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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칠성(七星) 바위와 천하장사
작성자 관리자

정읍천(井邑川) 우회도를 타고 내장산 쪽으로 가다가 정읍(井邑)고등학교 정문 쪽으로 꺾어들면 송산동(松山洞)에 이르는 버스길을 만난다.
송산동 가는 길은 경관이 좋다.
앞에 정읍천이 유유히 흐르고 뒷산이 항상 숲을 이루고 있어 보기만 해도 시원하고 특히 수백 년 된 정자나무가 몇 그루나 되어 여름 풍치가 뛰어난 곳이다.
송사동 가는 길에 접어들어 시기 아파트(정읍고등학교 운동장 앞) 50m쯤 떨어진 곳에서부터 송산동 당산나무 옆 장군석(將軍石)까지는 약 700여m 거리인데 이 사이에 바위 7개가 있다.
이 바위의 이름이 칠성(七星)바위다.
바위가 7개라하여 칠성바위라 부른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 7개의 바위는 수 천년의 사연을 간직한 채 주민들의 보호 속에 그 위치마저도 변경 없이 말없이 놓여 있다.
필자도 이 바위를 직접 가서 보았다.
필자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바위가 7개라서 칠성바위라하는 것도 당연하겠지만 그 7개의 별 즉 북두칠성과 별자리 모양이 비슷했다.
참으로 기이하고 신기한 생각이 들어 이 바위에 얽힌 전설이 더욱 궁금해졌다.
정읍고등학교(운동장 끝에서 남쪽으로 약50m)에서 부터 놓여진 바위의 위치와 모양을 우선 더듬어 본다.

첫 바위는 버스길 오른 쪽에 위치하고 있다.
도로에 접한 논 한쪽에 놓여있다. 현재 정읍시 송산동 유남수(柳南洙)씨가 짓고 있는 논 가장자리에 있는 것이다.
(두께 약 65cm, 둘레 6.5m) 색깔이 까맣고 둥글고 평범한 바위다.
바위 밑에 완만하게 패인 곳이 있는데 여기에서 구렁이가 살았다는 이야기가 뒤에 나온다.
첫 바위에서 불과 약 30m 가면 둘째 바위가 나온다.
7개의 바위 중에서 가장 큰 바위(두께 1.1m, 둘레 11m)다.
이 바위는 너무 크기 때문에 수십 명의 사람이 움직인다해도 꿈쩍도 할 수 없는 그런 바위다.
바로 길가에 있는 바위인데 사람들은 두꺼비를 꼭 닮은 바위라 말한다.
필자가 보아도 두꺼비 모양의 검은 바위였다. 이 바위는 3개의 받침돌로 고여 있는 게 더욱 이상하다.
3개의 받침돌 중, 한 받침 돌 위에는 손바닥 크기의 작은 돌이 포개져 그 큰 바위를 지탱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바위가 고인돌임을 생각해 본다면 신령스런 장사의 힘이 아니고는 수천 년 전에 도저히 옮기지 못했으리라 하는 생각이 든다고 주민들은 말하고 있다.
두 번째 바위에서 조금 올라가면 세 번째 바위에 이르는데 여기에는 바위 3개가 한곳에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길 왼편에 던져져 있는데 3개의 바위 위치 간격은 5m이고 바위의 크기(높이 1m, 둘레 3m)가 비슷하다.
거기에서 약 200m 쯤 올라가면 6 번째의 바위를 만날 수 있다.
이 바위는 길가에서 안쪽에 깊숙이 떨어져 있으며 거북 모양의 큰 바위(높이1m, 둘레 8m)다.

그 다음은 7번째의 바위인데 송산리의 첫 장자나무를 지나 두 번째의 큰 정자나무 옆 장군석(將軍石)이 세워진 근처에 있다.
송산동 마을 사람들이 새마을 사업을 하고 도로를 넓힐 때도 이 돌만은 손대지 않고 위치도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바로 길가에 서있는 가장 작은 바위(높이 1m, 둘레 1.5m)다.
7번째의 이 바위는 여자 장사가 마지막 옮기던 바위인데 둥그스름한 모양이고 한쪽은 오목하게 패인 부분이 있고 다른 쪽은 우뚝한 바위의 기분이 드는 그런 바위다.
그 우뚝한 부분은 하늘을 이고 천 년전의 비화를 생각하는 듯 처량하고도 오묘하게 보인다.
이곳 주민들의 순박한 마음과 조상을 추모하는, 그리고, 아름다운 심기를 지키고 달래주는 그런 바위로 보인다.
백여 년 전의 일이었다.
첫 번째 바위가 있는 논을 유채규라는 분이 짓고 있었다.
논 가운데에 있는 바위이라서 농사를 짓는데 여간 방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수년을 두고 이 바위를 치울 것을 생각했으나 바위가 몇 사람의 힘으로는 들 수 없기 때문에 미루고 수십 년 동안 농사를 지었다.
한번은 농사짓기에 하도 불편하여 이 바위를 치우기로 결심하고 날을 정하고 인부까지 얻어 놓았다. 그런데, 치우기로 받은 날이 오기 전 어느 날밤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유채규 씨가 꿈을 꾼 것이다.
꿈속에 하얀 할머니가 나타나더니
『너는 왜 우리 바위를 치우려하느냐? 그것은 나의 집이다. 바위를 그대로 두어라. 만약 이 바위를 옮기면 불행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이상한 꿈이었다.

그런데, 그 다음 또 꿈을 꾸었다. 이 번에는 엄청나게 큰 구렁이가 나타났는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나의 집이다. 왜 우리 집을 치우려 하느냐? 바위를 그대로 두어라. 그렇지 않아도 내가 진작부터 집을 옮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네가 이 바위를 옮기게 되면 불행을 자초하는 격이 되니 명심하도록 하라.』 하고는 구렁이가 사라져 갔다.
이렇게 두 번이나 꿈을 꾼 유씨는 참으로 기이한 꿈이라며 마을 사람들에게 그 꿈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유씨는 즉시 바위 옮기는 계획을 중지하고 바위 밑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바위 밑이 두리뭉실하게 패인 부분이 있었고 땅 밑으로는 큰 구멍이 깊숙이 나 있었다.
유씨는 이것을 보고 이 속에 구렁이가 살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현재 송산동에서 수십 대를 살아온다는 유금상(柳金相)씨는, 이 동네에서 오래 산 어른들은 생생이 기억하고 있다고 귀뜸해 주었다.
마을이 된 것은 이 칠성바위를 지키는 신령들의 가호(加護)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을 덧붙인다.
그러면, 칠성바위는 어디서 어떻게 옮겨진 바위일까?
지금으로부터 몇 백년이 흐른 이야긴지라 아무도 모른다.
이 지방을 다스리던 원님은 어명(御命)을 받고 초산(楚山)(호남고 뒷산)에 외적의 침범을 막기 위하여 성(城)을 쌓는데 수년이 걸렸다.
성을 쌓는 데에는 많은 돌이 필요했다. 이 칠성바위도 성을 쌓기 위해 운반 중인 돌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큰 바위를 어떻게 운반했을까? 그 전설이 흥미를 주고 있다.
그 당시 정읍(井邑) 고을에 힘이 가장 세다는 천하장사 둘이 있었는데 남자장사와 여자장사가 있었다.
그러던 중 마침 힘을 겨루어 볼 기회가 온 것이었다.
마침 원님이 성을 쌓는데 내장산(內藏山)의 서래봉(西來峰)의 많은 돌을 초산으로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마침 인부가 모자라 고심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 두 장사는 자기들이 바위를 옮기겠다고 자원해 나섰다.

그리하여, 두 장사는 힘 겨루기 겸 바위를 옮기기로 했다.
서로 힘을 장담하던 두 장사는 바위를 들고 옮기기 시작했다.
큰 바위를 불끈불끈 들고 걸어가는 장사들을 본 사람들은 놀라운 일이라서 어안이 벙벙했다.
많은 구경꾼이 보는 가운데 장사들의 힘은 놀라움을 보여주었다.
그 증거로써 두 번째 바위의(가장 큰 바위) 위쪽에는 바위를 들다가 남겨진 장사의 손가락 자국이 여러 개 패어있다.
하도 큰 바위를 들었기에 손가락 닿은 자리가 움푹 패이고 말았다 한다.
서래봉에서 바위를 들고 송산동 앞까지 옮기는 동안 두 장사의 힘은 많이 소모되고 말았다.
그런데, 남자 장수의 힘을 여자 장수는 당해내지 못했다.
서로 힘 자랑을 했으나 남자 장수의 힘을 따를 수는 없었다.
이 두 장사는 많은 바위를 옮겼는데 마지막 7개의 바위를 놓고 옮기던 중, 갑자기 나라에 위기가 닥쳐와 원님의 명령으로 작업 중지 명령이 내려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옮기던 바위 7개가 도중에 던져진 채 힘 겨루기는 끝이 나고 말았다.
7개의 바위 중 4개는 남자 장사가 옮기다 만 것이고 3개는 여자장사가 옮기다가 만 것이다.
송산동(松山洞)을 이래서 "넘바위, 혹은 넘은 바위"라 불러오고 있다. "넘바위, 넘은 바위"의 뜻은 "남은 바위"즉 옮기다가 남겨 놓은 바위의 뜻인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지금도 송산동을 넘바위라 부르고 있으며 칠성바위는 천 년의 비사(秘史)를 간직한 채 묵묵히 말이 없다.

 

자료제공:[ 정읍의 전설 ] 김동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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