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시 상평동 모촌(井邑市 上坪洞 茅村) 부락에 고암서원(考巖書院)이 있다.
고암서원은 조선조 숙종 15년(1689년)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선생이 정읍(井邑)에서 수명(受命)한 후 6년이 지나 무고(無辜)함이 밝혀져 유림(儒林)들의 상소로 숙종 21년(1695년) 8월에 창건되어 11월에 고암(考巖)이라 사액(賜額)되었다.
정조(正朝) 9년(1785년) 10월 민치겸(閔致謙) 등 유림들의 상소로 우암 선생의 수제자인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를 배향(配享)하였다.
그러나, 고암서원은 고종7년(1871년) 조령(朝令)에 의하여 헐리고 말았다.
그 자리에 이재(李縡) 찬(撰)의 묘정비(廟庭碑)만 남아 전하자 보호각을 지어 현재까지 보존하여 오고 있다.
고암서원은 상평리 모천(茅川)부락 뒷편 태봉산 줄기 아래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고암서원 바로 옆(고암서원 묘정비에서 서쪽으로 15m지점)에 용정(龍井)이라는 샘이 있다.
용정 바로 옆에 용정에서 나가는 물줄기를 받는 보조 역할의 샘이 또 있어 샘이 두개인 셈이다.
용정(깊이 : 1m)은 아주 얕은 샘이지만 물은 바위틈에서 나오기 때문에 지극히 맑고 시원하다.
보조로 있는 샘(깊이 : 1m)은 보조대가 없어 맑은 물이 지표면을 넘어 철철 흐르고 있어 보기에도 시원스럽다.
용정은 수 백년의 역사를 간직한 샘이다.
동네에 불행한 일이 있으면 이 용정은 별안간 물줄기를 감추고 바싹 말라 버린다.
고종 7년(1871년)에 조정의 명령으로 고암서원이 헐리게 되었을 때에도 그 직전에 용정은 물이 말라 버렸다.
뿐만 아니라 헐리기 전날 밤, 고암서원 집터 땅 밑에서는 북소리가 들려오고 초저녁부터 날이 새기까지 닭이 울고 있었다 한다.
이 마을에 사는 노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용정의 맑은 물이 말랐을 때를 여러번 보아 왔다고 한다.
십여년 전에도 용정이 말랐는데 동네 사람들이 마을 뒷산을 뒤져 몰래 쓴 묘를 파냈다 한다.
용정이 물이 한번 마르게 되면 그대로 두어서는 몇 달이 지나도 물이 고이지 않는다.
다른 곳에 가서 물줄기를 달아 와야 물이 다시 나오게 된다고 한다.
용정이 마르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서 파묘(破墓)를 한 다음 샘에 제사를 지내고, 엉골이라는 산골(마을에서 500m 지점)에 가면은 물이 고인 옹달샘이 있는데 그 물을 옹기병에다 담아 가지고 온다.
올 때에는 옹기병의 병목을 솔잎으로 틀어막고 거꾸로 들고 오면은 물이 몇 방울씩 떨어진다고 한다.
그 떨어지는 물을 보면서 용정까지 와서 옹기병에 남은 물을 용정에 붓는다.
그러면 며칠후부터 용정은 다시 물줄기를 회복하여 맑은 물을 토해 낸다.
필자가 이 용정을 보기 위해 갔을 때(서기 1991년 7월29일)마을의 어느 할머니는, 불과 3년전에도 용정이 물이 말라 동네의 큰 걱정이었는데 역시 뒷산에서 몰래 쓴 묘를 파 없애고 물을 달아 왔다고 전해 주었다.
고암서원 바로 옆에 살면서 이 서원을 보살피고 자기 집처럼 알뜰하게 관리해 주고 있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이 허기경(許棋炅 : 57세)씨다.
이 서원 옆집에서 30여 년을 살았다 한다.
그 분의 말에 의하면 6·25전까지만 해도 고암서원의 집터에서 밤에 가끔 북 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고암서원 지금(1991년 7월 현재) 옛 빈터에 복원(復元) 작업이 한창이다.
주춧돌을 놓고 큰 기동과 들보를 톱질하고 깎고, 주위까지 깨끗이 손질되고 있다.
그러나, 용정의 샘물은 지금도 맑다.
허구한 날의 아픔의 역사를 고이 간직한 채 맑고 깨끗한 청강수를 잘도 뿜어 놓는다.
용정은 답답하고 무더운 여름날에 한 번 찾아가 냉수를 한 사발 들이 켜면 그 진가를 확인할 수 있다.
자료제공:[ 정읍의 전설 ] 김동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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