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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뺨맞은 정승(政丞)
작성자 관리자

상례(喪禮)의 국례(國禮)를 잘못 주장했다 하여 비군폄주(卑君貶主 : 임금을 낮추는 일)라 하였고, 정궁(正宮) 인현왕후(仁顯王后)에 앞서 후궁 장희빈(張禧嬪)이 남아를 낳자 3살도 못된 아이를 원자(元子)로 봉하는 조지(朝旨)가 내려지자 시기상조라 주장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선생, 그의 이러한 주장들이 예론(禮論)의 시비가 되고 왕명의 거역이라 하여 제주도에 귀양살이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 정읍(井邑)에서 사약(賜藥)을 받고 최후를 마치게 했다.

선생이 경기도 장단(長湍)에 볼일이 있어 가는 길이었다.
그때는 재상의 높은 지위에 올라 있던 때였으나 평복(平服)으로 갈아입고 혼자서 조용히 말을 달리고 있었다.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오락가락 하더니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별수없이 비를 피하기 위하여 말을 끌고 조그마한 시골 주막집으로 들어갔다.
비가 개이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좀처럼 그치지를 않고 있었다.
마침 어떤 무관(武官)으로 보이는 한 사람이 부하인 듯한 몇 사람을 대동하고 그 주막에서 역시 비를 피하기 위하여 들어오고 있었다.
우암과 그 무관은 빗줄기를 쳐다보면서 무료한 가운데 가끔 쳐다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주막집에는 장기판이 흩어져 있었다.
무관이 먼저 말을 붙였다.
『생긴걸 보아하니 문자라도 할 것 같고 장기라도 한 수 할 것 같은데 의향이 어떤지요?』
『예, 심심한데 한번 두어 봅시다.』
한참 장기를 열심히 두고 있는데 무관이 또 말을 붙인다.
『장기 두는 솜씨가 보통이 아닌데…. 이 궁벽한 촌사람이 무슨 벼슬자리라도 하고 있는 것 아니오? 아니 장기 놓는 걸 보아하니 보릿섬이나 없앤 모양인데…』
그 당시만 해도 참으로 가난한 때였다.
보리밥도 귀한 때였으니 소위 상놈들이 보리쌀을 팔아서 첩지 한 장 받아 가지고 면천(免賤)운동을 벌이던 때였으니까….
우암은 시치미를 뚝 떼고
『예, 벼슬이라 할 것까지는 못되고 그저 겨우…』 우암이 생각할 때 건방진 물음이었다.
그러나, 일부러 말끝을. 흐려버리고 말았다.
무관은 장기 두던 손을 멈추고
『우리 통성명이나 하고 지냅시다. 인사나 나누고 장기를 둘 걸 그랬습니다.』
그러자, 우암이 먼저
『저는 송시열입니다. 송나라 송자, 때시자, 매울렬자, 송시열입니다.』
무관은 갑자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우암의 뺨을 철썩 갈겨버렸다.
철썩하고 손이 떨어지자마자
『이 천하에 고약한 놈! 네 놈이 어찌하여 우암 송시열 대감의 높으신 이름을 함부로 거론하느냐? 그분으로 말하면 문장과 학식과 정치적 도량이 세상을 흔들고 있을뿐 아니라 내가 가장 존경하고 흠모하는 분인데 어찌 감히 그분의 이름을 모독할 수가 있겠느냐? 오늘은 재수가 없으려니 별 놈을 다 보겠구먼!』
하고는 말을 그치기가 무섭게 문을 박차고 대문을 나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을 재촉해 달리는 것이었다.

우암은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서 어안이 벙벙했다.
당시 대문장가요 효종대왕의 최고 지우(知遇)를 받고 나라를 흔들던 좌의정(左議政) 우암이 뺨을 맞았으니 기가 막히기도 하고 탄복도 나왔다.
우암은 멀리 빗줄기 속으로 말을 타고 멀어져 가는 그 무관의 뒷모습을 오래 지키고 있었다.
드디어 소나기가 멈추자 우암은 주막을 나오며 이런 생각을 했다.
『응, 참으로 쓸만한 사람이군. 거창한 대장부의 임기웅변이요, 특출한 인간의 기지로군. 좋은 일자리를 하나 맡길 만한데…』
우암은 주막을 나오면서 주인에게 그 무관의 행적을 물었다.
안주병사(兵使) 아무개라고 알려 주었다. 우암은 환궁한 즉시 그를 불러 술상을 벌이고 그를 평안병사(平安兵使)로 승진 발령하였다.
효종 때 북벌(北伐)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나고 있을 때 역시 중추적인 인물은 무관에 이완(李浣), 문관에 우암이었다.
우암은 몸도 튼튼하고 힘이 장사였다 한다. 문장과 드문 국량(局量)은 따를 사람이 없었다 한다.
후일 전해진 이야기로는 정읍(井邑)에서 사약(死藥)의 약사발을 받을 때 한 사발로는 숨을 거두지 않아 세 사발이나 먹었으며 그래도 거두지 않아 항문을 틀어막아 약이 새지 못하도록 한 것만으로도 그의 튼튼했던 몸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사약을 받을 당시 83세의 고령으로 멀리 제주도에서 오는 몸이라서 지극히 쇠약해 있었다 한다.
우암이 이조판서로 있을 때의 일이다.
조상의 묘에 비를 세우기 위하여 큰 비석에 글씨를 써서 눕혀 놓았었다.
마침, 지나는 어떤 사람이 눕혀진 쪽의 글을 읽어 보고자 하자 그는 십여명이 모여들어야 움직이는 비석을 한 손으로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하여 글을 읽게 하였다 하니 그의 힘을 감히 짐작할 수 있다.

우암은 1697년(宣祖 40年) 11월 12일 충남 옥천군 구룡촌(沃川郡 九龍村)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재명(才名)이 이웃 고을에까지 떨쳤으며 인성이 지극히 맑았다.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에게 사사하고 율곡(栗谷)의 학업을 이어 조선의 주자학을 개척하였으며 27세에 장원 급제하여 한때 봉림대군(鳳林大君 : 仁祖의 第2子 뒷날의 孝宗)의 스승이기도 했다.
또한 1658년 (顯宗 9년)에 예조참판(禮曹參判)을 거쳐 벼슬이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렀다.
숙종 15년(1689년) 2月 제주도에 유배되었었는데 그해 다시 조정의 명령을 받고 제주도에서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 갑자기 명령이 변경되어 정읍(井邑)에서 사약을 받게 되었다.
노령을 넘어 정읍에 도착하자 아들과 조카 그리고 문하생들이 들어가 인사를 드렸으나 몹시 지쳐 있었다 한다.

선생은 돌아가시기 직전 수제자인 권상하(權尙夏)의 손목을 잡고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내 일찍이 들음에,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다 하였거니와 지금 인생 팔십이 넘었어도 들은 바가 없이 죽으니 나의 유한인가? 묘는 거창한 비석을 세우지 말고 자그마한 돌을 세워, 두어 줄로 표시하면 만족하겠다. 우리는 나라가 작고 국력이 약하여 비록 뜻을 이루진 못했지만 항상 인통함원(忍痛含寃) 박부득이(迫不得已)를 가슴 깊이 새겨 동지들에게 전하여 잊지 않으면 좋겠다.』 라는 유언이었다.
우암 선생이 수명(受命)한 후 6년이 지나 숙종대왕은 무고(誣告)임을 깨닫고 박탈했던 관직을 다시 내리고 문정(文正)의 시호(諡號)를 내렸다.
그리고, 1695년에 전라도 유림들의 상소로 정읍의 모촌(某村 : 井邑市 上坪洞)에 고암서원(考巖書院)을 세우고 선생을 추모하는 제사를 모셨다. 1731년 지방 유지들의 발의로 지금 정읍시 장명동(長明洞)에 '송우암 수명 유허비(遺墟碑)'를 세워 지금도 보존되어 오고 있다.
선생이 돌아가시자 수많은 유림들과 정읍 주민들이 통곡을 했었다니 선생의 높은 인격 앞에 다시 숙연해 진다.

 

자료제공:[ 정읍의 전설 ] 김동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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