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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단칼에 여인(女人)은 가고
작성자 관리자

조선 영조(英祖) 4년에 태인(泰仁)에서 소위 모반(謀叛 : 왕실을 뒤집어 엎을 것을 꾀하는 일 즉 역적도모)이 일어났다.
그 당시 태인 현감으로 있던 박필현(朴弼顯)이 주동이 되고 그의 사촌되는 박필몽(朴弼夢)과 나주(羅州)에 사는 나숭대(羅崇大), 고부(古阜)에 사는 김일경(金一鏡)이 함께 작당이 되어 모반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런데, 숙종의 총애를 받던 후궁 장희빈(張禧嬪)의 동생 남편이 박필몽이었다.
그랬으니 박필현, 박필몽은 장희빈의 후광으로 왕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면서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고 살았다.
그러는 동안 궁녀를 죽이려는 잔인무도한 행위를 한 장희빈에게 사약(賜藥)이 내려지고 인현(仁顯)왕후를 다시 궁으로 돌아오게 했다.

장희빈이 죽자 박필몽과 박필현은 우울한 가운데 살았으며 조정에 대한 불만 불평이 충만했다.
숙종이 돌아가고 장희빈의 소생인 경종(景宗)이 왕위에 오르자 이제껏 소외되어 시골에서 놀며 세월만 보내던 박필몽은 옥구 현령(군수)으로 발령되고 박필현은 태인 현감이 되었으니 이들의 기쁨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영달과 기쁨도 오래 갈 수는 없었다.
경종이 왕위에 오른 지 4년 되던 해에 세상을 뜨고 말았으니 그 뒤를 이어 받은 사람이 궁녀 최씨의 소생인 영종(英宗)이었다.
영종이 즉위하자 박필현, 박필몽의 무리들은 불만이 대단하여 항의 소동을 벌였다.
현재의 왕은 숙종대왕의 친아들이 아니라고 세상에 허위 선전을 하며 후계를 이을 왕으로는 완풍군 단(完豊君 坦 : 소현세자의 3대손)이라고 이를 추대하고 반란을 도모하였다.

이 사건으로 나숭대, 김일경은 즉시 체포되어 죽었고 박필몽은 부안(夫安) 지방에서 크게 패하여 그의 아들과 함께 무장(茂長)의 죽도(竹島)에 숨어 있었는데 무장현 장교인 손익도(孫益道)에게 잡혀 서울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박필현이 김일경의 아들 김영해(金寧海)와 함께 수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전주성(全州城)을 공략하고자 금구(金溝)에 도착했을 때였다.
큰 길 위에 상을 갖다 놓고 물 한 그릇을 떠놓고 소복을 입은 여인, 그녀는 머리를 풀어헤친 채 대성 통곡을 하고 있었다.
앞에 가던 군대가 단칼에 여인의 목을 베니 튀기는 핏속에 여인의 머리가 떨어졌다.
참으로 원통하고 비참한 일이었다.
그 연유라도 물었어야 인간의 도리 아니었을까? 말 한 마디 남기지 못한 최후를 마친 여인의 애달픈 영혼은 어디서 위안을 받아야 할 것인가? 그는 누구였더란 말인가?

여인을 죽인 병사가 박필현에게 즉시 보고하자 불길한 징조라하고 다른 길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돌아갈 길이 없노라고 보고가 떨어지자 박필현은 산을 뚫어 새로운 길을 내라고 추상같은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새 길을 내고 돌아갔으니 지금의 금구 청동원(靑銅院) 가는 길이다.
그때 전주 감영에서는 박필현의 입성(入城)을 기다리고 있었다.
박필현의 군대가 들어오자 잠복했던 군대가 이들을 완전히 격파하고 두목들을 생포했다.
박필현은 전주성에서 잡힐 때 모든 군대 비밀 문서를 태우고 혀를 깨물고 도피했다고 한다.
나중에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새 길을 만들어 가도록 한 계략을 제시한 것은 당시 14세의 금구 통인(通引 : 조선조 때, 지방 관아의 관장(官長)앞에 딸리어 잔심부름하는 사람)이었다 한다.
이리하여 박필현의 난(亂)은 끝났다.

박필현 부자는 끝내는 고산(高山)을 거쳐 경상도 상주(尙州)로 도피했다가 상주영장(尙州營將) 한간(韓揀)에게 체포되어 상주진(尙州鎭)에서 참수(斬首)하여 서울에서 효수(梟首 : 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아 놓던 처형)했다.
인간의 내면에는 선(善)의 샘이 솟아 나온다고 했다. 샘은 파기만 하면 맑은 물이 솟는 법, 여인의 목을 벤 병사에겐 샘조차 말랐더란 말이냐?

 

자료제공:[ 정읍의 전설 ] 김동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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