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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제(洞祭)와 결부된 축원농악(祝願農樂)동제는 한 해 네 차례에 걸쳐 정기적으로 하는 계절제인데, 이 중에서 가장 주된 제사는 봄, 가을에 한다. 동제는 일단 재앙을 막고 복을 불러들이기 위해 거행되지만, 본래는 농경생산과 깊은 관계가 있다. 따라서 제사를 지내고 제재초복(除災招福)하는 데에 중요한 것은 생산의 무제농양(無祭農穰)이라 할 수 있다. 부락의 무재안태(無災安泰)나 부락민의 무병득복(無病得福)을 기원하는 것은 중요한 생산의 근원에 종속한다. 따라서 봄의 제사는 그 해의 농사가 하등의 재해 없이 잘 이루어지도록 축원하는 것이고, 가을에 행하는 제사는 그 해의 농산물이 별 탈 없이 풍년들게 해 준 데 대한 감사의 뜻으로 행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굿이라 하면 제신무악(祭神舞樂)에 관련된 종교적 주술기능(呪術藝能)으로 행한 모든 신성한 행위(노래, 춤, 연극 등)를 말한다. 이러한 굿은 무녀(巫女)나 광대들에 의해 행해지는 경우와 농악으로 하는 경우가 있다.

무악(巫樂)으로 하는 동제

도당(都堂)굿-경기도, 단오(端午)굿-강원도, 함경도 도신(禱神)굿, 별신(別神)굿- 경상도 당(堂)굿, 별신(別神)굿-평안도

농악으로 지내는 동제

당(堂)굿-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따라서 동제에 있어서 제신무악(祭神舞樂) 즉 굿놀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악(巫樂)과 농악이라고 할 수 있다. 동제의 제당(祭堂)은 경기, 충청의 서해안 지역의 경우에는 산신당(山神堂)이고, 강원도 경북, 충북은 성황당(城隍堂)이며, 호남과 경남은 당산(堂山)으로 되어 있는데, 이 중에서 당산에서의 동제는 농악이 제사의식에 직접 참여하는 것이다.
당굿을 농악으로 하는 경우 농악대들이 성황대(지금은 농기(農旗)나 영기(令旗)로 하는 수가 많다)를 들고 앞장서며, 농악을 연주하는 가운데 제관(祭官), 축관(祝官),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뒤를 따르게 된다. 당(堂)에 도달하면 당 주변을 돌거나 일렬횡대로 서서 당굿을 치고 절가락으로 절을 하거나 축관(祝官)이 축문을 외는 가운데 제관은 소지를 올려 제사를 지내며, 제사가 끝나면 신을 즐겁게 하거나 신과 더불어 농악으로 즐겁게 춤을 춘다.
서낭기(전라도에서는 용기(龍旗), 경상도에서는 천왕기(天王旗))에는 서낭신이 잘 내리도록 방울을 달고 기폭에 서낭의 모양으로 용(龍), 범(虎), 인신상(人神像)을 그리기도 한다. 또 기폭에 신상(神像)을 그리는 대신 용탈, 사자탈, 거북탈을 쓴 놀이꾼을 서낭대에 딸리기도 하며, 인신(人神)탈을 쓴 잡색(雜色)을 딸리기도 한다. 지방에 따라서는 당(堂)에서 농악대들이 판굿을 하고 대동(大同)우물굿이나 집돌이(지신밟기)를 하기도 한다.
농경생활과 직결된 두레농악 두레는 농사꾼들이 농번기에 공동으로 협력하기 위하여 조직된 모임이다. 이러한 두레는 논농사와 깊은 연관이 있다. 모심기, 논매기 등의 논농사는 그 시기가 극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집중적인 노동력의 동원이 필요하다. 따라서 공동노동은 농경생활에 있어서 불가피한 노동방식이 될 수밖에 없었다.
품앗이는 일반적으로 노동을 교환하는 생활체계를 말하는 것으로 두레가 노력의 합리성을 강조한 제도라면 품앗이는 보다 증여(贈與, gift)의 관념에 비중을 둔 관행이라 하겠다. 그러나 양자가 모두 공동체 생활양식에서 생성된 협동의 제도이며, 그 바탕에는 농민의 능력에 대한 평등관이 깔려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러한 농경생활에는 반드시 농악이 따랐다. 그리하여 농악은 노동생활은 물론 농민들의 단합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농악의 발달요인 중에서 두레패들의 농경생활과 농악은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농악은 두레로 노동을 할 때 노동의 고통을 풀어줄 뿐만 아니라 일의 능률을 높여 주기 때문이다. 두레의 뜻에는 공동체 성원 모두를 포함하고 외부 세계와 경계를 긋는다는 의미가 있다. 또한 두레는 일을 돌아가며 해 준다는 의미도 지니고 있는 공동체적 제도로서, 두레패들은 직접 생산을 담당하는 평민이나 농민들이다.
두레패는 16세 이상의 남자로서 조직하며 반드시 마을 단위로 구성하게 된다. 두레패가 하는 작업은 주로 모내기, 김매기, 추수 등을 하는데 이들의 생활은 공동노동뿐만 아니라 공동회식, 공동가무가 특색이다. 이른바 민속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같이 일하고, 같이 먹고, 같이 노래하고 춤추는 두레생활의 전통에서 발달한 것이다. 특히 농악과 농요(農謠)는 두레생활에서 필수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토착예술로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두레가 성행했던 시대에는 마을마다 두레본부인 농청(農廳)이 있었다. 그리하여 여기서 모든 연회를 하고, 공동노동을 하거나 휴식을 취하였으며, 농기(農旗)나 농악기(農樂器) 그리고 공용농구(公用農具)도 보관하였다. 농악은 두레에 부속된 필수적인 것이었으므로 원칙적으로 농악이 없는 두레는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농악은 두레가 발달한 곳에서 성행하였으므로 농악은 농경이 발달한 평야지대에서 현저하게 발달한 흔적이 보인다. 그 예로, 호남농악인 경우 김제를 중심으로 한 만경평야의 농악 나주평야를 중심으로 한 농악, 남원과 곡성을 잇는 금지평야권의 농악 등이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영남농악인 경우에는 김해평야, 경기농악인 경우에는 평택평야권의 농악이 그 지역 농악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밖에 하천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도 여러 유형의 농악이 형성되었다.
낙동강을 중심으로 영남농악이 형성되었고, 강이 많은 호남지방의 경우에는 강을 중심으로 하여 다양한 농악의 형태가 나타났다. 전남 서부의 영산강, 전남과 전북을 잇는 섬진강, 군산, 김제로 흐르는 만경강 등을 중심으로 농악권이 형성되어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충남의 금강, 경기도와 충북 그리고 일부 강원도 지방은 한강유역권의 농경문화로 인해 농악의 내용과 형태가 서로 비슷한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다. 산악도 농악의 내용과 형태의 형성에 많은 작용을 하였다. 태백산맥으로 말미암아 동해안 일대의 농악들이 서로 교류하여 같은 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강원도 농악의 경우, 영동과 영서는 전혀 다른 농악의 형태를 보이고 있고, 경상도의 경우에도 동쪽 산악지방의 농악과 서쪽 평야지대의 농악이 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호남농악도 서부 평야지대의 농악과 동쪽 산악지대의 농악이 각각 다른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이에 비하여 경기, 충청지방은 험악한 산맥이 없으므로 이 지역의 농악들은 대체로 동일하고, 이런 현상은 황해도 지방도 마찬가지이다. 재미있는 것은 산악지대의 농악의 형태가 거칠고 가락이 빠른 데 비해 평야지역의 농악은 가락이 비교적 느리고 부드러운데, 이는 그 지역 환경의 영향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세밀하게 분류하여 보면, 같은 지방일지라도 조금씩은 그 모습을 달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농악의 형태가 개성적으로 토착화된 지역을 보면, 대체로 마을 앞에 평야를 두고 그 뒤는 산맥으로 둘러싸인 빈지마을이라는 사실도 드러난다.

걸립(乞粒)과 군악(軍樂)의 기능을 가진 농악 걸립농악(乞粒農樂)이 시작된 시기는 고려 때인 것으로 보인다. 팔관회와 연등회 등의 국가적 명절행사를 통해 가무백희(歌舞百戱)가 성행하였고, 한편으로는 흉례(凶禮)에 속하는 나례의식(儺禮儀式)이 거행되었는데, 나례(儺禮)는 축귀예능(逐鬼藝能)으로 세종나례(歲終儺禮, 매(埋)굿)였다. 그러다가 역귀를 쫓는 종교적 의식보다는 점차 관중을 즐겁게 하는 구경거리, 즉 축귀예식(逐鬼藝式) 다음에 하는 가무백희(歌舞百戱)에 더 비중을 두게 되었고, 나례(儺禮)가 나희(儺戱)로 변모되어 간 것 같다. 그리하여 우인(優人), 창우(倡優)로 불리는 직업적인 예능인이 생겨나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걸립패(乞粒牌)의 시원을 확실히 해 주는 기록은, 이두현(李杜鉉) 교수가 〈한국의 가면극(假面劇)〉에서 밝혔듯이 광대(廣大), 재인(才人), 수척(水尺), 신당(神堂) 등의 예능인들의 생활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들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기타의 문헌들에서 산견된다. 그들은 농사를 짓지 않고 걸량(乞糧, 乞粒)으로 생활하며, 나례도감(儺禮都監)의 공의(公儀)와 함께 존속되어 왔고, 유사시에만 상경하여 궁궐에도 출입하여 나례(儺禮)에 출연하였으나, 평상시에는 떼를 지어 경향 각지를 다니며 각종 연희를 보여주고, 이른바 걸립(乞粒)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특히 사사파(寺社罷) 이후 재승기악인(才僧伎樂人) 등이 환속하여 재인(才人), 광대(廣大)들과 상종하며 연예인사회(演藝人社會)에 어울리게 되었다고한다. 전남 해남군 대흥사(大興寺)에는 응송(應松) 스님이 소장한 『설나규식(設儺規式)』이라는 책과, 범해(梵海) 스님이 소장했다고 하는 『고인규본편차(故因舊本編次)』라는 책이 있다. 거기에 보면, 동쪽 풍속에는 매(埋)굿, 소나(消儺), 금고(金鼓), 걸립(乞粒), 걸공(乞工) 이라는 칭호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나례(儺禮)의 별칭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들을 보면 걸립농악은 무당(巫堂), 재인(才人), 광대(廣大) 들로 조직된 패들이 하던 귀신을 쫓는 나례의식(儺禮儀式)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조선조에 이르러 불교가 유교에 밀려 쇠퇴함에 따라 사찰의 재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승려들이 속계(俗界)에 내려가 걸립하거나, 인근 농악단을 고용하여 절걸립으로 민가를 돌아다니면서 집돌이를 하게 되어 절걸립농악이 성행하게 되었다. 걸립농악의 조직은 절걸립패말고도 낭걸립패(神龐걸립패)가 있으며, 이 걸립은 직업적인 농악단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 농악꾼(두레농악꾼)도 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걸립패들이 농악하는 목적은 마을의 공익사업기금을 거출하기 위하여 구정 때나 아니면 특별히 날을 잡아서 집집을 돌아다니면서 농악을 치기도 하였다. 걸립굿은 주로 집돌이로서 지신밟기를 하는 것과, 그 후 연기를 보여주기 위해 행하는 굿판으로 갈라서 한다. 민속학자 현용준(玄容駿) 교수는 그의 논문 「화함고(花艦考)」에서 제주도의 무당들은 당제(堂祭)를 지내기 위한 자금을 거출하기 위하여 정월달에 가가호호를 순회하면서 지신밟기를 한다고 했고, 1937년 조선총독부에서 나온 『부락제(部落祭)』에는 평안도 희주 성황제(城隍祭)에서 신위(神位)를 신흥(神興)에 점지시키고 무당(巫堂), 농악대(農樂隊), 제주(祭主), 동민(洞民) 순으로 편성하여 행락(行樂)하며 가가호호를 순방했다는 기록이 있다.

불가(佛家)에서 행한 지신밟기에 대하여 최병호(崔炳浩)씨(전북 완주군 용진면 거주 향토예능연구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금산사(金山寺)의 유재한 스님(작고)이 말하기를 불가(佛家)에서의 마당밟기는 마(관자놀이 마), 당(북소리당), 撥(바리때 발), 璂(고깔꾸미개 기)로 표기한다 하며, 그 내용은 고깔을 꾸며 쓰고 바리때를 들고 북소리를 내면서 관자놀이를 한다는 뜻이 되고, 지신밟기는 祗(地神 기), 신(아귀 신), 撥(다스릴 발), 旗(대장 기)로 불렀다고 하는데, 귀신이름은 지신(地神)이요, 대장깃대 꽂고 잘 밟아서 다스린다는 뜻이라고 전한다. 예컨대 옛날에는 정초에 승려들이 속계에 내려가 가가호호를 방문하면서 법고에 맞추어 염불독경(念佛讀經)하고 망령(亡靈)을 위로하는 중걸립(중乞粒)을 하였다고 볼 때 불가(佛家)에서도 진혼의식(鎭魂儀式)으로서의 지신밟기를 행해왔음을 알 수가 있다. 한편 호남지방에 널리 퍼져 있는 지신밟기에 대한 속설(俗說)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 즉 큰 사람을 지신(地神)님 발 같다고 했으며, 또 음력 섣달 그믐날이 오면 울안(집안)에 널린 빨래를 걷었다가 그날이 지난 후 다시 너는 풍속이 있었는데, 지신(地神)이 발동한다 하여 빨래를 걷었다고 한다. 또 섣달 그믐날이 되면 마을에서 연세 높은 분을 터줏대감으로 받들고 그 분의 명에 따라 매굿을 쳤는데, 이때는 지신기(地神旗)를 들고 풍물을 치면서 집 주위를 골고루 밟아서 터주지신과 성주지신들을 달래고 잡혼을 몰아내는 굿을 했다고 한다. 물론 이 말들은 속설에 지나지 않지만, 오늘의 지신밟기나 마당밟기와 같은 것이 마을의 잡귀를 몰아내고 복을 얻는다고 하는 흔적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틀린 말이 아님을 느끼게 된다. 지신밟기란 무속에서 말하는 부정을 씻고 굿터를 정화한다는 것이나, 불교의 청정신앙에 의한 도량의 청정, 공간의 정신화 내지는 성지화에 근원을 둔 것이 아닌가 하는 해석도 나올 수 있다. 이러한 지신밟기는 영남, 영동지방에서는 주로 마을 농악꾼들이 하고 있고, 경기와 충청 그리고 호남지방에서는 마을 농악꾼들 말고도 걸립패(乞粒牌)들이 하는 수가 많다. 그 이유는 경기도 지방의 경우는 나례꾼(儺禮꾼)들이 관(官)을 왕래하기에 가까운 거리에 있기 때문이고, 충청도인 경우는 절이 많고 평야가 비교적 많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호남지방에서 걸립농악이 고도로 발달한 까닭은 곡창지대라 많은 쌀로 후한 대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재인(才人)들이 이곳에 모여들어 걸립농악이 한층 예능적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근대농악에서 전북지방의 정읍과 김제지방의 농악이 예능적으로 발달한 것은, 김제의 강증교(姜甑敎, 東學系의 在來宗敎)와 정읍의 동천자교(東天子敎, 東學系의 在來宗敎)에서 농악을 중요시하고 교서(敎書)에 올리는 등 각지의 농악인들을 불러들여서 교리에 따른 포교 수단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보통 농악은 지신밟기가 끝나면 판굿을 하는 수가 많은데, 판굿은 연주하여 흥을 돋구는 채굿을 비롯하여 춤과 연극, 놀이 같은 것들이 연희된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그 사이사이에 들어 있는 진풀이(陣풀이, 행진으로 구성되는 군사놀이)이다. 이 진풀이는 판굿에서 가장 주축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여러가지 형식을 가지고 있다. 또한 춤과 연극, 놀이 등의 표현과 내용에는 전투적인 예능요소가 가장 많으며, 복색은 전복(戰服)으로 꾸며진다. 아마 농악이 군악이라는 설을 가진 까닭은 이러한 데 근거를 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걸립농악에 있어서 지신밟기가 축귀(逐鬼)와 정토(淨土)의 예능이라 하면, 판굿은 전투적 성격의 예능이라 할 수 있다.

농악이 군사적 내용을 갖추고 놀게 된 시기는 멀리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볼 수 있다. 고구려에는 '고적(鼓笛)'이 있어서 군대에서 신호로 쓸 뿐만 아니라, '고각(鼓角)'의 소리를 들으면 일제히 나가서 분격(奮擊)하도록 했다[帝勤 請軍 聞鼓角齊出奮擊]는 기록이나, 鼓角을 불고 기치(旗幟)를 들게 하니 모든 군사가 북치고 고함을 지르며 일제히 진군했다(帝望絹無忌軍塵起 命作鼓角擧旗幟 諸軍鼓操竝進)는 기록이 『三國史記』에 있다. 그리고 백제의 '요고(腰鼓)'는 각(角)과 함께 군대의 신호용으로 같이 사용한 것이다. 또한 자명고(自鳴鼓)의 설화도 고각(鼓角)의 신호에 따라서 신속히 움직이는 잘 훈련된 군대가 악랑(樂浪)이나 통일신라 초기에 있었음을 상징적을 나타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따라서 다소 단편적이지만 이시기는 북이나 장구와 같은 타악기를 가지고 군사적 무악(舞樂)을 했을 것이라 추리해 볼 수 있다.
고려 때부터는 대륙으로부터 군악기(軍樂器)가 들어옴으로써 군립대(軍笠隊)가 편성되었고, 이들을 위해 중군진법(軍中陣法)을 상징한 진풀이나 호신술(상모), 신호 또는 군사적 시위로서의 기능을 가진 판놀이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임진왜란과 동학혁명 때는 軍樂 형식의 놀이가 더욱 가미되어 걸립패 농군들이 자주 연희(판놀이)를 함으로써 지금과 같은 진풀이가 남게 된 것으로 보인다. 농악에서 군악적 성격을 가장 많이 띠고 있는 군고(軍鼓)는 전남 해남군의 송지면, 황산면, 화산면, 계곡면 등의 몇 개 마을과 전북 금성, 정읍 등 호남우도농악 지역에서 전승되고 있다. 해남지방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현재 잔존하고 있는 군고(軍鼓)의 근원은 서산대사(西山大師)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즉 선조 46년(1607년) 서산대사의 『구물금의염송(舊物錦衣拈頌 )』등을 대흥사(大興寺)에 전할 때 『진법군고(陣法軍鼓)』라는 책명의 군고(軍鼓)놀이 규시본(規式本)이 함께 전해졌는데, 그것의 필사본이 놀이꾼들 사이에 유포된 바 있다고 하며, 실제로 그것을 보았다고 하는 사람들도 현존하고 있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원본이 없어 확인할 수 없으나, 황산면 출신인 박정규(朴政圭) 씨가 종쇠인 김수영(작고)에게 전한 필사본 『진법군고(陣法軍鼓)』가 아직 남아 있다. 이곳에서 판굿의 내용을 보면 전놀이(前놀이) 를 비롯하여 군례(軍禮), 진풀이로서 장진놀이(長陣놀이), 원진(圓陣)놀이, 을자(乙字)진풀이, 지자(之字)진놀이, 태극진놀이 등이 있고, 군사의 포부(捕賦)놀이, 청영 군정놀이(聽令 軍丁놀이, 전승축하놀이) 종연하례굿(終演賀禮굿) 등으로 되어 있다. 군악적 성격을 띤 농악은 어느 지역에서나 흔히 볼 수가 있다. 예로서 김제농악은 일광놀이와 호호굿, 도둑잽이, 탈머리가 있고, 필봉농악은 군영(軍營)놀이, 도둑잽이, 금릉(金陵) 빗내농악은 진(陣)굿, 부산농악은 승전(勝戰)굿, 진주농악의 이른바 팔진해무진(八陣解武陣), 강릉농악의 팔진법(八陣法) 등이 그것이고, 또 여러 지역의 농악에서 볼 수 있는 진(陣)풀이가 군악적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사회변동에 따른 농악 제정일치 사회에서의 제천의식에서부터 조선조 중엽까지 농악은 상하계층의 구별 없이 누구나 함께 즐겨하였다. 그러나 조선조 말엽에 이르러 민란이 잦아지자 상부계층은 농민을 단결시키는 농악을 경계하고 적대시하기 시작했다. 그 하나의 예로 조선조 시대 후기에 통치자들은 방대한 기록과 문헌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두레나 농악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단편적이기는 하나 〈영조실록(英祖實錄)〉과 〈비변사등록(備邊司등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1837년 원경하(元景夏)가 호남별유어사(湖南別遺御史)로 임명되어서 전라도 부안에 들렀을 때, 두레의 농기(農旗)와 농악기(農樂器)가 민중들의 반란시에 군용물이 될 수 있다고 보고 농기와 농악기들을 몰수한 적이 있고, 1838년 암행어사 남태양(南泰良)이 두레에 대하여 국왕께 보고를 하자 국왕이 왜 농민들은 꽹과리와 징을 가지고 농사를 짓느냐고 묻자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은 농사를 짓고 수확을 할 때는 모두가 그 악기를 가지고 일을 한다고 대답한 것을 기록되어 있다. 또한 『영조실록(英祖實錄)』에는 농악에 대한 국왕의 물음에 암행어사는 들에서 일을 할 때 일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꽹과리와 북을 두드리어 사기를 올려 일을 하게 한다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또한 국왕이 두레의 농기(農旗)가 군대에서 사용하는 깃발과 같은 것이냐고 묻자, 호남 암행어사는 농기와 농악기는 군대용이 아닌 백년민속(百年民俗)으로서 금지하기가 어렵다고 대답한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이 단편적이나마 호남지방에는 두레와 농악이 성행하였음을 알 수가 있고, 또 조선왕조의 지배층이 두레와 농악에 대하여 그렇게 호의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대시한 것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농민이 반발해서 폭동을 일으킬 염려가 있기 때문에 양반들은 농민들을 조종하여 세뇌하려고도 하였다. 그리하여 농악을 하게 하여 쌓였던 불만을 발산시켜 반발을 사전에 방지하기도 하였다. 근대 농악하면 우선 수난기의 농악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세기 말에 일어난 갑오동학농민혁명과 왜정식민지 생활, 그리고 6.25동란과 서구문화 등에 영향을 받아 민족문화예술이 상처를 입는 불행이 있었다. 동학혁명 때에 농군(農軍)들이 농악을 하였다는 구체적인 문헌상 기록은 없으나 혁명운동 당시 오합지졸을 급속히 동학군으로 훈련시키는데 있어서 낮에는 이른바 조련진법(操鍊陣法)을 하였다고 하는데 이때 농군의 사기를 충천시기키 위해서 농악을 훈련에 전용시켰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이 간다. 따라서 이때의 농악은 농경적인 마을농악에 비하면 한층 폐쇄적이고 거칠고 진취적인 면이 강한 공격적인 농악이었으리라 추측된다.

농악이 수난을 심하게 겪은 것은 일제가 식민지 정책의 하나로 농민들이 단합하게 되는 농악을 금지시켜 한국인의 공동체를 해산시킨 데 있다. 1910~1945년의 日帝 강점기에는 화폐경제가 농촌사회에 가일충 침투하고, 日帝의 식민지 정책의 영향으로 변화를 겪게 되었다. 日帝 강점기에 있어서의 농경생활에 변화는 두레의 쇠퇴와 소멸, 공동체적 두레의 변질 등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다수의 두레와 농악이 쇠퇴하고 소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두레와 농악은 그것이 갖고 있는 사회적 기능으로 말미암아 일제 초기 식민지 정책의 압력하에서도 강인하게 존속되었다. 예로서 충청도 홍성군인 경우 1915년 197개의 두레가 존재하고 있었고, 그 중 농악을 하는 곳이 164개였고, 농악을 하지 않는 두레는 33개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전후부터는 한국의 장년(壯年)들을 징용하고, 청년들은 징병했으며 곡물을 공출케 하였고, 농악기(징, 꽹과리, 나팔) 등을 헌품(獻品)하게 하였으므로 농악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박탈되어 버렸다. 또한 6,25동란의 여파로 계속 사회적 불안과 서구문화의 영향 그리고 농촌의 생활환경 변화로 두레가 없어져 버림으로 마을농악은 설 땅을 상실하게 되었다. 옛날에는 두레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어느 마을을 불문하고 농악이 생활화되어 있었으나, 두레가 없어진 오늘날에 와서는 농악이 생활로부터 유리되어 버렸다. 따라서 농악이 계승되고 있는 지역은 그리 많지 않은 실정이다. 농악이 전승되고 있는 지역을 보면 비교적 부촌(富村)이고, 농악에 이해가 많은 촌로들이 있거나 훌륭한 상쇠가 있는 마을, 아니면 그 지역의 유지나 사회단체를 포함한 문화단체에서 농악을 적극 지원해 주는 곳이다. 용인민속촌의 농악을 비롯하여 남사당패의 농악, 부산 아미농악, 대전 웃다리농악, 전주시립농악단, 이리농악단, 강릉농악단과 평택농악단처럼 契조직과 官의 협조 같은 것이 있어서, 자선사업이나 공공기금 모금을 위하여 걸립하거나 각종 행사에 출현하는 등, 그 지역의 농악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근래에 와서는 도, 군 단위에서도 농악을 살리려는 곳이 많아지고 있다. 도나 시, 군 단위의 농악경연대회도 매년 여는 곳이 많아졌으며, 또한 농업고등학교에서도 농악부를 두는 곳이 많고, 일반학교에서도 농악대가 있다. 이렇듯 농악에 대한 관심이 사회적으로 높아진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대부분의 농악들이 진취적이고 공동체적인 농악정신이 퇴화되고, 예능 속에 담겨져 있는 종교와 성성(聖性)이 가셔지면서 단순한 연예물로 전락한 느낌마저 든다. 또한 농악대회나 텔레비전 등에 의하여 농악의 지방적 특색이 상실되어 획일화되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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