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승(朴準承) : 독립운동가, 1866(高宗3)~1921

임실군 청웅면 옥석리 하주평(任實郡 靑雄面 玉石里 下舟坪)에서 출생. 본관(本貫)은 밀양(密陽), 호(號)는 자암(자菴) 호진(昊)의 아들.

25세 되던 해 1890년(高宗27) 동학에 입교, 1904년 단발흑의령(斷髮黑衣令)의 개화운동에는 수접주(首接主)로 활약했으며 또 천도교(天道敎) 도사(道師) 중앙총부(中央摠部) 감사정(監司正) 등 교직(敎職)을 지내기도 했다. 박준승이 태인(泰仁)으로 이사해 온 것은 1915년으로 전한다.(李甲成撰 墓碑文)

1919년 3ㆍ1운동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가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으나 민족대표 33인은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의 조사를 거쳐 경성고등법원(京城高等法院)의 최종공판에서 실형선고를 받았는데 이때 박준승은 2년 6월의 징역형을 받고 복역 중 병으로 보석으로 가석방되어 정읍 본가로 돌아와 며칠 지나서 1921년 3월 23일 별세했다. 장례는 천도교장(天道敎葬)으로 지내고 초장(初葬)은 북면 마정리(北面 馬亭里)에 안장했다가 1963년 6월 정읍 구미동 성황산(龜尾洞 城隍山)으로 이장하고 묘비문(墓碑文)은 33인의 한사람인 이갑성(李甲成, 號硏堂)이 찬했다. 그리고 1962년 3월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 복장(複章)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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