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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시 문화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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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정읍사(井邑詞)와 망부석(望夫石)
작성자 관리자

필자註 : 정읍사는 필자가 교단에서 직접 가르치고 있는 실정이어서 평소 연구의 대상을 삼고 수년간을 탐문도 하고 자료도 수집하고 실제 답사도 누차 한 바 있다.
여기에 소개하는 이 자료는 필자가 쓴 '내고장 전통文化'(1983년 11월 9일 발간 : 共著)중 구비문학(口碑文學)편에 들어있던 '정읍사와 망부석'과 필자가 쓴 '井邑郡史'(1985년 2월 28일 발간 : 共著) 824페이지의 문학과 예술 편 중 '井邑詞'라하여 소개한 일부분을 이곳에 옮겼음을 밝혀둔다.

백제(百濟)때의 일이다.
어느 보부상 아내는 장사를 나간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도 해가 서산을 넘은 지 오래건만 남편은 돌아오질 않았다.
달은 휘엉청 밝은데 남편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초조하고 애절한 것이었다.
드디어 아내는 산에 올랐다.
이 산의 위치는 지금의 덕천면 망제리(望帝里)란 설도 있고, 정읍시 시기리 죽림동(竹林洞)에 있는 죽지봉(竹支峰 : 일명 망치봉)이라는 설도 있으며 지금의 정읍사 공원 망부상 자리라는 설도 있다. 결국 이 아내는 돌아오지 않는 남편이 혹 진흙탕물에라도 빠지지 않을까 하고 걱정을 하면서 기다림 속에 안녕을 기원하는 가요(歌謠) 한 편을 지어 불렀다.
이것이 오늘날 현존하는 정읍사인 것이다.
남편을 기다리던 여인은 기다림에 지쳐 결국 바위, 망부석이 되었다는 것이다.

달하 노피곰 도 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져재 녀러신고요
어긔야 즌 랄 드 욜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어느이다 노코시라
어긔야 내 가논 점그랄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井邑詞는 현재 전하는 백제 가요이며 한글로 표기된 가장 오래된 노래다.
그러나 백제가요가 아니라 고려가요(高麗歌謠)로 보는 견해도 있다.
고려사악지(高麗史樂志)에 백제의 노래라하였을 뿐 자세한 연대는 미상이다.
악학궤범(樂學軌範) 卷五에 실려 있으며 설화는 고려사(高麗史) 卷71 樂志 2의 삼국속악(三國俗樂) 백제조(百濟條)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卷34 정읍현(井邑縣) 고적조(古蹟條)에 전한다.
악학궤범은 조선 성종(成宗) 24년에 성현(成俔), 유자광(柳子光), 신말평(申末平) 등이 왕명을 쫓아 편찬한 악서(樂書)로서 음악의 지침서라 할 수 있는데 궁중 의식에 쓰이던 당악(唐樂), 아악(雅樂), 향악(鄕樂) 등 음악의 원리와 방법은 물론 악기의 모양과 무용의 진퇴법(進退法)을 적은 책이다.
여기에 고려말까지의 국문학 작품인 정읍사(井邑詞), 동동(動動), 처용가(處容歌), 정과정(鄭瓜亭) 등이 실려 있다.

악학궤범이 쓰여진 15C 당시에는 궁중나례(儺禮)후에 거행했던 학연화대처용무합설(鶴蓮花臺處容舞合設)에서 처용무, 정과정 등과 이 정읍사를 무고(舞鼓)와 함께 연주하였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 노래의 설화는 고려사 卷71 악지 2의 삼국속악 백제조와 동국여지승람 卷34 정읍 고적조에 아래와 같이 전하고 있다.
『정읍은 전주현에 속한다. 전주현 사람이 행상을 떠난 후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으므로 아내가 산에 올라 멀리 남편 있는 곳을 바라보면서, 남편이 밤에 다니다가 해(害)를 입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진흙에 빠지는 것으로 비유하여 노래한 것이다. 세상에 전하는 바에 의하여 그 아내가 올랐던 고개 등점산(登岾山)에 망부석(望夫石)이 있다.』

그런데, 신증(新增) 동국여지승람에는 足跡猶在(자취가 지금도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위치는 在縣北十里라 기록하고 있으니 고을의 북쪽 십리쯤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망부석의 위치는 자세히 알길이 없다.
동국여지승람에 縣北十里(고을의 북쪽십리)라 하였으나 백제시대 정촌현(井村縣)의 고을터는 井邑에서 남쪽으로 십리나 떨어진 샘바다(井海), 입암면 신정리(新井里)라 전해지고 있으니 縣北十里라는 것은 샘바다에서 북쪽 십리로 풀이할 수 있다 해도 확연치 않은 점이 많다.
어떻든 그 당시 정읍의 고을터와 지금의 정읍이 똑같은 위치였는지 의문을 자아낸다.
현재(1991년) 정읍시(井州市)에는 세 군데에 井邑詞碑가 있고 이 중 두 곳에는 망부상이 함께 서 있다.

남편을 기다리는 백제 여인의 영혼을 위로하고 망부석을 오래 기념하기 위하여 내장산 기슭에 망부상이 세워졌다.
내장산 월령봉 밑 푸른 잔디 위에 자리한 이 망부상은 설계 김연배(金煉培), 조각 김순례(金順禮) (좌대 높이 56cm, 上石높이 209cm 그 위의 키 196cm, 허리 118cm)로 되어 있다.
망부상의 우측에는 정읍사의 시비(詩碑)가 깔끔하게 김윤길(金允吉)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또, 내장 저수지 아래 자리잡은 호수 공원에 1984년 6월 정읍사비가 세워졌다.
이 비 전면(前面)에는 정읍사 본문이 그대로 새겨져 있고 후면엔
『백제 가요로서 작자 연대는 미상이다. 통일신라 경덕왕 이후 구백제(舊百濟) 지방의 노래로 짐작된다. 현존하는 유일의 백제가요이며 한글로 기록되어 전하는 가요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내용은 정읍현에 사는 행상의 아내가 남편이 돌아오지 않으므로 높은 뫼에 올라 먼 곳을 바라보며 남편이 혹시 밤길에 위해(危害)라도 입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나타낸 노래이다.』 라고 적혀 있다.
또 좌대 옆면에는 내장산 라이온즈 클럽 고광식(高光植) 회장의 이름으로
『여기에 우리의 조그마한 정성을 모아 내 고장 문학의 꽃이요 자랑인 정읍사를 새긴다. 남편의 무사만을 비는 망부의 간절한 여심(女心)은 허다한 세월이 흐른 이 시간에도 아름다운 정읍의 산골에 묻혀 있는 것이다. 오늘 이 글을 새기는 우리의 참뜻은 백제 여인의 정(淨)한 마음을 영원히 기억하고 정읍 청사에 이어갈 문화전승의 산 교육을 보여줌이다.』 라고 새겨져 있다.

이 호수 공원에 있는 정읍사비는 원형(圓型)으로 설계되어 있으며 좌대(3층 계단) 높이 : 90cm, 좌대 밑 길이(남쪽→북쪽) : 5m68cm, 좌대 밑 길이(동쪽→서쪽) : 4m36cm, 詩碑원통의 지름 : 2m88cm, 원통두께 : 48cm, 설계 : 박철웅(朴哲雄), 조각시공 고영우(高永瑀), 글씨 송파 조용태(松坡 趙容泰)로 되어 있다.
1986년 12월, 시비(詩碑)로서는 세 번째요 망부상(望夫像)으로는 두 번째로 정읍사공원(井邑詞公園)에 또 세워졌다.
주위 환경도 가장 넓고 시비나 망부상의 규모도 가장 크다.
망부상의 모습은 허리띠를 두르고, 치마, 저고리(백제시대 의상)를 입었으며 양손을 모으고 서 있다.
망부상을 향하여 정읍 시가를 내려다보면 가까이 정읍고등학교가 깨끗이 보이고, 멀리 산 밑에 상동 현대APT가 정읍의 명물로 등장하여 15층의 위용을 자랑하는 가운데 현대 감각과 미려한 몸매를 드러낸다.

또 좌편의 가까이 시립 도서관과 예술회관이 자리하여 도시의 풍광 속에 망부상은 우뚝 솟아 있다.
망부상 앞면에 검은 돌을 박아 그 위에 정읍사(井邑詞) 전문(全文)을 세로 글씨로 써 놓았다.
밑에 좌대가 안정되어 있고 높은 돌(높이 : 2.2m 측면 : 1.5m)을 조각해 세우고 그 위에 작은 층(약20cm)이 있고 그 위에 망부상(약 全身 2.5m)이 서 있다.
미원그룹 회장 임대홍(林大洪)기증, 김창희(金昌熙)조각, 김동욱(金東旭)고증, 권갑석(權甲石)글씨로 꾸며져 있다.

망부상은 오늘도 남편을 기다리던 백제 여인의 모습을 더듬어 비추며, 두 손 사뿐히 합장한 망부의 서럽고도 아름다운 내력을 조금씩 풀어내고 있는 지도 모른다.

 

자료제공:[ 정읍의 전설 ] 김동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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