 즉 전근대 사회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세워나가는 농민군으로 스스로를 변화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영남북서부지도

예천 양반의 다음과 같은 기록은 그때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송사는 모두 소야(동학농민군 본부)로 돌아가고 관부는 적막할 뿐이다.
또 동도 검찰관 장복원이란 자는 각 읍을 순행하면서 폭정을 금한다고 칭하고 도리어 탐학(貪虐)이 많다.
행리와 수행원은 감사를 본떠 이르는 곳마다 호랑이 같은 풍위이고 소송자가 저자와 같이 모이다."

농민군이 폐정개혁을 추진하던 기구는 도소(都所) 또는 접소(接所)로 불렸는데, 집강소라고 부르던 지역도 있었다.
김산이 바로 그러한 곳이다. 1894년 8월 초 김산군의 김천 장터에 도소를 설치한 이 지역의 농민군 지도자 편보언(片甫彦)은 이를 도집강이라 칭하고 입도자를 늘리며 개혁을 추진하는 데 힘썼다.

김산에서 활동한 농민군 중에는 전라도에서 폐정 개혁을 주도하던 전봉준 장군과 이념을 같이하여 활동한 사람도 있었다.
전천순(全千順)과 김원창(金元昌)이 그들이다. 경상도 지역에 집강소가 설치되어 개혁을 수행한 것은 전라도의 남접농민군과 기맥을 통하고 협력하던 이들이 일정한 역할을 한 때문일 수 있다.
경상도의 농민군이 전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무장을 강화하고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한 시기는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범한 6월 말 이후이다.
더구나 우리 땅에서 청나라 군대와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은 사람들을 크게 분격시켰다.
민족이 위기에 직면하게 되자 농민군은 무력으로서 이 땅에서 일본세력을 몰아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농민군은 무력을 강화해야 했다. 무력 강화의 방법은 더욱 많은 사람을 가담시켜서 군세를 키우고, 민간과 관아에 있는 총포, 창, 칼 등 무기를 최대한 모으며, 부농과 지주층의 돈과 재물을 헌납받아 군량과 전쟁경비를 충분히 확보하는 것이다.
농민들 스스로 합의해서 진행해 간 대일전쟁 준비는 동학 교단의 지침 없이 말단 농민군의 자발적인 의사에 따른 것이었다.
경상도의 농민군에게는 바로 눈앞에 공격할 목표물이 있었다. 일본군은 청나라와 전쟁하기 위해서 부산에서 서울을 잇는 요충지 50리마다 병참선을 만들었다.
그 지역은 부산, 구포, 물금, 삼량, 밀양, 청도, 대구, 다부역, 해평, 낙동, 태봉, 문경, 안보, 충주, 하담, 장호원, 이천, 곤지암, 조현, 송파진, 서울 등지이다. 경상도 북서부에는 선산의 해평, 상주의 낙동, 함창의 태봉에 병참 기지가 설치되었다.
농민군은 이 기지를 축출하려고 시도하게 된다.

무력 강화를 위해 진력하던 농민군은 전과 달리 커다란 반발에 부딪치게 되었다.
농민군은 부농과 지주에게 강요해서 혁명경비를 거두어 들였는데 그 과정에서 곤욕을 치르던 지배층이 자위책을 강구하기에 이르렀다. 보수세력이 민보군을 결성해서 농민군을 견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보수세력의 중심은 신분 면에서 볼 때 동학농민군의 활동에 위협을 받던 양반과 향리층이었고, 경제면에서 볼 때 스스로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돈과 곡식을 동학농민군에게 빼앗겨 왔던 부농과 지주층이었다. 양반 위주의 향촌사외의 질서를 지켜야 했던 지방관들도 이러한 움직임에 동참했다.
안의와 거창에서는 선정을 베풀어서 민심을 얻은 현감 조원식과 부사 정관섭이 앞장 서서 결속시킨 관포군과 민보군이 경내의 농민군을 제압했다.
안동과 의성에서는 전직관리와 유생들이 민보군을 결성해서 읍내를 지켰는데, 이름높은 유생 곽종석은 이때 안동에 있으면서 민보군 조직인 도총소(都摠所)에 참여했다.
예천에서는 향리층이 주도해서 농민군이 사용하던 이름 그대로 집강소를 설치하고 농민군이 읍내를 침범하지 못하게 막았다.
예천군의 집강소에는 일부 양반도 참여했지만 집강 등 민보군을 지위하는 직임은 향리층이 독점해서 주도권을 장악했다. 평소에 양반층을 능가하던 향리 성씨의 위력이 나타난 것이다.

서로 적대하는 군사력이 같은 지역에 형성된 결과, 각지에서는 농민군과 민보군 사이에 긴장된 대치관계가 형성되어 사건들이 꼬리를 물고 발생했다.
그 중 가장 심각한 사건이 예천과 성주에서 벌어졌다. 두 지역의 민보군이 농민군을 체포해서 화적 혐의로 처형한 것이다.
예천에서는 잡혀온 농민군 11명이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집강소 두령들을 협박하여 한천 모래밭에 끌고가 생매장해 버렸다.
예천의 농민군은 대일전쟁에 민보군이 함께 나서 줄 것을 요청하고 있었으나 이 같은 사건으로 인해 논의조차 하기 어려웠다.
예천의 농민군은 읍내에 압력을 가했다. 외지와 연결하는 동서남북 사방에서 한 달 이상 길을 막아 식량과 땔감을 들여오지 못하도록 했다.
교통이 막히자 곧 읍민은 기아 상태에 들어갔고, 군수도 여러 날을 죽으로 끼니를 때우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두려운 일은 언제 동학농민군이 읍내에 들이닥칠지 모르는 것이었다.
그러자 빨리 일전을 겨루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 보수집강소는 농민군 집결지인 화지(花枝)에 300여 명의 민보군을 파견해서 도전하였다.
이 계략은 성공하였다. 수접주 최맹순(崔孟淳)은 대노하여 화지와 금당실에 예천 부근에 있는 농민군 각조직의 정예군을 집결시켰다.
화지는 읍의 서쪽에 있는 마을이었고, 금당실은 북쪽의 큰 마을이었다. 함양 박씨의 세거지인 금당실은 8월 초에 농민군에 점거당해서 그 근거지로 변했다.

예천의 농민군은 기세도 돋우고 무장을 강화하기 위해 8월 26일 인근 용궁현의 관아를 점거해서 무기를 탈취해 갔다.
마침내 8월 28일 화지와 금당실의 농민군이 서로 시간을 약속하고 읍내 공격에 나섬으로써 쌍방 대규모의 공방전이 벌어졌다.
한천의 긴 제방 밑 현산에 배치된 민보군과 유정숲에서 제방쪽으로 들어오는 화지 농민군 간의 전투는 오후 이른 시간에 시작되어 어두워질 때까지 어느 한쪽도 밀리지 않고 계속되었다. 그러나 협공을 약속한 금당실 농민군은 정해진 시간에 오지 않았다.

금당실 농민군은 너무 늦게 도착하였다. 민보군이 화지 농민군을 물리치고 나서 쉬고 있을 때 그제서야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면서 서북쪽에서 몰려왔다.
이들은 미리 풀숲에 숨어 있다가 기습을 가해 온 민보군에게 제대로 저항도 못해 보고 많은 전사자를 남긴 채 패주하기에 급급했다.
이 예천읍 공방전에 쌍방이 동원한 병력은 대규모였다. 방어군은 민보군 1천 5백여 명과 읍내 거주인 대부분이 참가했고, 조정에 보고된 공격 농민군 수는 4천~5천 명이었다. 모두 6천~7천 명이 대규모의 전투를 벌인 것이다.
성주는 9월 초 농민군에 의해 호된 보복을 받았다. 주변 여러 지역의 농민군 조직이 합세하여 관아를 점거한 다음 민가에 불을 질렀는데 때마침 바람이 불어와 큰 화재로 번져서 읍내 전체가 잿더미로 변했다. 남부지역의 하동도 농민군이 읍내를 불살라 하늘이 온통 검은 연기로 뒤덮였다.
동학의 북접교단이 남접 농민군의 가을 봉기에 호응하여 기포를 결정한 것은 9월 18일이었다.
영남 북서부의 대읍 상주와 선산은 이 지역 농민군의 일차 공격 목표가 되었다. 대읍을 점거함으로써 북서부 각 군현의 관부와 양반층을 압도하고 동시에 낙동과 해평의 일본군 병참부를 공격하려는 계획이었다.
수천의 세력을 형성한 농민군은 9월 22일경 상주와 선산 읍내로 밀고 들어가 쉽게 관아를 장악했다. 상주와 선산 읍성이 점령되자 낙동과 해평의 일본군은 크나큰 위협을 받았다.

당시상주일대지도

농민군의 무장봉기 목표는 일본군의 축출이었고, 이는 계획적인 침략에 나선 일본군이 잘 아는 바였다. 농민군이 교통의 요지에 세운 병참부를 축출하면 큰 손실이 될 것이었다. 그래서 일본군은 며칠 뒤 읍성 기습에 나서게 된다. 9월 28일 오전 10시경 일본군이 기습을 가해 왔다. 우세한 화력의 신식 무기를 가진 일본군이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기어오르며 느닷없이 기습하자 농민군은 큰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그래서 많은 희생자를 남기고 상주와 선산의 읍성에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군에 의해 읍성이 회복된 후 상주와 선산에는 황급히 민보군이 결성되었다. 그 중심은 향리들이었다.
이들은 예천의 경우를 선례로 삼아 상주와 선산의 민보군을 만들면서 집강소라는 말을 사용했다.
농민군의 집강소와 이름은 같지만 보수 성향을 갖는 향리층의 집강소가 이 시기 예천에 이어 상주와 선산에도 만들어진 것이다.

상주와 선산의 민보군은 예천과 같이 향리층이 주도했다. 이 지역의 군권을 향리들이 장악한 것이다.
양반들은 향리들의 대두를 불안하게 지켜볼 뿐 힘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경상도에서 농민군 세력이 관과 보수지배층을 압도한 군현은 상당히 넓은 지역에 걸쳐 있었다.
북서부의 예천, 봉화, 용궁, 문경, 함창, 상주, 개령, 지례, 성주, 김산과 남서부의 함양, 하동, 곤양, 사천, 고성, 단성, 진주, 남해 등지가 농민군의 세력이 강력한 곳이었다. 이들 지역에서는 충청도와 전라도 농민군의 지원도 받았다.
전라도 농민군의 가을 봉기에 호응하여 기포한 경상도 북서부의 농민군은 관군, 일본군, 민보군의 연합세력과 정면 충돌하게 되었고 특히 일본군의 신식무기 위력에 밀려 패배하고 말았다.
패산한 농민군은 충청도의 북접거점으로 들어가 합류했다. 황간과 영동 여러 마을에 나누어 주둔하고 있던 북접 농민군이 통령 손병희의 지휘 아래 논산으로 행군하여 전봉준 장군의 남접군과 힘을 합칠 때 이들도 가담하였다.

남북접 연합 농민군은 공주 우금치 공격에 나섰다가 실패하여 결국 흩어지고 만다.
북접 농민군은 추적하는 일본군과 관군을 피하기 위해 남하를 거듭하여 순창까지 후퇴하였다. 그리고 험준한 산길로 북상을 시도했다.
장수와 무주를 거쳐 영동에 들어간 농민군은 용산 장터에서 청주병대와 접전하였다.
장터의 뒷산은 암룡과 수룡 두 마리가 웅크린 형세였다. 수룡 형상의 산봉우리에는 동학농민군이 진을 쳤고, 건너편 천관산 쪽에서는 관군이 공격해 들어왔다. 하지만 월등히 수가 많은 농민군에게 관군이 밀려나서 보은으로 가는 길이 뚫렸다.
종착지로 생각한 장내리의 동학 도소는 이미 경군이 내려와 마을 전체를 불살라 버려 머물 곳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다시 북상하여 보은읍 인근의 북실 마을에 주둔하고 있을 때 일본군과 상주 소모영의 유격병대가 기습해 왔다.
추운 겨울에 먼 길을 걸어 오느라고 극도로 피로가 쌓여 무기력해진 동학농민군은 대항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작은 골짜기 안에 숨어 있던 농민군은 산등성이에 올라와 아래를 보고 총을 쏘는 일본군과 유격병대에게 일방적인 학살을 당했다.
유격장 김석중은 "학살된 사람이 2천2백여 명이고 야간전투에 죽은 사람이 3백93명"이라고 기록했다.
일본군은 학살한 만행을 감추고 3백여 명의 농민군 전사자가 있다고 보고하였다.
전투 현장에서 죽은 사람보다 항거하지 못하는 사람을 살육한 수가 무려 5배가 훨씬 넘었다. 모두 2천6백 명에 달하는 농민군이 자그마한 야산 곳곳에서 죽임을 당한 것이다.
겨우 살아 남아 경상도와 충청도 일대로 흩어진 사람들은 폭설이 내린 험준한 소백산맥 줄기를 타고 들어갔다.
이들은 험준한 속리산, 팔음산, 백화산 등지에서 한겨울 동안 모진 고생을 했다.
관군과 일본군은 계속해서 동학교도들을 뒤쫓았다. 체포된 즉시 처형된 사람도 있고, 오랫동안 숨어 있다가 잡힌 사람은 감영까지 이송되어 재판을 받았다.
각 군현에서 동학농민군을 끝까지 추적해서 철저하게 진압한 것은 보수지배층이 결성한 민보군이었다.

  • 관리부서토탈관광과/동학농민혁명선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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