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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약방 할머니
작성자 관리자

인간 세상에서 아름다운 부덕(婦德)은 항상 높게 평가되고 있다.
파란 많은 한 생애를 살아오는 동안, 겸양과 현숙(賢淑)과 자애(慈愛)의 미덕 속에 아름다운 인간 승화를 가져온 약방 할머니, 그분의 별명이 약방 할머니였다.
본명은 김성녀(金姓女 : 1899년 1월 17일∼1988년 1월 15일)로 1899년 부안군 보안면 영전리 제내(扶安郡 保安面 英田里 提內)에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얼굴 곱고 온순하고 맑고 티없는 소녀로 성장하여 나이 열 다섯에 결혼하니, 부군(夫君)이 훗날 한문학(漢文學)의 대가인 부안(扶安)의 백파 김구락(白坡 金龜洛 : 1897년 음력 11월 8일∼1975년 11월 3일 : 著書에 白坡私稿 3권이 전함) 선생이다.

약방 할머니는 생애의 대부분을 부안 지방에서 보냈고 말년 20여 년은 거의 매달 정읍(井邑)의 아들집과 딸의 집을 왕래하며 살았다.
정읍에 오시어 몇 개월씩 있다 가실 땐 정읍의 산천을 못 잊어 정을 두고 떠나곤 했다.
약방 할머니는 1958년 60살 때부터 10여 년을 부안군 주산면 성덕리(舟山面 星德里)라는 곳에서 살았다.

당시 부군 백파 선생은 학동들을 모아 서당을 운영하면서 후학 양성에 전념하는 한편, 선조가 가업으로 물려준 한약방까지 경영하고 있었던 데서 약방 할머니의 명칭은 유래했다.
약방 할머니의 일화가 흥미롭다. 그분은 신심(信心)이 지극히 깊은 불교 신자였다.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면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항상 입에서는 '나무관세음보살' 소리가 그치지를 않았다.

약방 할머니는 매년 남의 밭 몇 두렁씩을 얻어 고추, 참깨 등을 심었다.
텃밭이라서 두더지, 쥐, 뱀, 개 닭들의 침범이 심하여 밭농사를 하는 데에 여간 성가시지 않았다. 텃밭을 버는 사람들의 큰 고민이 밭에 침범하는 것들을 막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약방 할머니가 짓고 있는 고추밭이나 참깨 밭에는 동물들의 침범이 없어 작물이 무성하게 잘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쥐약을 자주 놓으면서 약방 할머니한테 물어오곤 했다.
어떻게 하면은 저렇게 동물의 침범도 없고 작물도 잘되느냐고 물을 땐, 가볍게 미소하며
『'나무관세음보살'을 밭에 올적마다 백 번씩만 외우면은 쥐약 놓을 것도 없고 다른 동물도 들어오지 않는 답니다.』 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게 사실이었으니 주민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성덕리에는 옆집에 종성(宗成)스님(본명:金禮源 白羊寺, 佛無寺 등에서 수도한 高僧)이 살고 있었다.
종성은 식사시간을 빼고는 매일 수년간을 백파 선생의 서당에 와서 글을 읽고 글씨를 썼다.
또한 한학(漢學)과 불가(佛家)의 경전에 달통한 종성은 성리학(性理學), 유가(儒家), 불가(佛家), 시문(詩文), 혹은 근본문제에 대하여 백파와 끈질기게 토론하고 궁구(窮究)했다.
그러고 보면 약방할머니의 '나무관세음보살'이 다 종성으로부터 받은 신심(信心)이었다.
종성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약방 할머니에게 부처님이야기를 해주었으며 염불을 정성껏 써다가 외우도록 주선해 주고 깨쳐주었다.
1960년 여름이었다.
약방 할머니의 작은아들이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방학이 되어 내려 왔을 때, 종성은 그에게 수십 장되는 편지를 내주며 웃었다.
아들이 뜯어보니 글의 제목이 '약방 할머니'였다.
날마다 글을 쓰며 시를 짓던 종성이 약방 할머니를 잠깐 묘사한 것이었다.
그중 몇 줄을 옮기면

『약방 할머니, 약방 할머니,
말할 때는 가만가만

웃을 때는 조용조용
앉을 때는 사쁜사쁜

베풀 면 하도 좋고
받을 땐 깊이 감사

미소 포갠 입가에선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누워서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앉아서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서서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기쁠 때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슬플 때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우리나라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우리중생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우리가족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약방할머니와 십 년을 옆에서 같이 살았어도 말씀이나 웃음이 대문 밖으로 흐르는 걸 듣지 못했다.
걸음은 가만가만 걷되 길가 한쪽으로만 걸으신다.
한 쪽 가에로 걷지만 바쁘지 않다. 바쁘지 않아 유연하고 여유가 있어 얌전한 티가 절절 흐른다.
항상 검정치마에 흰 저고리뿐이다.
거기다가 흰 고무신이 빠지질 않는다. 머리에는 항상 하얀 수건이 쓰여져 있다.
어느 길가에서 언제 뵈어도 머리에 얹힌 하얀 수건이 구수하고 담담하다.
어느 날인가?
옆집 아낙네가 머리에 수건은 왜 쓰느냐고 물었더란다.
"중요한 머리를 보호해 좋고, 햇볕을 가려주어 좋고, 머리에 비 안 맞아 좋고, 먼지 안 앉아 좋고, 밥지을 때 머리카락 없어 좋고, 겨울엔 바람 막아 좋고, 남자들 앞에 얼굴 가려 좋고…."
이래저래 그냥 쓰신단다.

겸양이 선천적으로 몸에 배어 있으며 자상하고 은혜롭고 자애롭다. 일세에 드문 조선 선비의 아내 상(像)이다.…中略』
부군(夫君)은 두 살 위였는데 십여 년을 먼저 세상을 떴다.
그때의 슬퍼함이 너무 망극하여 옆에 사람 보기에도 민망했다.
그런데, 이 분의 꿈이 또 신비한 것이었다. 가끔 꿈에 부군과 만난다는 것이었다.
만나서 평소처럼 선연히 이야기하고, 왜 요즈음은 오지 않느냐고 물어오곤 했다는 것이다. 꿈을 꾼 날엔 그 이튿날 팔십이 넘은 몸으로 꼭 부군의 묘소를 찾았다. 묘소에 갈 때에는 지팡이와 함께 들꽃들이 꼭 손에 쥐어 있었다.
그리고, 꽃을 묘소에 놓고 부군과 대화를 나누었다. 살아있는 사람과 말하듯이 오랫동안 지켜 앉아 대화하고 돌아오곤 했다.
부군을 그리워하는 애틋한 정을 주민들은 '부부의 정이 얼마나 깊어 있었으면 저럴까?" 하면서 부러워했다고 전한다.
약방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90세의 나이인데도 밤이나 낮이나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책을 손에서 놓지를 않았다.

춘향전, 심청전, 토끼전, 장끼전 등 옛 글을 두루 섭렵했고, 신문이건 잡지건 항상 당신 옆에 두어 읽는 걸 잊지 않았다.
눈이 무척 좋아 구십에 이르러서도 어쩌다가 돋보기를 썼을 뿐 안경 없이 책을 읽곤 했다.
젊어선 시부모 모시는데 드문 효부로 알려 있었고 친정부모의 제삿날엔 몸소 가시거나 제물(祭物)을 보냄이 한번 빠뜨림이 없었다 한다.
슬하에 8남매를 두었는데 약방 할머니의 불심(佛心)으로 다들 건강하고 유복하게 잘 살고 있다. 전쟁터에서 빗발처럼 탄환이 날아와도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을 계속 외우면 가슴을 향해 날아오던 탄환도 빗겨나간다고 미소하시던 약방할머니, 중생을 고통에서 건져내는 이고득락(離苦得樂)에의 발원(發願)이 부처님 본래의 뜻이었다면 그 뜻 그대로 살다 가신 약방 할머니, 일상 생활을 큰 믿음으로 정화수처럼 맑고 화평하게 사셨다는 점에서 바로 진불(眞佛)인 듯 싶다.
지금도 그분을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은 '약방 할머니' 혹은 '수건 할머니'의 옛 모습을 전설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자료제공:[ 정읍의 전설 ] 김동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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