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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죽서원 동죽서원 동죽서원 동죽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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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죽서원

  • 종목전북특별자치도 문화재자료 제77호
  • 시대1960년
  • 소재지정읍시 덕천면 학전길 32-57

상세정보

1959년에 지방 유림(儒林)들 발의하여 다음 해인 1960년(庚子)에 창건(創建)하고, 3월 19일에 사우(祠宇)를 건립하고 제사를 모셨다.
1961년(辛丑)에 강수재(講修齋)를 세웠으며, 1972년(壬子)에 외신문(外神門)을 홍살문(紅箭門)은 1977년(丁巳)에 세웠다.
본 원에 향사(享祀)하는 제현(諸賢)으로는 성리학자(性理學者)인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와 정암의 문하(門下)에서 수업(修業)한 덕촌(德村) 최희정(崔希汀) 두 분을 봉안(奉安) 하고 있다.

1959년(乙亥)에 지방유림(地方儒林)들의 발의로 다음해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1962년 (壬寅) 4월 6일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덕촌(德村) 최희정(崔希汀)을 제사(祭祀) 지내 고 있다.
본원(本院)은 1960년 창건(創建)하여 내삼문(內三門. 正義門)을 세웠으며, 1961년에 강당 인 강수제(講修齊)를 세웠으며, 1972년 외신문(外神門. 八德門)을 세우고, 1977년에는 홍살 문(紅箭門)을 세웠었다. 직사(直舍)는 세칸(三間)이 별도로 있다.
원래 서원은 선현존경(先賢尊敬)과 후진장학(後進奬學)을 목적으로 하였으니, 장래성이 많은 청년들이 모여 수학(修學)하는 도장(道場)이다.

숨어서 뜻을 구(求)하는 선비와 도(道)를 밝이고 학업을 딱는 사람은 대개 세상의 번거로 움을 싫어하여 서책(書冊)을 지고 고요한 곳을 찾아 선현(先賢)의 도(道)를 흠모(欽慕)하여 그 덕(德)을 쌓고 그 인(仁)을 익히기를 생각하고 이것으로 락(樂)을 삼기 때문에 서원(書院)으로 나가는 것이다.
국학(國學)이나 향교(鄕校)가 복잡한 곳에 있고, 학령(學齡)의 제한이 있어 자유롭지 못 하였다.

서원은 산수(山水) 좋고 고요한 곳에 세워진 것으로 여기 모여서 잡념(雜念)을 버리고 정 신을 가다듬어 얼마든지 자유롭게 수양할수 있다.
서원(書院)이 선비와 학문(學問)이 있는 곳이고 본다면, 국가(國家)에서도 인재(人才)를 얻는 데에는 학교(學校. 鄕校)보다 좋다고 보고 그를 장려하였던 것이다.

제사 받는 사람

조광조(趙光祖)

한양인(漢陽人)이다. 자(字)는 효직(孝直)이며, 호(號)는 정암(靜庵)이다.
성종(成宗) 13년인 1482년(壬寅)에 세상에 태어났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門人으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개혁정치(改革政治)에 힘썼으며 유명한 성리학자(性理學者)이다.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죽음(賜死)을 당하니, 1519(己卯)년인 중종(中宗) 14년이다.
뒤에 영상(領相)에 증(贈)하고 문정(文正)의 시호(諡號)가 내렸다.

최희정(崔希汀)

전주인(全州人)이며, 자(字)는 정치(汀之)이고, 호(號)는 덕촌(德村)이다.
1484년인 성종(成宗) 15년(甲辰) 2월 10일 고부군(古阜郡) 우덕면(優德面. 지금의 德川面)에서 츨생하였다.
일찌기 조정암(趙靜庵)의 문하생(門下生)으로 수업하여 1510년인 중종(中宗) 5년(庚午)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한 후, 여러 내직을 거쳐 1516년인 중종(中宗) 11년(丙子)에 중시 (重試: 조선때 10년마다 한번씩 문무(文武) 당상관에게 보이던 과거, 거기에 합격하면 官品 이 승급한다.)

조정암(趙靜庵)의 천거로 종성판관(鍾成判官)이 된 그는 여진(女眞) 정벌(征伐)에 전공 (戰功)을 세우고, 신병(身病) 때문에 고향에 돌아오니, 논공행상(論功行賞)으로 1518년인 중종(中宗) 13년에 고부(古阜) 동축산(東竺山)을 하사(下賜)하였다.
스승 조정암(趙靜庵)이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수명(受命. 死刑)하자, 종일 통곡하고 용망 호서(龍亡虎逝)라는 시(詩)를 짓고서는 세상일을 단념하고 지냈다.

1529년인 중종(中宗) 24년(乙丑) 12월 13일 세상을 떠나니, 그의 나이46세이다.
1814년인 헌종(憲宗) 10년(甲辰))에 서산사(書山祠, 梨坪面 書山里, 高宗 5年에 없어짐) 에 배향(配享)하였다.
1880년인 고종(高宗) 17년에 병조참판(兵曹參判)의 증직(贈職)을 내렸다.

동죽서원 묘정비명(東竹書院 廟庭碑銘)

예적 乙亥년에 호남의 선비가 정읍 고을 東竹마을에 東竹書院을 세우고, 四년 뒤인 壬申 년에 文正公 靜庵 趙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선생의 문인 德村 선생 崔希汀을 배향하였다.
금년 戊申년에 묘정비를 세우면서 나에게 記文을 청하여 간절하게 사양하지 못하고 여기 에 기문을 적는다.

聖賢의 道가 땅에 떨어진지 오래되어 孔子와 孟子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니, 이는 하늘의 氣運이 박절함이다.
소인배의 모합으로 선생이 참화를 입어 선비들의 원한이 컸었다.
선생은 絶世의 재주와 적용의 學問으로 처음 벼슬을 하면서부터 중묘 조정의 퇴폐한 풍습 을 바로 잡으면서 권세에 추종하지 아니하며 위협에도 屈從하지 아니하고, 先王이 정치하던 법으로 하다가 不幸하게 정승 판서의 자리에 있는 무리들이 임금에게 모함하여 착한 선생을 괴수로 타도하여 이세상에 바른 政治를 보지 못하게 하고 백성에게 올바른 善政의 惠澤을 받지 못하게 하였다.

슬픈 일이로다! 그러나 天道와 人心은 공정하고 無私함으로 선생이 서거한 후 조정에서 신원을 보하고 儒林들이 그를 사모하여 향교에서 祭祀를 모시었다.
선생의 道가 生時에 막혔으나 後世에는 열리었다.
덕촌공은 資質과 稟?塚?淸純하고, 才質이 英敏하여 정암 선생의 門人으로 지결을 얻어 들었으며 일찍 大科에 及第하여 요직을 두루 거치고 女眞이 침입하여 올 때 鍾城 判官을 제 수받고 기발한 전술로 그들을 토벌하여 승리한 功勳으로 朝廷에서 東竹山일대를 특사하여 褒賞하였다.

이는 정암 선생이 賜藥을 받고 서거함을 슬퍼하고 다시는 벼슬에 나가지 아니하여 선생을 사모하는 弟子로 부끄러움이 없었으니, 오늘 先生의 祠堂에 배향하는 것이 마땅하다 할 것 이다.
이제 여러선비가 즐러운 마음으로 祭祀를 드리니, 어두운 세상에 밝은 조짐이라도 온 것 같다.
여러 선비들을 어제 할 일을 다했다 하지 말고, 서로 힘을 모아 學問을 講論하여 春秋大義를 밝히면 世俗이 교화되어 선생의 道가 行하여저 이 書院이 무궁할 것이다.
하늘이 우리나라를 도와 문정공을 세상에 내시었다. 문정공의 순수한 德과 정수한 學問이 조정을 바르게 하고 이 세상을 바르게 하였으니, 어찌 간사함이 공정함을 害하리요.
크게 떠들어도 하늘의 뜻을 얻지 못하고 公議를 바르게 하여 천리가 밝혀지고 人心이 바 르게 잡아졌다.

덕촌 선생의 道가 바름으로, 벼슬에 나가고 물러남이 바르고, 스승의 가르침을 버리지 아 니함도 바름이요. 이 祠堂에 祭祀지내는 것을 論議하는 선비도 역시 바른 것이다.


後 學 恩 津 宋 在 晟 謹撰
後 學 安 東 金 正 會 謹書

戊 申 九月 日 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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