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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화중

이름 정식 자 화중 호 초산이니 밀양손씨이다.
그는 정읍시 과교동에서 아버지 손호열 어머니 평강채씨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이웃 마을 음성리로 옮겨 자랐다.
그의 동학과 인연은 지리산 청학동에서 비롯한다.
그는 한때 처남 유용수와 함께 지리산 청학동으로 들어가 수도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이무렵 영남에서는 새로운 종교인 동학이 한참 퍼지고 있었는데, 손화중은 후천개벽의 동학 종교론에 공명하여 동학에 입교한 것이다.
2년 만에 고향에 돌아와 포교에 전력하였으니 처음에는 부안에 우거를 정하고 포교하다가 그 후 정읍으로 돌아와 농소동에서도 잠깐 머물렀으나 다시 입암면 심면리로 옮겼으니 관헌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 후 얼마동안 음성리의 본가로 돌아와 있다가 본거지를 무장으로 옮겨 읍내의 김모의 집에 잠시 포교소를 두었다가 다시 이웃 덕림리 양곡으로 옮겼다.
손화중은 전라도내에서 가장 많은 교도를 거느리는 대접주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는데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상속에서 검단대사 비결록을 끌어냈다는데서 더욱 신비의 인물로 여겼다.
그는 비폭력 무저항의 교단의 방침에도 불구하고 전봉준의 혁명론에 공명하여 마침내 삼월봉기 주역으로 전봉준과 갑오동학혁명을 영도했다.
전봉준은 공초에서 고부봉기를 누구와 협의했느냐는 물음에 손화중과 상의했다고 하였다. 3월봉기에 손화중포가 무장 구수내에 집결하여 전봉준 영솔 아래 고부로 와서 백산봉기의 주력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전주 해산후 무장, 장성 등지에 머물고 있었던 것 같다.
무장의 손화중 도소와 장성은 가까운 거리에 있다.
전봉준은 공초에서 이해 8월 전라관찰사의 부탁으로 나주에 내려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장성에서 손화중과 만난 일이 있었는데 이때 전봉준이 손화중에게 전주로 동행하자고 권유했으나 그는 신병을 요양한 후 전주에 들르겠노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손화중포의 농민군은 이해 7월 자주성 싸움에 최경선이 거느리는 농민군의 주력을 이루었다는 사실이다. 이때 최경선이 거느리는 동학농민군이 무장의 손화중 도소에서 집결하여 나주로 향했다는 사실이 촌로들의 증언에서 밝혀진 것이다.

9월봉기에는 일본군이 나주 해안으로 상륙한다는 설이 있어 전봉준의 북상에 참가하지 않고 최경선과 같이 나주에 머물고 있었다.
11월 전봉준의 공주패전 후 나주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시도했으나 태인전투를 최후로 대세가 재기불능에 이르자 11월 27일 광주로 진격했다가 12월 1일(양 12월 27일) 농민군을 해산했다.
그 후 그는 몸을 피하여 고창군 부안면 안현리(高敞郡富安面鞍峴里) 이모씨(李某氏)의 제실(祭室)에 있다가 12월 11일(양 1월 6일, 1895) 제실직(祭室直)인 이봉우(李鳳宇)의 고발로 관군에 잡혀 전주감영(全州監營)을 거쳐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비장한 비화 한 토막이 있다.
죽음을 같이 맹세했던 전봉준, 김개남이 이미 관군에 잡혔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손화중은 실의한 나머지 이봉우에게 네가 나를 고발하여 후상을 받아라. 그동안 너에게 진 은혜를 갚겠다.
이봉우는 후상을 받고 증산(甑山·평안남도)군수로 제수 되었다.
손화중은 서울로 압송되어 1895년 3월 30일 새벽녘 전봉준과 함께 최후를 마치니 나이 35세였다.

그는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내 백성을 위해서 힘을 다 하였는데 사형에 처하여야 할 이유가 있는가?" 하고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손화중은 여러 혈족들이 동학혁명에 가담하여 희생자가 많았다. 손익중(孫益仲), 손여옥(孫如玉)이 12월 25일 정읍에서 관군에 처형당하였고 손순경(孫順京, 족질), 손무경(孫武京, 족질), 류용수(柳容洙, 1895년 1월 6일 흥덕에서 처형)가 또한 희생되었다.

이 밖에 1895년 1월 16일 체포령이 내린 사람 가운데 손덕로(孫德老, 족형), 손춘익(孫春益, 족제), 손치경(孫致京), 손치수(孫致秀)가 있었다.
부인 류씨(柳氏, 1855∼1912)는 관군에 의하여 집을 소각당하고 네 살짜리 셋째아들(응수(應洙), 1890∼1961) 한 살짜리 갓난애기 딸을 데리고 화를 피하여 옥구(沃溝, 전북)에 가서 김씨(金氏)로 변성하고 3년 동안 지내다가 돌아왔다.
그리고 그의 기포장(起包將) 최서중(崔西仲)과 마부(馬夫)인 고창(高敞) 우복록은 광주(光州)에서 곤장수(棍杖手) 정정칠(丁正七)은 12월 4일 손덕수(孫德秀)와 함께 장성 북하면 용두동(北下面龍頭洞)에서 김낙주(金洛柱), 서상옥(徐相玉)등 민병들에 붙잡혀 일본군에 의하여 장성(長城) 장터에서 효수(梟首, 목을 베어 달아 매는 것)되었다.

제삼십육호(第三十六號)
판결선언서(원문)(判決宣言書(原文))
전라도 정읍 거 농업 평민(全羅道 井邑 居 農業 平民)
피고 손화(화)중 년 삼십오(被告 孫華(化)仲 年 三十五)
우기자(右記者)의 손화중(孫華(化)仲)을 대(對)하야 형사피고사건(刑事被告事件)을 심문(審問)한 즉(則) 피고(被告)난 동학당(東學黨)이라 칭(稱)하고 비도(匪徒)의 신괴(臣魁)로 개국(開國) 오백삼년(五百三年) 삼월(三月) 이후(以後) 해당(該黨)을 모아 전라도 고부군아(全羅道 古阜郡衙)로 드러와 작경(作梗)을 하여 군기(軍器)를 착탈(捉奪)하고 또 그 곳에서 저라감영군(全羅監營軍)을 항적(抗敵)하여 정읍(井邑), 흥덕(興德), 고창(高敞), 무장(茂長), 등지(等地)를 지나 전주(全州)로 드러가 초토사(招討使) 홍재의(洪在義)가 거느린 관병(官兵)을 항적(抗敵)함인데 그 사실(事實)은 피고(被告)와 및 기동모자(其同謀者) 전봉준(全琫準), 최영창(崔永昌, 최경선(崔景善)·필자주(筆者註)등(等)이 자복(自服)한 홍초(洪招)와 압수(押收)한 증거문적(證據文籍)이 분명(分明)한지라 피고(被告)의 소위(所爲)는 대전회통형전중(大典會通刑典中)의 군복기마작변관문자(軍服騎馬作變官門者) 부도시참(不徒時斬)이라 하난 율(律)을 조(조)하야 처죄(處罪)할 거시니라. 우(右)에 이유(理由)로써 피고(被告) 손화(화)중(孫華(化)仲)을 사형(死刑)에 처(處)하노라.

개국(開國) 오백사년(五百四年) 삼월(三月) 이십구일(二十九日) 법무아문(法務衙門) 대신(大臣) 서 광 절(徐光節)
협판(協辦) 이 재 정(李在正)
주사(主事) 김 기 조(金基肇)
오 용 묵(吳容默)
회심(會審)
경성주재 일본상국령사 내전정퇴(추)(京城駐在 日本帝國領事 內田定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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