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물소리가 들린다. 조용히…조용히…. 물소리가 분명히 들리고 있다.
아, 저 물 흐르는 소리…』
동네 사람들은 할미바위 밑에 귀를 대고 물 흐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야기는 아주 먼 옛날의 이야기다.
지금의 정읍시 과교동 진산리(井邑市 科橋洞 辰山里) 넉매부락 앞산에 아름답고 큰 바위 하나가 있었다.
이 바위는 울퉁불퉁 괴석으로 생겨서 더욱 아름답게 보였고 또 그 잘생긴 기상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어도 이 바위는 할미바위라 불리워 졌으며 그 바위 밑에서는 사시사철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일대의 주민들은 언젠가는 이 바위에서 맑고 좋은 물이 흘러내려 유명한 약수터가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주민들이 몇 명 모이면 가끔 이 할미바위에 올라 물소리를 듣곤했다.
특히 힘이 건장한 청장년들이 달밤에 모여 놀다가 이 바위에 이르러 귀를 기울일 때면 그 물소리는 한결 맑고 크게 들리는 것이었다.
큰 바위 밑에서 물은 보이지 않는데 물이 흐른다니 이상한 이야길 수 밖에 없어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모았다.
1930년대 일제(日帝)시대의 일이었다.
어느 날, 이 동네 청년들은 이 바위 밑에 가서 귀를 기울였다.
예상했던 그대로 맑은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자리에서 오랫동안 머물면서 들어봐도 물 흐르는 소리가 나는 것은 틀림없었다.
물소리가 선명하게 들릴수록 청년들의 호기심은 깊어만 같다.
동네 청년들은 그 자리에서 회의를 열었다.
어떻게 저 밑에 흐르는 물을 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논의했던 것이다.
그러나 별 묘안은 나오질 않았다.
다만 한 청년이 발언을 했다.
그 청년의 발언은 할미바위 밑을 깊게 파보자는 것이었다.
그런 말이 나오자 청년들은 서로 말들을 못하고 쳐다만 보고들 있었다.
회의는 계속되었고 결론은 바위 밑을 파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의견을 모았다.
청년들은 용기를 내어 곧 삽과 괭이를 가져와 바위 밑을 깊게 파 보았다.
아무리 파도 물 한 방울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아름답게 들리던 물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 후 이상한 이야기가 퍼져갔다.
할미바위 밑을 파버린 이후로 이 마을엔 상사병(相思病)을 앓는 처녀가 한꺼번에 몇 명씩이나 생겨났다.
처녀들이 상사병을 이렇게 무더기로 얻는 것은 할미바위 밑을 파버렸기 때문에 그 앙화(殃禍)가 내려진 것이라고 소문은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주위에서 수군대는 소문에 의하면 할미바위 밑을 파본 것은 여자로 말하면 그 밑이 음부(陰部)인데 항상 깊숙이 간직해야할 그 곳을 손댔으니 큰 벌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온 마을이 한동안 이 이야기로 들끓었다.
세월은 또 몇 년이 흘렀다.
장난 좋아하는 대담한 청년들이 짝을 지어 다시 할미바위 밑을 장대로 쑤셔버렸다.
그 뒤 바로 이 마을은 여러 명의 처녀들이 상사병을 앓고 눕거나 혹은 죽어 갔다.
이쯤 되었으니 동네는 온통 걱정뿐이었고 주민들의 입에서는 무슨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야단들이었다.
드디어 마을 회의를 열었다.
회의 결과, 할미바위를 보호해 주고 그런 의미에서 팠던 곳을 다시 묻어주어 할미바위 전체가 곱게 땅 속에 묻힐 수 있도록 해주자는 결의였다.
그 큰 바위를 묻으려면 흙도 많이 있어야 하고 산주의 양해도 있어야만 했기에 주민들은 산주(山主)를 찾았다.
산주는 부호로 알려진 정읍(井邑)사는 김평창이라는 사람이었다. 주민 대표들로부터 사정을 들은 산주는 쾌히 승낙했다.
그 후 할미바위는 동네 사람들에 의해 따뜻하게 흙 속으로 묻히고 말았다.
그리고, 동네에도 아무런 일이 생기지도 않았다.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도 할미바위가 묻힌 자리에서는 맑은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고 전한다.
자료제공:[ 정읍의 전설 ] 김동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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