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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유적

신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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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잠비

  • 종목전북특별자치도 문화재자료 제105호
  • 시대조선 중종 39년(1545년)
  • 소재지정읍시 태인면 태창리 91

상세정보

현감(縣監) 신잠(申潛)은 조선(朝鮮) 초기(初期)의 명신(名臣)이다.
고령인(高靈人)으로 자(字)는 원량(元亮)이고 호(號)는 영천자(靈川子) 또는 아차산인(峨嵯山人)이다.
삼괴당(三魁堂) 종호(從濩)의 아들로 1491년인 성종(成宗) 22년(辛亥)에 태어났다.
1519년이던 중종 14년(己卯)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한림(翰林)에 선발 되었다.
1521년이던 중종(中宗) 16년(辛巳)에 안처겸의 옥사(獄死)에 관련되어 장흥(長興)에 귀양 갔다가 17년만에 양주(楊州)로 옮겨 주거(住居)의 편리(便利)만은 용서받았다.
그 뒤 1543년인 중종(中宗) 38년(癸卯)에 태인(泰仁) 현감(縣監)으로 부임하여 6년 동안 있으면서 많은 치적(治積)을 남기였다.

4부학당(四部學堂)을 세우고 유학을 권장하여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그러다가 간성(杆城) 군수(郡守)로 떠나니, 명종(明宗) 4년(己酉) 이던 1549년에 지방 유 림(儒林)인 김 원(金 元), 백삼귀(白三龜) 등의 발의(發議)로 이 비(碑)가 세워진 것이다.
자연석 좌대(座臺) 위에 세워진 선정비(善政碑)는 오랜 세월로 풍우(風雨)에 닳아 없어지 고 석질(石質)의 변화로 문자(文字)를 알아보기가 어려워 졌다.
비(碑)의 규모(規模)는 90㎝의 좌대석(座臺石) 위에 비석(碑石)의 높이가 189㎝이고, 넓 이는 81㎝이며, 두께는 19㎝이다.

비문(碑文)은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이 지은 글이다.
신 잠(申 潛)은 간성(干城) 군수를 거쳐 상주(尙州) 목사(牧使)로 역시 그곳에도 선정을 베풀었다.
그는 문장(文章)이 밝고 글씨에 능(能)하여 초·예서(草·禮書)에 뛰어 났었다.
그림에도 재능이 있어 난죽(蘭竹)을 잘 그렸다. 유집(遺輯)이 약간 있으며, 설중기려도 (雪中騎驢圖)는 유명한 그림으로 덕수궁 박물관에 보관 되어 있다.

신잠 비문(申潛 碑文)

새 그믈을 치고 대밭집에 한가히 있음에 베옷에 띠 두루고 기뿐 얼굴로 자기를 소개 하면 서 보기를 원하는 두 선비가 있으니, 김태학생원과 백태학생 삼귀였다.
우리는 태인 고을에 여러대를 살았다면서 신잠 군수의 행적을 말하였다.
이 고을은 교통이 혼잡한 곳으로 인가는 드물되 일은 많아서 부역이 자주있고, 조세 부담 이 무겁다. 느추면 예산이 부족하고 서두르면 원망이 심하니, 둘 다 병이되는 사리를 깨닫 고, 신군수가 갑진년 상방기에 먼저 읍민의 폐해를 개혁할 법을 세우고, 읍민을 무마하며, 송사에 삼가고 자기는 엄하게 다스리며 사람을 대하는 것을 너그러이 하니, 읍민이 기꺼이 따르다.

‘자유가 무성군수로 읍민을 예로서 가르치니, 공자가 기뻐하시다’의 명언을 본받아 이 러함이 백성 다스리는 좋은 법인데 형법으로 엄하게 백성을 억누르니, 순후하고 아름다운 풍습이 드물게 되었다. 어찌 법으로만 하리오.
학문을 이르키고 풍습을 변화 시킴에 뜻을 하고 마을에 서당을 세우고, 서책을 인쇄하여 나누어 주고, 녹미를 남기여 스승을 맞아 고을의 준수한 자제를 가르치고, 고아와 과부를 구휼하며 절개와 의리를 숭상하여 염치를 갖게하며, 순후하고 독실한 행동으로 과오를 범치 않게 하니, 호협하고 교활하던 벼슬 하는 사람들이 목을 움추리고 마음을 고쳐 착한 행동을 하게 되어 차차 고을이 잘 다스려졌다.
거처하는 방 벽에 청렴, 신중, 근면을 대서하여 부쳐 좋고 벼슬하는 법도는 삼으면서 동 편에 집 수칸을 얽고 틈이 나면 군민과 더불어 거문고 치고, 시를 읊어 속세의 진애를 물리 쳤다.

옛날 신라말에 최문창 고운이 힘써 이 고을에 있었던 유풍이 남아 있으며, 지금도 사람의 마음을 상쾌하게 한다.
우리 신 군수의 시문의 재주와 흉금의 지혜가 천년전의 최고운과 같으며, 읍민이 사랑하 고 부러워 함이 최고운에 뒤짐이 없다.ㅍ 신 군수의 이름은 잠이요. 자는 원양이며, 고령인으로 조선조 정승을 지낸 숙주의 증손이 며, 삼괴선생 호종의 아들로 가훈을 받들고 가업을 이었으며, 문장과 서화를 세상에서는 삼 절이라고 칭송하였으니, 찾아와 배우고자 한 선비가 문 앞에 가득하였다.
이제 관직이 만료되어 떠났으나, 군민을 다스리는 것은 교묘한 포용으로 공적이 많았다.
군민의 노소가 망설이지 말고 돌을 갈고 선정의 치적을 색겨 거리에 세우기로 회의 하고, 나에게 기문을 청 하였다.

원양의 치적이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 가르쳐 한나라 벼슬을 하는 사람이 지방군수로서 정 사를 잘 함으로써 이름을 얻었다. 내가 늙고 졸열하여 어찌 기문을 지어 여러사람을 만족하 게 하리오 만은 원양은 계유년 진사 시험에 합격한 동문생이며, 시산과 나의집 거리가 머나 잘하는 정사를 고을 사람들이 많이 칭송하며, 또 역사들이 대서 특필한 서책들이 한둘이 아 니어늘 어찌 나의 글이 필요하리요 만은 두 선비와 마을 노인들의 요청을 사양치 못하고, 또 뒤에 부임할 군수에게 모범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가정기원 二十八 년 창룡기사중춘개망승전대부전의
정부좌찬성겸의금부사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오위도총관세자이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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