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시 문화관광

정읍관광

정읍BRAND

김개남

이름 영주(永疇) 자 기선(箕先) 기범(箕範) 도강김씨(道康金氏)이니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山外面 東谷里·지금실)에서 김대현(金大鉉)의 셋째 아들로 출생했다.
개남(開南)이란 이름은 도강김씨 족보에도 기록돼 있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동학 교단에서 호칭된 별호인 것 같다.
태인(泰仁)은 이웃 금구의 원평(院坪)과 아울러 호남에서 동학이 가장 세를 떨친 곳이다. 그 가운데 산외면 동곡리는 김개남의 출생지일뿐 아니라 전봉준의 성장지로 갑오동학혁명의 요람지라 할 수 있다.
갑오년 6월 김개남의 남원 정벌군(征伐軍)이 이곳 지금실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이다.
할머니로부터 들었다는 김개남의 손자인 김한옥 옹의 증언에 의하면 이때 동학농민군의 군열이 10리에 뻗쳤다는 것이다.

여기에다가 최경선(崔景善)이 태인 주산리(舟山里) 출생이며 김덕명(金德明)이 또한 이웃 금구 원평 출신이며 산외면 오공리(五公里) 김개남의 종형인 김삼묵(金三默·명 영하(永夏)) 김문환(金文桓) 부자가 또한 동학의 중진 인물이었던 것이다.
당시 세간에서는 도강김씨에 24접주가 있다고 했을 정도로 태인 도강김씨가 동학에 많이 가담했던 것 같다.
전봉준 손화중과 아울러 갑오동학혁명의 삼걸(三傑)로 일컫는 김개남은 그 가운데서도 적극적인 강경파였다. 그는 남원을 본거지로 우도(右道)의 금산(錦山), 무주(茂朱), 진안(鎭安), 장수(長水), 용담(龍潭)을 비롯하여 좌도를 호령하였고 순천(順天)에 영호도회소(嶺湖都會所)를 설치하고 대접주(大接主) 김인배(金仁培)로 하여금 영남의 서남부지방(하동, 산청, 진주)을 관장케 했다.
그는 정부의 회유에 응하지 않았다.
이해 7월 대원군(大院君)의 효유문(曉諭文)을 가지고 찾아온 정석모(鄭碩謨) 일행을 곤장을 치고 두 달 동안이나 연금했던 것이다.
김개남은 전봉준과 시국에 대한 견해를 달리하여 행동을 서로 달리했다.
전봉준은 공초(供招)에서 "내가 왕사(王事)에 협력하자고 (일본이 침략해 와 있기 때문)권유했으나 끝내 들어주지 않아 상의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9월봉기에도 행동을 달리했다.

김개남은 한달쯤 늦게 10월에 남원에서 5천군을 이끌고 안귀복(安貴福), 이수희(李秀希)를 선봉장으로 전봉준과는 달리 전주, 금산(錦山)을 거쳐 청주(淸州)로 진격했다.
그리고 북상(北上)도중 전주(全州)에서 남원부사(南原府使) 이용헌(李龍憲), 고부군수(古阜郡守) 양필환(梁弼煥)을 체포했는데 굴복하지 않고 반항하자 일거에 이들을 참수(斬首)하였던 것이다.
그는 11월 10일 청주성(淸州城)을 공격했으나 일본군에 패하여 진잠(鎭岑)을 거쳐 태인으로 돌아와 태인 장금리(長錦里) 매부인 서영기(徐英基) 집에 잠거해 있다가 임병찬(林炳瓚)의 고발로 12월 1일(양 12월 27일) 강화병방(江華兵房) 황헌주(黃憲周)에 피체되어 전주로 이송되었다.

김개남은 태인 너듸(四升·정읍시산외면장금리) 서영기 집에 잠거해 있었는데 이웃 종송리(種松里·정읍시산외면) 임병찬(林炳瓚)이 김종섭(金縱燮)을 시켜 송두용(宋斗鏞·종송리) 집으로 유인했다.
그것은 종송리는 회문산(回文山) 자락으로 너듸마을 보다 험하고 높은 곳에 위치하니 더욱 안전한 곳으로 와 있으라는 것이었다.
임병찬은 김개남을 종송리로 유인해 놓고 김송현(金松鉉), 임병욱(林炳昱), 송도용(宋道鏞)을 시켜 전라도관찰사 이도재(李道宰)에 고발하니 이도재는 황헌주(黃憲周)로 하여금 강화병(江華兵) 80명을 거느리고 종송리에 와서 12월 1일 새벽 김개남을 잡아갔다.

다음해(1895) 정월 정부에서는 논공 행상으로 임병찬에 임실군수(任實郡守)를 제수했으나 임병찬은 이를 사양했다. 정부는 임병찬 대신 황헌주(黃憲周)를 임실군수로 제수했다.
전라관찰사 이도재(李道宰)는 김개남의 명성에 겁을 먹고 서울로 압송하는데 위험을 느껴 12월 3일(양 12월 29일) 신시(申時·하오사시(下午四時)) 서교장(西敎場)에서 임의로 처형하여 최후를 마치니 나이 42세였다.
그 머리는 서울로 압송되어 12월 25일 서소문(西小門) 밖에 3일간 달아 매었다가 다시 전주로 내려보내 달아 매었다.
일본공사 이노우에(정상형(井上馨))는 조선정부에 서한을 보내 비도(匪徒·동학농민군)의 처형은 신중을 기해야 하므로 체포된 비도들은 일본군에 넘겨 처리토록 하라고 요구했었다.
그런데 전라관찰사가 김개남을 단독으로 처형하자 일본공사는 조선정부에 전라관찰사를 불러들여 그 까닭을 엄중히 조사하여 공사(公使·일본)에 알려주고 그에 대한 처분문제는 공동으로 상의하자고 요구해 왔다.
난처하게 된 조선정부에서는 경위를 해명하고 그에 대한 처분을 할 터이니 불러들여 조사하는 것만은 재고하여 달라고 요청하여 간신히 이를 모면했다.
그리고 전라관찰사는 월봉이등지전(越俸二等之典)에 처했다.
1994년 5월 뜻 있는 이들의 성금으로 전주 덕진공원(德津公園)에 추모비를 세웠다.

  • 관리부서문화체육과/동학선양팀
  • 연락처063-539-5431
만족도 조사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