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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장군

전봉준장군

자(字) 명숙(明淑) 천안전씨(天安全氏)이다.
그는 체구가 아주 작아서 녹두(綠豆)란 별호를 갖게 되었다.
그는 어려서 조부를 따라 전주 구미리로 옮겨 살다가 정읍시 감곡면 계룡리로 이사했다.
이곳에서 18세 때, 20리 거리의 산외면 동곡리로 옮겨 살았다.
전봉준이 일생동안 가장 오래 살았던 곳이 지금실이다.
전봉준은 37세경 정읍시 이평면 양교리로 이사했다.
다음해인가 고개 넘어 조소리로 이사하였다고 한다.

그는 봉건전제에 짓밟히고 있는 민권을 부르짖었고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위기에 처해 있는 민족을 구하려 민중을 이끌고 무명의 동학접주(東學接主)로 갑오동학혁명을 영도한 민족의 선각자요 불요불굴의 의지력과 탁월한 영도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조선 말엽 민란이 곳곳에서 헤아릴 수 없이 일어났지만 아무리 심한 경우라도 조정에서 안핵사를 보내면 평정되는 것이 상례였으나 고부의 민란은 그렇지 않았다.
전봉준은 정월 봉기후 이용태 안핵사가 역졸을 거느리고 내려와 동학교도들을 역도로 몰아, 서슬이 멀큼했지만 이때 전봉준은 좌절하지 않고 무장의 대접주 손화중을 움직여 동학교의 세력을 동원 마침내 삼월봉기로 전라도를 장악하고 집강소 정치를 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해 6월 21일 (양 7월 23일) 일본군이 궁성에 침입하여 고종 임금을 연금하는 사태에 이르자 전봉준은 삼례에서 구월봉기를 일으켜 서울로 진격하다가 10월 23일 공주에서 15일 동안 혈전 끝에 패하고 후퇴하여 11월 27일 태인싸움을 최후로 농민군을 해산했다.

갑오혁명에는 삼남지방 각지에서 많은 동학접주들이 봉기하였으나 전봉준처럼 호남의 5천대군을 거느리고 일사불란의 전열로 일본군에 최후까지 혈전을 벌인 영도인물은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충청 관찰사 박제순은 9월봉기후 전봉준이 논산으로 진격하여 공주감영이 위급해지자 교주 최시형이 거느리는 북접의 10만 대군을 막는 일보다도 호남의 전봉준을 방어하는 일이 더 화급하다고 천안에 머물고 있는 선봉장 이규태에게 급전을 보냈으니 당시 전봉준의 위력을 짐작할 수 있다.
태인싸움을 최후로 농민군을 해산한 전봉준은 수행 몇 명과 동 29일 입암산성으로 들어 갔다.
때마침 일본군 三尾(모리오) 부대와 이규태의 관군이 천원에서 추격해 온다는 정보가 있어 30일 다시 백양사로 이동했다.
백양사에서 1박하고 다음날 해질 무렵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에 이르러 왕년의 친우 김경천을 찾았다.
그는 공초(심문 조사)에서 서울의 동정을 살피기 위하여 올라가는 길이라고 했다.
정부에서는 동학괴수를 잡아 들이는 사람에게 많은 상금과 고을 수령을 제수한다고 현상 공고를 했다.
김경천은 전봉준을 맞이해 놓고 전주감영 퇴교(지금의 현역장교)로 이웃에 살고 있는 한신현에 밀고 했다.
김영철, 정창욱 등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전봉준을 포위했다. 전봉준은 불의의 위기에 다달아 담을 뛰어넘어 도피하려다 다리를 얻어맞고 붙잡히고 말았으니 1894년 12월 2일(양 12월 28일)이었다.
전봉준은 순창을 거쳐 담양의 일본군에 인계되어 나주, 전주를 경유 12월 18일에 서울에 도착되었는데 동학군들을 경계하여 일본영사관 감방에 수감되었다.
전봉준은 다음해 2월 9일, 동 11일, 동 19일, 3월 7일, 동 10일, 5차에 걸쳐 일본 영사의 심문을 받고 1895년 3월 30일 손화중, 최경선 등과 함께 최후를 마치니 나이 41세였다.

전봉준 단소(全琫準壇所)

전봉준 단소

유해의 묘소(墓所)가 없어 1954년 천안전씨(天安全氏) 종중에서 이평면 조소리(梨坪面鳥巢里)에 「갑오통수전봉준지단(甲午統首全琫準之壇)」을 쌓고 1994년 사적비를 세웠다.
그는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나는 바른 길을 걷고 죽는 사람이다.
그런데 반역죄를 적용한다면 천고에 유감이다."라고 개탄했다. 그는 죽음에 이르러 다음의 유시(遺詩)를 남겼다.

시래천지개동력(時來天地皆同力) 때가오니, 천하가 모두 힘을 같이 했건만 연거영웅불자모(運去英雄不自謀) 운이 다하면 영웅도 스스로 할바를 모를내라.
애민정의아무실(愛民正義我無失) 백성을 사랑하는 정의일 뿐 나에게는 과실이 없나니 위국단심수유지(爲國丹心誰有知) 나라를 위하는 오직 한마음 뉘 아는이 있을까
한신현(韓信賢)은 금천(金川, 황해도) 군수에 제수되고 상금은 한신현 1천냥, 김영철 3백냥, 정창욱 2백냥, 동인(洞人 마을사람) 9인에 2백냥, 그리고 2백냥 피노리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 1981년 한국청년회의소에서 전주 덕진공원(德津公園)에 전봉준 선생 동상을 세웠다.

전봉준 공초록

  • 全琫準 初招問目(제1차 심문과 진술)
    • 開國 五百四年 二月 初九日(서기 1895년 2월 9일(음))
  • 全琫準 再招問目(제2차 심문과 진술)
    • 乙未 二月 十一日(서기 1895년 2월 11일(음))
  • 全琫準 三招問目(제3차 심문과 진술)
    • 乙未 二月 十九日(서기 1895년 2월 19일(음))
  • 全琫準 三招問目(제3차 심문과 진술)
    • * 이하 심문은 일본 영사가 물은 것이다.
    • 乙未 二月 十九日(서기 1895년 2월 19일(음))
  • 全琫準 四招問目 日領事問(제4차 심문과 진술)
    • * 이하 심문은 일본 영사가 물은 것이다.
    • 乙未 三月 初七日(서기 1895년 3월 7일(음))
  • 全琫準 五次問目 日領事問(제5차 심문과 진술·일본영사 심문)
    • * 이하 심문은 일본 영사가 물은 것이다.
    • 乙未 三月 初十日(서기 1895년 3월 10일(음))
  • 판결문

동학교(東學敎) / 가계(家系) / 전봉준 유시

동학교(東學敎)

전봉준은 일본인과의 대화에서 김치도(金致道, 정읍시 정우면 수금리 좌두)로 말미암아 동학교에 입교했다고 하였다. 그는 4차 공초에서 최법헌(최법헌, 최시형)으로부터 접주(接主)의 직첩을 받았으나 어린이들을 가르치느라(서당훈장이었기 때문) 동학의 교를 행한 일이 없다고 하였다. 그는 접주이면서도 교도를 거느리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3월봉기에 손화중포(孫華仲包)의 교도를 거느렸던 것이다

가계(家系)

족보(族譜)와 산외면 동곡리(山外面東谷里)에서 밝혀진 자료에 의하면 전봉준은 2남 2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공초에서 가족이 6명이라고 밝힌 진술과도 부합되는 것이다. 장녀(長女) 전옥례(전옥례 진안군 부귀면 신형리鎭安郡富貴面新亨里) 여사 2녀의 외손녀 강금례(姜今禮, 산외면 동곡리 山外面東谷里)여사. 장자 용규(龍圭, 동곡리東谷里에서 사망) 차자 용현(龍鉉, 동곡리東谷里에서 행방불명)이었다고 한다. (증언자. 1970년 강금례여사)

전봉준 유시(遺詩)

때를 만나서는 천하도 내 뜻과 같더니(時來天地皆同力)
운 다하니 영웅도 스스로 어쩔 수 없구나(運去英雄不自謀)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위한 길이 무슨 허물이랴(愛民正義我無失)
나라 위한 일편단심 그누가 알리(愛國丹心誰有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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