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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유적

송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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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산사

  • 시대조선시대
  • 소재지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산 4

상세정보

1788년(正祖 12年) 창건하여 김대립(金大立) 김응빈(金應贇) 김정(金濎) 김감(金堪) 김금(金汲) 송치중(宋致中)을 향사(享祠)하였는데 1868년(高宗 5年 戊辰)에 정부의 영에 의하여 헐렸다가 1954년 송산(松山, 詩山里)에서 성황산(城隍山) 동편에 중건(重建)하였다.

향사인물(享祠人物)

김대립(金大立 : 1550∼ )

관 도강(道康), 자 신부(信夫), 호 월봉 또는 쌍백당(月峰 雙柏堂) 김관(金灌)의 아버지다. 일찍 이일제(李一齊)의 문인으로 덕행이 있어 사포서(司圃署) 별제(別提)를 제수받았다. 그리고 향리(鄕里) 성황산(城隍山) 동쪽에 호호정(浩浩亭)을 세워 문우(文友)들과 학문을 강론하는데 때마침 정여립(鄭汝立)이 그 근처에 정자를 지었기 때문에 호호정을 헐어 버렸다. 임진란때 김복억(金福億) 김후진(金後進) 등과 창의(倡義)하였으며 광해 폭정(光海 暴政)에 출세를 단념하고 종제(從弟) 김응빈과 결사회적(結社晦跡 : 숨어 나타나지 않는 단체)하니 이른바 7광(七狂)중 한분이다.

김응빈(金應贇 : 1553∼1632)

자 겸언(兼彦), 호(號) 오무재(悟無齋) 또는 월림(悟無齊, 月林), 관 도강(道康)이다. 복억(福億)의 둘째 아들이요. 김약묵(金若默)의 손(孫)이다. 제용감(濟用監) 봉사(奉事)를 제수했으나 나가지 않고 광해폭정에는 종형(從兄) 김대립과 같이 결사회적(結社晦跡)했다.

김 정(金濎 : 1587∼1632)

자 여심(如尋), 호 췌세(贅世), 관 도강(道康) 판관(判官) 김응길(金應吉)의 큰 아들이다. 어려서는 삼종숙(三從叔)인 김대립의 문하에 있었으나 뒤에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과거(科擧)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性理學)에 정진하여 후진교육에 힘썼다. 친상(親喪)에 시묘(侍墓)하였고 광해군 폐모(光海君 廢母)에 항소(抗訴)하였으나 뜻을 못이루고 결사회적인 7광중의 한사람이다. 조봉대부(朝奉大夫) 동몽교관(童蒙敎官),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에 증직(贈職)되었다.

김 감(金堪)

호 부휴재(浮休齋), 관 안동(安東), 벼슬이 세마(洗馬)에 이르렀으나 광해군 폐모(光海君 廢母)에 이상향(李尙嚮) 김정(金濎)과 더불어 항소하다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와서 결사회적하였다.

김 급(金汲: 1591∼1643)

관 도강(道康), 자 군인(君引), 호 만오재(晩悟齋), 1591년(宣祖 辛卯) 8월 15일 태인에서 출생 일찍이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벼슬이 선교랑(宣敎郞)사포서 별제에 올랐으나 광해난정(光海亂政)때 큰형 김정과 항소하다 여의치 못하여 송정(松亭)에 회적(晦跡)하고 세칭 7광이 되었다. 1643년(仁祖 21年) 5월 21일에 돌아가다.

송치중(宋致中)

관 여산(礪山), 호 호암(壺菴), 태학관(太學館)에 있을 때 광해난정(光海難政 光海 5年)이 나자 이상향(李尙響) 김정(金濎)과 항소하고 마침내 태학관을 퇴학한 후 송정(松亭)의 7광이 되었다. 뒤에 인조반정(仁祖反正)에서 벼슬이 첨정(僉正)에 이르고 고을의 수령(首領)을 지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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