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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서 (1858~1918)

이름 석일(錫一), 운일(雲一), 일서(一西) 자 익서(益瑞) 초계최씨(草溪崔氏)이니 정읍시 입암면 만화동(笠岩面 萬化洞)에서 출생했다.
일찍이 동학(東學)에 들어가 1894년 갑오동학농민혁명에 참가하여 관군으로부터 체포령이 내리기도 했다.

1898년에는 고부 마항리(馬項里. 井邑市 梨坪面)에서 예수교(敎)를 빙자하여 영학계(英學溪)를 조직하고 고부(古阜), 장성(長城), 흥덕(興德), 고창(高敞), 영광(靈光), 무장(茂長), 함평(咸平) 7개 군(郡)의 수계장(首溪長)이 되어 비밀리에 재봉기를 추진하여 마침내 1899년(己亥) 정읍농민봉기를 일으켰다.
이 해 4월 18일 아버지 영두(永斗)와 김여중(金汝中.扶安), 김문행(金文幸.泰仁), 송문여(宋文汝.長城) 등과 거사를 계획하고 입암면 왕심리(立岩面 旺尋里)에 도내 3백여 명의 농민을 소집하여 봉기한 것이다.

벌양벌외(伐洋伐外),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 아래 "우리는 갑오(甲午)의 여당(餘黨)이니 앞으로 이웃 고을의 군기를 거두어가지고 영암(靈巖)의 민란 장두(狀頭) 최(崔) 옵바시와 상응하여 광주(光州), 전주(全州)를 함락하고 장차 서울로 진격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고부 군아로 들어가 무기를 탈취하여 농민군을 무장하고 19일 흥덕(興德)으로 진격하고 21일에는 무장(茂長)을 점령하고 22일밤 고창(高敞)싸움에서 때마침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패하고 말았다.

농민군의 무기들이 비내리는 데서는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고창싸움에서 실패한 최익서의 농민군은 난산장터(卵山.속칭 알뫼장터 現 高敞郡 富安面)로 후퇴했는데 관군의 추격으로 23일 접전을 벌였으나 패하고 말았다.
정읍농민봉기에는 도내 20개군의 농민들이 참가하고 이 가운데 2백여 명이 피체되어 사상자가 많았다.
최영두(崔永斗 1829~1899)는 관군에 잡혀 전주옥(全州獄)에서 옥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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