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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일재(一齋) 이항(李恒)의 조화
작성자 관리자

일재(一齋) 이항(李恒)은 1499년(燕山 5年) 서울 신혼동(晨昏洞)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품성이 강직하고 호탕한 가운데 용력(勇力)이 뛰어나 말타기, 활쏘기를 익혀 무관으로 큰 뜻을 이루려 하였다.
그런데, 27세 되던 해 백부(伯父) 판서공(判書公)의 교훈을 받아 학문에 깊은 뜻을 두었다.
사서(四書)를 공부하는데 그의 정신이 어찌나 강인했던지 칼을 옆에 꽂아놓고 정신일도하에 공부했다고 한다.

일재의 흥미로운 일화 몇 가지가 전설로 피어올라 지금까지도 주민들의 입에 오르고 있다.
일재가 태인면 태서리 분동(泰西里 粉洞)에 머물 때의 일이었다.
일재는 그 당시 몇 날을 두고, 공부하기에 알맞은 좋은 터를 하나 잡아 서당(書堂)을 지어 보겠다는 마음을 다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따뜻하고 청명한 날인데 붓을 들고 상념에 빠져 있었다.
일재는 갑자기 붓을 들고 그 붓대를 손으로 통겨버렸다.
퉁긴 붓은 손을 벗어나 하늘을 날아 북면 보림리 입점(笠店)부락에 떨어지고 말았다 한다.

그 뒤 일재는 그 자리가 서당으로서 좋은 자리임을 말해 왔는데 1576년(宣祖 9年)일재가 돌아가자 그 이듬해인 1577년 그 자리에 남고서원(南皐書院)이 세워졌다.
이 서원이 세워지자 즉시 일재(一齋) 이항(李恒), 건재(健齋) 김천일(金千鎰) 두 분을 배향(配享 : 功臣이나 학덕이 높은 분의 神主를 모시는 일)했다.
그후 효종(孝宗)때부터 사액(賜額 : 임금이 祠堂, 書院, 樓門 등에 이름을 지어 주는 일)을 상소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685년(肅宗 11年) 4월에 남고서원이라는 사액이 내려졌다.
1871년 (高宗 8年) 조령(朝令)에 의하여 이 서원은 철거되었는데 그 뒤 설단(設壇)하여 다시 향사(享祀)한 바 있었다.

그런데 그 철거 명령을 받았을 때의 일이었다.
이때 많은 주민들과 자손들이 철거 명령을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이때를 같이하여 밤이 깊으면 칠보산에서 호랑이가 내려와 남고서원 주변을 돌면서 슬피 우는 것이었다.

호랑이가 며칠 밤을 서럽게 울면서 바위를 발톱으로 긁었는데 그 자국이 상당히 패었으며 또 흙을 발톱으로 파헤쳐 큰 웅덩이를 이루었다 한다.
이 지점은 남고서원에서 500m쯤 떨어진 곳이었다.
그런데, 이 소식을 접해 들은 어떤 주민이 호랑이가 파 놓은 웅덩이는 좋은 명당이라 하여 이 곳에 묘를 써서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또 한 가지 재미나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남고서원이 있는 마을이 보림리 입점(寶林里 笠店) 부락인데 마을 앞에 큰 정자나무가 있고 그 정자나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바위 두 개가 서 있다.
해방 전만 하여도 바위가 서 있던 곳은 산이었는데 지금은 논두렁에서 있다.
큰 바위는 어미바위, 작은 바위를 아들바위라 부르기도 한다.
어미바위(지상높이 약 3m, 둘레 2.6m)의 모양은 꼭 사람 모양을 갖추고 있는데 머리 모양이 여인상을 닮았다.

아들바위(지상높이 약 1.5m, 둘레 2m)의 모양은 몸체는 둥그스름하나 위쪽은 뾰족한 편이다.
두 바위의 간격은 3m 를 유지하고 서 있다.
일재 이항(李恒)선생이 학문을 크게 이루었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힘과 재주가 놀라웠다 한다. 얼마나 힘이 세었을까? 보림사(寶林寺) 뒤편 칠보산 용추봉에 올라 바위를 뽑아 던져버렸는데 그 바위 두 개가 바로 어미바위와 아들바위다.
약 2km를 쏘아 버렸으니 겁난다는 말밖엔 무슨 다른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 다음 또 하나의 바위를 던져 버렸는데 그 바위는 수십 리를 날아가 태인면 태서리 분동(泰仁面 泰西里 粉洞)마을 앞 냇가에 떨어지고 말았다 한다.

일재가 힘과 재주를 자랑하기 위해 칠보산 용추봉에서 한 번 뛰면 꼭 어미바위 옆에 척척 떨어졌고, 거기서 다시 힘을 내어 태인 쪽으로 뛰면은 태서리 분동마을 냇가에 던져둔 바위 앞에 내려지곤 했다 한다.
그리고, 뛸 때에는 용추봉에서 나막신을 꼭 신고서 뛰었다니 조화(造化)무궁이라 할 수밖에 더 있는가?
그러니까, 어미바위와 아들바위는 일재가 뛸 수 있는 종점의 표석(標石)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당시 일재의 높은 학문의 소식을 듣고 전국에서 많은 학자들의 출입이 많았다 한다. 학자의 출입이 많으므로 그들이 갓을 썼기 때문에 그 어미바위를 중심으로 하여 입점마을에 갓시장이 섰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이름을 입점(笠店) 혹은 관동(冠洞)이라 불렀고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던져진 분동 마을의 바위는 던져진 이유가 다른데 있었다.
그때 일재는 태인 분동에서 둘째 부인과 생활하고 있었다.
일재가 밤늦게까지 돌아오질 않을 경우에는 그 부인이 꼭 마중을 나갔는데 마중을 나가자면 분동 앞에 있는 냇가를 건너야만 했다.
냇가를 건널 때는 부인의 옷자락이 꼭 물에 젖어 그 번거로움을 덜어주기 위해 일재는 다리를 놓으려고 바위를 던져버린 것이었다.
그 바위로 징검다리를 놓아 치마가 젖는 일이 없이 마중을 나갔다 한다.

그런데, 일제때 근방에서는 처음으로 경지(耕地)정리를 하면서 냇가가 없어지는 통에 주민들과 자손들에 의해 그 바위는 옮겨졌다.
자손들의 뜻에 따라 그 바위는 분동마을에 있는 일재의 유허비(遺墟碑) 옆으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재는 축지법(縮地法)을 썼다고 하니 참으로 기이하고 흥미롭다.
아침에는 경성(京城)에서 일을 보고 저녁이면 벌써 태인 분동마을에 와서 저녁을 먹었다 한다.
생각할수록 도술이 궁금하다.

1539년(中宗 34年) 칠보산 아래 서재를 세우고 강학소를 운영했는데 항상 일자(一字)의 액자를 붙여 놓아 세인들이 이 서재를 일재라 불렀다 한다.
한번은 사정전(思政殿)의 명종대왕 어전(御前)에서 학문을 논하는데 『도심(道心)은 성명(性命)에 근원하고 인심(人心)은 형기(形氣)에서 나오는 까닭에 두 가지를 자세히 살핀다면 하나이니 하나를 지키는 것이 근본이다.』 라고 했다.
그리하여 아들의 이름도 덕일(德一), 수일(守一)이라고 일자(一字)를 붙였고, 일재를 수일재(守一齋)라고도 불렀다.

1566년(明宗 12년) 5월 명종대왕은 국내에서 이조(吏曹), 예조(禮曹)에 명하여 경명행수(經明行修)로 고명한 학자를 천거하라하니 그 천거된 인물 중 한사람이 바로 일재였다.
1566년(明宗 8年) 일재의 병세가 위독하고 심각하자 임금이 의원을 보내 치료까지 했으나 끝내 1576년 6월 22일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조정에서는 전라관찰사(全羅觀察使)에 명하여 크게 예우(禮遇)하는 가운데 장례가 치러졌다.
일재 선생이 가신지 오래지만 지금도 선생의 높은 학덕을 흠모하는 많은 사람들과 자손들은 그 분의 조화무궁한 일화도 많이도 기억하며 남고서원을 찾고 있다.

 

자료제공:[ 정읍의 전설 ] 김동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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