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극인(丁克仁) : 조선전기 때의 학자, 1401(太宗1)~1481(成宗12)

광주(廣州) 출생. 본관(本貫)은 영성(靈成), 자(子)는 가택(可宅), 호(號)는 불우헌(不優軒)ㆍ다헌(茶軒)ㆍ다각(茶角). 진사 곤(坤)의 아들

1437년 세종이 흥천사(興天寺)를 중건하기 위하여 대 토목공사를 일으키자 태학생(太學生)을 이끌고, 그 부당함을 항소하다가 왕의 진노를 사 북도(北道)로 귀양을 간 뒤 풀려나 처가가 있는 태인 고현내로 내려와 초가삼간을 짓고 가호를 불우헌(不優軒)이라 사용하였다. 집 앞에 흐르는 시냇물을 필수(泌水)라하고 향리의 젊은이들을 모아 학문을 가르치며 지도하였으니 이것이 태인향약(泰仁鄕約)의 시초이다.

69세 때 태인현 훈도로 있었으며 1470년(成宗1) 치사, 귀향하여 후진양성에 힘썼다. 1472년 영달을 구하지 않고 향리 자제를 교회(敎誨)한 공으로 3품산관(三品散官)의 은영(恩榮)이 내리자 이에 감격, 〈불우헌가(不優軒歌)〉ㆍ〈불우헌곡(不優軒曲)〉을 지어 이를 송축하였다. 비록 환로의 영달은 없었으나 선비로서의 지개와 풍도를 고수하였고, 안빈낙도(安貧樂道)하면서 81세로 죽었다. 최초의 가사작품으로 알려진 〈상춘곡〉과 단가(短歌)〈불우헌가〉, 한림별곡체(翰林別曲體)의 〈불우헌곡〉등을 지어 한국시가사에 공헌을 하였으며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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