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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군리 향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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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군리 향약

  • 소재지정읍시 신태인읍 육리

상세정보

태인(泰仁)은 옛날로부터 선비의 고장으로 유학 연원(儒學淵源)이 깊은 곳이다. 신라(新羅) 말엽 태산(泰山) 군수(郡守)를 지낸 최치원(崔致遠:孤山)을 비롯되는 것으로 8년 동안 재임중 그가 소요한 유상대 유적(流觴臺 遺跡)이 있었으며 조선조(朝鮮朝)에서는 정극인(丁克仁:不憂軒)이 남전향약(藍田鄕約)으로 그 맥을 이었다.
이항(李恒:一齊)은 성리학(性理學)으로, 신잠(申潛:雲川)은 사부학당(四部學堂)을 세워 유학을 일으켰으니, 이것이 바로 태인유학의 뿌리이고 전통인 것이다.
그 뒤에도 송세림(宋世琳:訥菴), 김성제(金誠齊), 송정십현(松亭十賢)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왔다.
장군리(將軍里) 향약(鄕約)은 태인의 이런 오랜 전통에서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이 지방에서는 태인 고현향약(泰仁 古縣鄕約)은 잘 알려져 있으나, 장군리 향약은 이 근래에 발견된 것으로 한 지역내에서 두 곳에 향약원본(鄕約原本)이 보존되었다고 하는 것은 태인지방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장군리 향약은 120년동안 계속되어 오다가 고종(高宗)때인 갑오년(甲午:1894년 甲午東學革命이 나던 해) 이후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나 향약지(鄕約誌)는 역대 이장(里長)들에 의해서 잘 보존되어 전해 온 것은 참으로 대견한 일이다.
지금은 마을 이름이 將軍里이라 부르지만 옛날의 第六將軍里이다. 그 연혁(沿革)을 개략 살펴본다면 원래 이 지역은 인의현(仁義縣·高麗)으로 내려오다 조선 태종(太宗 9年;1427) 태산현(泰山縣 七寶地方)과 합하여 태인현(泰仁縣)이 되었다. 이곳은 태인현 용구산면(泰仁縣龍口山面)과 합하여 용북면(龍北面)이 되었다가 1933년 신태인면(新泰仁面)으로 개칭되고 1939年 읍(邑)으로 승격되었다.
第六將軍里란 명칭은 어데서 유래한 명칭인지 알 수 없으나 통칭 將軍里로 불리워 온 것 같다. 정조(正祖)때 편찬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도 용산면(龍山面 將軍里)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용구산면(龍口山面)은 용산면(龍山面)으로 제육장군리(第六將軍里)는 장군리(將軍里)로 통칭해온 것이다. 뿐만 아니라 향약안(鄕約案)에도 두 번째 개정한 고종(高宗) 17년의 향약안(鄕約案)에는 용산면 장군리(龍山面 將軍里)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將軍里內에는 용구동(龍口洞) 서당(書堂)골. 서두골. 동아시. 향교(鄕校)골 등 다섯 뜸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 명칭들이 모두 將軍里의 어떤 역사성(歷史性)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龍口洞이란 동명(洞名)인데 將軍里의 서편(西便)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는 이곳에 (조금 더 아래 지점) 꽤 큰 못이 있었는데 이를 용마(龍馬)샘이라 했다. 將軍이 타고 다니는 龍馬가 물을 먹는 샘이라고 촌로(村老)들은 이야기한다. 이것이 용구(龍口)의 유래요 또 이곳에서 북쪽으로 구릉(丘陵)의 고지(高地)가 있으니 이를 용구산(龍口山)이라 일러온 것 같다. 그러니까 將軍里는 將軍이 나서 龍馬가 있고 龍馬샘이 있다는 것이다. 또 鄕校골이란 명칭은 대개 옛날 鄕校가 있었던 곳을 이름인데 여기에 鄕校가 있었단 말인가? 당산(堂山)집이 있는 서편(西便)의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는 뜸이다. 인의현(仁義縣)의 고을터는 백산리(栢山里·新泰仁邑)였고 거기에는 “향교골”이 있다. 그리고 서당(書堂)골 역시 그렇다. 옛날 서당이 있었던 곳이다. 또 “동아시”, “서두골”은 어떤 의미의 명칭인지? 將軍里의 위치와 마을의 명칭으로 미루어 어쩌면 泰仁縣의 서학당(西學堂)이 있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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