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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빈대 타는 냄새가 십 리나
작성자 관리자

머나 먼 옛날의 이야기다.
정읍시 과교동 서당촌(前 笠岩面 新井里 書堂村)에서 십 리쯤 떨어진 산골에 의주암(義主岩)골(혹은 이주암골)이라는 옛 마을 자리가 있다.
8·15 해방 전엔 7∼8호의 농가가 자리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다 없어지고 하나의 돈사(豚舍)가 있을 뿐이다. 석산(石山) 마을에서 내장사(內藏寺)쪽을 향해 즉 남쪽 계곡을 타고 걸어서 십리쯤 가게되면 이 의주암골에 이를 수 있다.
이 의주암골에 산수의 경관이 뛰어난 빈터가 있으니 그게 용문암(寺)절 터이다.
용문암 절터는 큰 절터와 작은 절터가 가까이 인접해 있다.
이 두 절터 중간엔 큰 송곳바위가 있어 요즈음도 별통을 갖다가 이 바위 밑에 놓으면 벌이 모여들어 벌을 몇 통씩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주위 산세와 경관이 아름다운 용문암 절터가 지금은 부서진 기와장과 하늘을 덮어버린 숲에 묻혀 버린 채 산새들의 놀이터로 변해 버렸다.
옛날, 이 용문암에는 빈대가 많았다 한다.
빈대가 어찌 많은지 한밤중에 스님들이 자다가 일어나 옷 속의 빈대를 털어 내지 않고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방의 중천이나 벽에도 빈대요, 방바닥에도 빈대가 시글시글했다.
그러나, 왜 유독히 이 곳에 빈대가 심한 지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아주 먼 옛날이었으니 빈대는 약이 있을 수도 없고 손으로 잡아죽이는 수밖에 없었으니 참으로 딱한 일이었다.

이 때, 용문암에는 여러 명의 승려들이 수도 정진하고 있었다.
그중 주지스님은 인격이 고결하고 학덕이 높은 고승(高僧)이었다.
이 주지 스님은 용문사에 머무는 여러 스님들과 불자들에게 빈대를 잡되 절대 죽이지를 말라고 당부했다. 어떻게 수도승(修道僧)이 살생을 할 수 있느냐는 뜻이고, 또 이런 일쯤 참고 견디는 것이 중이 겪어야 할 자비인욕(慈悲忍辱)이라고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스님들은 빈대를 잡아 모아서 죽이지는 못하고 절 문밖에 나가 버리고 돌아오곤 했다.
주지 스님 자신도 그렇게 했고 원체 못 견디면 옷을 벗어 빈대를 털어 내고 입었다.
어떤 스님은 하룻밤에도 몇 번이고 일어나 빈대를 털고 잠을 잤다.
날마다 빈대를 쓸어모아 버렸지만 빈대는 줄지 않고 더욱 극성을 부렸다.
이젠 온 집안이 사이사이 모두 빈대 천지요 지붕의 기와장 밑까지도 빈대로 꽉 차 있었다.
음식 속에도 죽은 빈대가 묻혀 있기 일수였으니 빈대 때문에 못 산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절에는 나이 어린 행자(行者) 한 분이 있었다. 행자는 빈대의 성화를 견딜 수가 없었다.
다른 스님들은 오랜 습관이 되어 잘 견디고 있지만 이 절에 온 지 일 년도 안 된 행자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밤이나 낮이나 어떻게 하면 빈대를 없앨 수 있을까 하고 궁리를 했지만 엄하게 다스리는 주지 스님 앞에 감히 어떤 방법의 제시도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행자는 고민했다.
자기 얼굴을 거울에 비쳐 보았다. 뼈만 앙상했다.
이 절에 들어오기 전엔 얼굴에 윤기가 감돌고 생동하는 모습이었는데 일 년 가까이 고기 한 점 냄새도 못 맡고 풀잎만 먹는 터에 밤낮으로 빈대에게 피를 빨리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행자는 울화가 치밀었다. 그리고 별별 생각을 다 했다.
인간을 괴롭히는 동물을 없애는 것이 무엇이 나쁘다는 말인가? 인간도 살기 위해 빈대를 잡아야 할 것이 아닌가? 인간도 빈대도 함께 존재해야만 하는가? 인간은 왜 빈대로부터 괴롭힘을 당해야 되는가? 이런 생각에 행자는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어느 날이었다.
마침 그 날은 큰 절 송광사(松廣寺)에서 행사가 있는 날이었다.
그래서, 스님 모두가 이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떠나고 행자 혼자서 절을 지키게 되었다.
용문암을 떠나는 스님들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행자는 이런 생각을 했다.
"오늘 밤 저 스님들이 큰절에서 하룻밤 자고 올 것인데 스님들의 속옷에 붙었던 저 빈대들은, 이제 우리도 쓸만한 절에서 살게 되었다며 얼마나 기가 당당할까? 그렇게 될 때 저 빈대의 씨들이 또 금방 번식되어 큰절에도 빈대 천지가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그 절에 머무는 스님들 또한 얼마나 고충을 받을까?" 생각이 여기까지 머물자 행자는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나 부처님 앞에 엎드렸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부처님, 저는 많은 스님들과 불자(佛子)들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빈대를 모두 잡아죽이기로 결심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저의 뜻을 살펴 주실 줄 믿고 큰일을 저질러 버리려 합니다. 부처님의 하해 같은 자비(慈悲)를 저에게 내려 주시옵소서. 거듭 용서를 빕니다.』 이렇게 기도한 후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밤이 깊었을 때 행자는 얼른 법당(法堂)으로 들어가 부처님을 들고 나와 절 문 밖에 모셔 놓았다.
불길은 높이 솟아 삽시간에 용문암을 완전히 태우고 말았다.
용문암이 불에 탈 때 빈대 타는 냄새가 십 리를 뻗쳤다고 한다.
초가삼간 다 타도 빈대 타는 맛이 좋다던 옛말이 실감(實感)으로 나타난 광경이었다.
불에 용문암이 타고 있을 때 이 행자는 절문 밖에 모신 부처님 앞에 엎드려 흐느끼고 있었다 한다.
행자는 그 후 곧 법의(法衣)를 벗고 속가(俗家)에 내려와 절을 태우고 빈대를 죽인 참회의 눈물 속에 한 생애를 보냈다 한다.
그 뒤 용문암은 다시 지어지질 않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절 터만 빈대의 역사를 간직한 채 남아 있는 것이다. 8·15전까지만 해도 이 절 터에 가면 돌과 기와장에 빈대 껍질이 붙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6·25이후까지도 기와장에 빈대 껍질의 흔적이 있었다고 말하는 주민도 있다.
지금도 용문암 절터에 가면 산산이 부서진 기와장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자료제공:[ 정읍의 전설 ] 김동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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