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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입암산(笠岩山)도 울고
작성자 관리자

차경석(車京石 : 1880년 6월 1일∼1936년 3월 10일)은 보천교(普天敎) 교주로서 세상에 널리 알려 있다.
말하자면 그에 의해 보천교가 창교(創敎)되었던 것이다.
경석은 이름이며 자(字)는 윤홍(輪洪), 호를 월곡(月谷)이라 하였다.
월곡은 1880년(高宗 17년) 고창군 아산면(高敞郡 牙山面)에서 동학접주(東學接主) 차치구(車致九)의 장자(長子)로 태어났다.

월곡은 성장 과정에서부터 동학(東學)의 영향을 받아 종교에 깊은 뜻을 품어 오던 중 1907년 금구면 거야(金溝面 巨野) 주점(酒店)에서 증산교의 교주 강증산(姜甑山)을 만나 정읍시 입암면 대흥리(笠岩面 大興里)로 돌아와 깊은 정의(情誼)를 맺는다.
두 사람이 거야에서 처음 만났을 때, 월곡이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으니, 증산이
『동으로 가도 손이요, 서로 가도 손이요, 천지에 집 없는 손이로소이다.(東亦客 西亦客 天地無宿客).』 라고 대답했다 한다.
천지간에 거처조차 없는 사람들, 그러나, 단순히 없음의 고통으로만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길, 새로운 세계를 모색하는 큰 뜻으로 승화된 대화들이었다.
월곡이 1909년 1월 3일 보천교를 창교(創敎)하니 그날이 기원일(紀元日)이 되었다.

한 때 월곡이 7년 동안을 객지에 있었는데 주위에서 일어났던 신기한 일들이 많았다.
1918년 금강산 마하연 암자에 기거할 때의 일이었다.
정말 그곳은 산 깊고 물 좋은 곳이었다. 낮에도 바람 소리와 새 소리뿐이었다.
그런데, 스님들이 말하기를 요즈음 이상한 새소리가 들린다는 것이었다.
평소에 듣지 못한 곱고 아름다운 새 소리였다.
한 수도승(修道僧)은, 이 소리는 월곡이 이 곳에 머무는 줄을 알고 그의 대도(大道)를 열어 주는 봉황새의 울음이라고 말하였다 한다.

그 후, 1919년 경북 봉화군 춘양면 학산리와 태백산(太白山)에 머물 때, 1936년 경남 함양 황석산에 머물 때에도 봉황(鳳凰)새가 와서 수시로 울었다 한다.
이 특이한 산 새 소리를 들은 많은 스님들과 주변 사람들은 참으로 상서롭고 신이(神異)가 일어날 길조라고 놀랐다 한다.

또 1936년(丙子年) 월곡이 세상을 뜨기 직전 입암산(笠岩山), 방장산(方丈山), 비룡산(飛龍山)이 7일간이나 울어 그 산울음이 어찌나 처량하고 구슬픈지 많은 주민들과 신도들의 안타까움과 울음을 자아냈다고 전한다.
참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신명(神明)한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월곡은 한 때 남의 모함을 받고 장성(長城)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있던 중, 사형수로서 伏 誰知登路驥 含蘆未作見鴻

(갈대를 머금고 기틀을 본 기러기를 짓지 못하였도다)라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장성 옥중에서 옥살이 중 사형을 받았다. 사형(死刑) 집행 3일전의 위의 즉흥시(詩)를 읊으니 장성부사(長城府使)가 그의 시 솜씨에 놀라 극찬하고 다른 운자(韻字)를 내어 시작(詩作)을 겨누며 좋아했다.
월곡의 뛰어난 인품을 잘 알게된 장성부사는 날이 밝은 즉시 광주(光州) 목사(牧使)를 찾아가 월곡의 면죄(免罪)를 간청했다.
그 후 즉각 월곡은 옥중에서 풀러나는 몸이 되었다.
월곡이 창시한 보천교의 교리는 인의(仁義)이다.
인(仁)으로써 생(生)하고 의(義)로서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을 행하고 의를 행하는 것이 인도(人道)의 종시(終始)가 되는 것이다.
사대강령(四大綱領)은 경천(敬天), 명덕(明德), 정륜(正倫), 애인(愛人), 주의(主義)는 상생(相生), 목적(目的)은 대동(大同)이었다.

일제(日帝)의 강력한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아니하였으며 일찍이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방대한 기구와 조직을 가지고 교전(敎殿)을 경영하여 한 때 6백만 교도를 거느리어 일세를 풍미(風靡)했으니 세칭 차천자(車天子)라 불리워진 것이다.
그 당시 입암면 대흥리는 농가 십여호로 이뤄진 가난한 촌락이었으나 교세(敎勢)의 엄청난 확장으로 전국에서 수많은 교도들이 모여들어 7백여 호에 이른 적도 있었다 한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뿐만 아니라 교전인 십일전(十一殿)은 1925년 기공하여 4년만에 완공했는데 부지 10,000여평, 건평 350평, 높이 99척이나 되는 웅장한 건물로 경내에는 제탑(祭塔) 3개가 있고 4대 문루가 있었다.

월곡이 일상 평생계잠(平生戒箴)으로 들려주던 좋은 글귀가 있었으니 德懋耳鳴 過懲鼻息(덕은 귀 우는 곳에 힘쓰고, 허물은 코 숨쉬는 소리에도 징개(懲改)하라) 즉, 덕은 음덕으로 베풀고 허물은 하찮은 것도 고치라는 말이다.
이 글귀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월곡은 1936년 7남매(5男2女)를 두고 세상을 하직하니 당시 57세였다.
그후 교전은 일제의 강제 철거로 십일전은 서울로 이전되어 조계사(曹溪寺) 건물이 되었으며 보화문(普化門)은 부안(扶安) 김상기씨의 집이 되었다가 내장사(內藏寺) 대웅전이 되었다.
지금, 보천교 자리에는 둘째, 세째 아들과 딸 한 분이 살고 있다.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도 입암면 대흥리 보천교 본소(本所)에서 매년 다섯 차례씩(음력, 正月初三日, 春分, 夏至, 秋分冬至日) 교인들에 의해 치성식(致誠式)이 올려 지고 있는데 영정(影幀)은 모시지 않고 방안에 탑(12층의 나무탑)을 놓고 식을 올리고 있다.
종교의 보편적 기본 요소가 이상(理想), 즉 계시(啓示), 신앙(信仰), 의례(儀禮)라 한다면 종교의 신생(新生)에는 반드시 계시자(啓示者)인 천재적 인격의 출현을 요구하는 것이다.
종교의 어떤 계단을 쌓아 올리던 월곡(月谷) 차경석, 이제 다 영생의 길에 들었으니 인(人) 무상, 세월 무상이란 말인가?

 

자료제공:[ 정읍의 전설 ] 김동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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