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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언 (1838~1895)

이름 민석(民錫) 자 자방(子邦) 인천이씨(仁川李氏)이니 장흥군 용산면 묵촌(長興郡 蓉山面 墨村)에서 출생했다.
그는 사회적으로 명망이 높았던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촌로(村老)들의 설화에 의하면 어느 해 장흥지방에 가뭄으로 흉년이 들었다.
농민들은 생계를 이어나갈 계책조차 없는데도 결세(結稅)를 바치라는 관아의 독촉이 성화같았다.
이에 이방언(李邦彦)은 장흥부사(長興府使)를 찾아가 감세(減稅)를 진정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전라감영(全羅監營)으로 가서 감사에 진정하여 남상면(南上面)의 결세를 감면했다고 한다.
그는 일찍이 동학에 들어가 장흥접주(長興接主)로 1894년 3월 백산(白山) 봉기에 이인환(李仁煥), 강봉수(姜琫秀), 강진(康津)의 김병태(金炳泰), 해남(海南)의 김도일(金道一), 영암(靈巖)의 신 성(申 聖)과 함께 참가했다. 특히 황룡(黃龍) 싸움의 유명한 '장태전법'의 주인공으로 알려져있는 인물이다.

이방언은 손화중과 광주(光州) 해산 후 장흥으로 돌아와 장흥(長興), 강진(康津) 지구에서 최후의 혈전을 벌였다.
12월 4일(양 12월 30일) 벽사역(碧沙驛)을 점령하고 5일에는 장흥부성(長興附城)으로 진격하여 저항하는 장흥부의 수성군(守城軍)을 격파했다.
이 싸움에서 장흥부사(長興府使) 박헌양(朴憲陽)이 전사했다. 그리고 7일에는 강진현(康津縣)을 점령하였으니 장흥·강진지구를 완전히 석권하였다.
13일 일본군(관군포함)의 장·강지구 총공격으로 남문(南門)싸움에서 패하여 장흥부를 일본군에게 빼앗기자 다시 탈환하려고 15일 장흥부성을 포위하고 반격작전을 전개했으나 때마침 일본군 증원군이 도착하여 실패로 돌아갔다.

이방언은 죽천장(竹川場)으로 후퇴하여 17일 또 접전을 벌였으나 패하고 말았다.
당시 세간에서는 이방언을 관산 이대장(冠山 李大將), 손화중을 초산 손대장(楚山 孫大將)이라 하였다.
또 이방언을 남도장군(南道將軍)이라고도 하였다.
이방언은 12월 25일 (양 1월 20일) 이두황(李斗璜)의 우선봉군(右先鋒軍)에 피체되어 나주(羅州) 일본군으로 넘겨져서 서울로 압송되어 다음해 3월 21일 어찌된 일인지 무죄 석방의 판결을 받았다.

제 호(第 號)
판결선언서(判決宣言書)

전라도(全羅道) 장흥면(長興면) 농업(農業) 평민(平民) 피고(被告) 이방언(李邦彦) 년(年) 오십팔(五十八) 우기자(右記者)는 이방언(李邦彦)이가 동학당(東學黨)에 투입(投入)하여 지방안녕(地方安寧)을 해(害)하는가 치의(致疑)하야 본아문재판소(本衙門裁判所)의 나교(拿交)하야 심문(審問)을 령행한 즉피고(則被告)의 범죄(犯罪)한 증빙(證憑)이 적확(的確)지 아닌지라
우(右)에 이유(理由)로 이피고(李被告)의 이방언(李邦彦)을 무죄방송사(無罪放送事)라
개국(開國) 오백사년(五百四年) 삼월 이십 일일(三月二十一日) 법무아문권설재판소(法務衙門權說裁判所)
법무아문(法務衙門) 대신(大臣) 서 광 절(徐光節)
협판(協辦) 이 재 정(李在正)
참의(參議) 장 박(張 博)
주사(主事) 김 기 조(金基肇)
오 용 묵(吳容默)
회심(會審)
경성주재 일본상국령사 내전정퇴(추)(京城駐在 日本帝國領事 內田定槌)
전설에는 당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주선으로 석방되었다 한다.
이방언은 향리로 돌아와 회령면(會寧面) 신기(新基) 이의원(李義元)의 집에 잠거하다가 자흥부의 수성군(守城軍)에 피체되어 1895년 4월 25일 독자 성호(聖浩)와 함께 장흥 장대(將臺)에서 최후를 마치니 나이 58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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