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鷗波 白貞基義士 殉國碑文

세한에 송백의 절개가 알려지고 난세에 의인 열사 고절이 빛난다.
槿域全土가 일체 침략에 유린되고 전세계가 제국주의의 발악에 공식되려할 즈음에 구파백정기의사는 홀연히 일어나 이 겨레와 뭇 전인류의 영원한 행복을 위하여 살신성인의 성스러운 희생을 바친 우리나라 무정부주의자의 선구주다.마침내 8.15 해방을 맞이하자 이땅의 겨레들은 선생의 의열을 추모하고 그 뜻을 기리 간직하고자 선생의 유해를 적지 나가사끼에서 서울 효창공원 의사묘역에 봉안하니 곧 민족 만대의 귀감이신 삼의사(三義士)의 한분이다. 선생은 수원백씨니 명(名)은 정기이며 자는 용선이요 호는 구파(鷗波)다.
단기 4229년 1월 19일 부안군 동진면 하장리의 빈농인 백남일 장남으로 태어나서 그 후 정읍군 영원면 은선리로 이주하였다. 유시에 엄친을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가업을 도우며 주경야독하며 장지를 길렀다.
기미 초춘 민족갱생의 봉화인 3.1운동이 촉발되려 할즈음 선생은 12세의 열혈청년으로 일제와 결사투쟁할 것을 굳게 결의하고 동지규합과 자금염출에 동분서주하던 중 동년8월 계획이 누설되어 일시 봉천방면으로 피신하고 그 후 수 삼차 국내에 잠입 활동하다가 단기 4255년 말 북경으로 망명하였다. 4256년 여름 선생은 동경으로 건너가 조천수력발전소 공사장에 은신하여 일왕암살을 계획하다가 불의의 동경진화로 동지를 잃고 부득이 익년 4월 북경으로 귀환하였다.
4257년 6월 직접 행동을 주장하는 정열의 선생은 당시 사회를 풍미하던 소련 괴뢰 독재적 공산당을 배격하고 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법에 있어서 완전히 무정부주의에 공명하여 마침내 재중국 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하고 이회영, 정화암, 이을규, 이정규 등 동지와 주간지 정의공보를 발간하였다. 동년 11월 선생은 다시 노동운동을 전개코저 상해 영국 경영의 철공장 직공이 되어 노동조합을 조직하는 일방 중국 동지 노검파 및 대만동지 범본량 등의 화남 아나키스트 연맹과 제휴하여 노종자의 사상계몽에 진취하였다.
그리고 또 중국동지 육불여모일파 등이 주재하던 상해공단 연합회를 적극 강화하던 차에 4258년 5월 30일 영일 양국 자본가를 상대로 저 유명한 오주 상해 총파업이 일어나자 12만 노동자를 동원하여 가지고 이에 가담하여 중구적인 투쟁을 하였다. 4261년 구월 남경에서 한일중비안인 등 제국동지들로서 동방 무정부주의자연맹이 조직되자 선생은 한국대표로 출석하였으며 동연명기관지 동방편찬위원의 일원으로 활약하였다.
4263년 10월 당시 북만주해림 지구를 기반으로 김우진, 이을규를 비롯하여 해방전 대일대공 투쟁에서 순절한 김시야, 김야진, 이준근, 엄향순, 김야붕 등 동지가 한족연합회을 조직하고 한교의 조직화와 혁명사상 고취에 전력하던 중 우리 독립운동을 분열 방해시키기에 혈안이 된 공산도당에게 백야 김좌진 동지가 피살되자 그 복구 운동이 일어나 선생은 정화암, 김지강, 양여주 등과 급히 해림시로 달이어 일제 주범 복멸에 쇄신 혈투하였다.
4263년 9월 만주사변이 촉발하자 선생은 상해로 돌아가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화남 아나키스트 연맹 및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 등을 기반으로 항일 해방연합을 조직하여 서사항일의 선전공작을 하던 중에 제 1차 상해사변이 계기됨에 따라 선생은 이여산 동지와 함께 천진에 잠입하여 일군 유송선 15,000톤급 일척을 일청기선 부두에서 투탄대파하고 일군 병영 및 일총영사관에 투탄하여 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4266년 3월 왜적이 중국 군벌들을 매수코자 주화대사 유길명을 중심으로 일군정요인과 중국정부내 친일 거두들이 상해 갑북에서 회합한다는 정보를 접한 선생은 곧 그들의 회의장소를 습격코자 정화암과 밀의하고 이강훈, 원심창 등과 함께 월 17일 하오 9시 일격진멸하려던 찰나에 적의 불의 습격을 받아 불행히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가 되어 나가사끼형무소에서 사형구형을 받고 수감중 4269년 5월 20일 상호 천추의 한을 품은채 옥중 위혼이 되니 향년 39세요 혁명투쟁 십유오년에 집에는의려지정으로 폐망된 자당윤씨와 미망인 조씨 및 유고 현이 있을 뿐 분전편토의 유산도 없었다.

단기 4289년 2월 일
동 지 이정규 근선 / 장흥인 고광은 근서

鷗波 白貞基義士 追慕碑文

백정기의사는 서기 1896년 음력 1월 19일 부안군 동진면 하장리에서 부친 백사순씨와 모친 윤옥문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의사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직하고 활달하였으며 또한 청명하여 청년시절에 주경야독으로 사서에 통달하였다.
의사는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1907년 정읍군 영원면 은선리로 이사하여 1909년 영원면 앵성리의 조팔락씨와 결혼하였다. 의사는 일제에 빼앗긴 조국의 운명을 개탄하면서 애국심에 불타는 동지들을 모아 우리는 독립을 위해 피흘려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1919년 민족자주갱생의 횃불인 3.1운동이 폭발하기 직전 동지들과 함께 죽음으로 항쟁할 것을 맹세하고 만주 심양으로 떠났다.
1920년 경성으로 돌아와 지하운동을 하다가 이듬해 봄 동경경찰서에 구속되었으나 광부로 위장하여 석방되었다. 1923년 일왕을 주살할 계획으로 동경에 들어갔으나 불의의 동경 대지진과 왜병의 탄압과 감시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듬해 북경으로 돌아왔다. 1924년 의사는 재중국 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하고 이회영, 정화암, 이을규, 이정규 등과 함께 정의공보를 발간하였다. 한편 상해에서 영국인이 경영하는 철공장 직공이 되어 중국 동지노검파 대만 동지 범본량, 아나키스트 연맹과 손을 잡고 노동자의 사상계몽에 진력한 결과 의사를 따르는 군중이 십만을 헤아렸다.
1927년 남경 상해등지에 있는 조선 중국 동지들을 모아 복건 천주 등지에서 농자위군으로 민남25현민단편려처를 조직하여 공산군과 지방토비에 대하여 수비를 강화하고 농민자치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남경에서 조선, 중국, 일본, 필리핀, 안남, 인도 등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했을때와 1930년 재북만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했을때도 의사는 조선 대표의 한사람으로 참석하여 일제 탄압의 만행을 규탄하고 독립의 정당성을 세계 만방에 호소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의사는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화남 아나키스트연맹 흑색공포단(B.T.P)을 조직하였으며 이연산 동지와 천진에 들어가 폭탄을 던져 1만5천톤급 일본 수송함을 대파하고 왜군 병영과 일본총영사관을 폭파하였으니 결사항일의 투혼은 크게 빛났다.
1933년 3월 17일 의사는 일본이 중국 군벌들을 매수하기 위하여 아리요시아끼 재중일본공사가 마련한 상해 무창로에 있는 육삼정이라는 일본 요정에 일군정요인과 중국의 친일거두들을 초대하여 대연회를 갖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즉시 정화암과 밀의한 후 이강훈 원심창 동지들과 함께 그날 밤 9시 일격 전멸을 시도했으나 적의 역습을 받아 체포되었다. 그 뒤 일본 장기법원에서 무기형을 받고 복역 중 1934년 6월 5일 밤 11시 일번 장기형무소에서 39세의 일기로 순국하셨다.
의사의 유해는 해방이 된 다음해야 조국의 품에 안기셨으니 1946년 정부에서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오늘 이 비를 세우는 뜻은 의사가 남기신 숭고한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그 분을 추모함이며 구파백정기의사 기념사업회의 간절한 염원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의사는 가셨지만 그 분이 남기신 항일독립투사로서의 우국충절과 애국혼은 우리 민족의 가슴 속에 영원할 것이다.

서기 3003년
글: 운정 김동필, 글씨 우산송하경

鷗波 白貞基義士 創建紀念碑

의열사는 항일투사 구파 백정기의사를 봉안한 사우이다.
의사는 서기1896년 1월 19일 현 부안읍 신운리 운기마을에서 아버지 수원백씨 남일 자 사순과 어머니 파평윤씨 옥문의 장자로 출생하여 12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그해 1907년에 현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 갈선마을로 이사하여 성장했다. 의사는 편모슬하의 가난한 가정환경속에서도 어려서부터 한문을 수학 사서를 통달하였고 마침내는 당시 어려운 시국을 깨닫기에 이르러 일본어를 익히기 시작했으니 그것은 앞으로의 활동을 전개하기 위한 준비였다. 의사는 민족의 앞날을 개척하는데 젊은이들의 각성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한때 계몽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이 있은 후 서울로 올라가 활동을 하다가 중국 심양과 북경을 내주하며 이곳을 활동의 근거지로 삼았다.
1923년 6월 일본동경으로 건너가 자유활동을 하면서 노동관계서적을 탐독하여 정치지견을 넓혔다. 그해 9월 동경 대지진으로 말미암아 중국북경으로 돌아왔다. 1928년 9월 중국남경에서 열린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 창립대회에 조선대표의 한사람으로 참석하였고 기관지 동방의 편집인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1930년 10월에는 북만주로 들어가서 동지들과 자유혁명자연맹을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31년 11월에는 일제의 대륙침략이 점점 도를 더해가자 의사는 오만목, 이강훈, 원심창, 이달, 김기강, 유기문, 진수방 중국인 전화민 일본인 좌야일랑 등과 흑색공포단이라는 결사대를 조직하여 천진으로 가서 일본 운송선을 폭파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1933년 3월 17일 일제대륙침략의 원흉들을 당시 주중공사 일본 유길명이 외교적 침략으로 중국의 정계요인과 일본군벌들을 상해공동조계문로에 있는 일본료정 육삼정으로 초청하여 연회를 베푼다는 사실을 탐지하고 이강훈, 정화암, 오세민 일본인 시전부 등과 그들을 폭살하려는 계획을 추진중 이날 현장에서 피체되었다. 그 후 일본 장기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형을 받고 일본장기형무소에서 복역중 1934년 갑술 음 4월 27일 양 6월 5일 옥중에서 서거하니 향년 39세였다. 광복 후 1946년 7월 6일 유해를 일본 장기에서 효창공원 삼의사묘역에 옮겨 국민장으로 안장되었다.
의열사는 1996년 10월 2일 사단법인 구파 백정기의사기념사업회가 발족하여 다음해 의사고택근지인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 928번지 주변토지 5939평의 터를 닦아 1997년 10월 31일 기공하였다.
무려 7년여에 걸처 국비 20억원 도비 13억5천만원 시비 18억5천원 보조로 사당, 강당, 기념관 등을 완공함에 그 규모가 자못 괄목하고 남음이 있으니 이는 의사의 열렬한 애국정신을 추모함이요 나아가서 민족애의 표징인 것이다.

서기 2003년 11월 일
구파 백정기의사기념사업회 수 / 최현석 선 / 지암 유승훈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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