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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국사봉은 지금도…
작성자 관리자

정읍시 입암면 마석리(笠岩面 磨石里) 가는들 부락 뒷산의 아름다운 봉우리가 국사봉(國師峰)이다.
가는들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옛부터 매(송골매)가 많이 산다하여 왼쪽 봉우리를 매봉, 오른쪽 봉우리를 국사봉이라 부르고 있다.
조선(朝鮮)시대 한 임금이 돌아가시자 조정에서는 명당(明堂)찾기에 소동이 벌어졌다.
임금의 묘를 아무데나 쓸 수도 없고 또 아무나 땅을 선정할 수도 없어 문제가 된 것이다.
조정에서는 전국에서 유명하다는 지사(地師)를 다 불러 들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땅을 잘 잡는다는 지사 몇 명만을 골라 전국을 샅샅이 뒤져 명당을 잡도록 명령을 내렸다.
명을 받은 지사들은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명당을 찾고 있었다.
마침, 입암면을 지나던 한 지사가 국사봉에 이르렀다. 이 지사가 보기엔 참으로 좋은 명당자리가 국사봉 밑이었다.

그러나, 이 지사는 서운한 빛이 감돌았다.
명당은 명당이지만 임금의 묘를 쓸만한 큰 명당은 못된다고 애석해 하는 것이었다.
명당으로서 다 갖추었는데 한 가지를 갖추지 못했으니 임금의 묘소로서는 정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 갖추지 못한 한 가지란 무엇이었을까? 지금까지도 알려지지 않고 있을 뿐이다.

이 지사는 국사봉을 떠나면서
『아까운 걸, 그것 참, 아까운 걸. 이런 명당도 드물단 말야. 옥녀탄금혈(玉女彈琴穴)이 분명한데 한 가지를 갖추지 못했으니…』 하는 것이었다.
발길을 돌리면서 내내 아쉬움 때문에 돌아보곤 했다 한다.
이 지사가 돌아간뒤 그 산봉우리를 국사봉(國師峰) 즉 나라에서 제일가는 지사가 돌아본 산봉우리라 하여 국사봉이라 부르게 됐다 한다.
국사봉은 그 모양이 각시가 홀로 앉아 있는 모습이라 하여 옥녀봉(玉女峰)이라고도 부른다.
지금도 바라보면 과연 어느 얌전한 색시가 혼자서 앉아 있는 자태를 그대로 지니고 있다.
국사봉은 정읍시 월성리(井邑市 月城里)에서 보면 참으로 아름답다고 한다.
월성리에서 쳐다보면 그 모양이 꼭 붓(筆)처럼 생긴 봉우리로 보인다.
그래서 월성리에선 공부 잘하는 선생이 끊어질 않는다고 옛부터 전해지고 있다.
또 어디서든지 이 국사봉이 보이는 마을은 문필가(文筆家)가 많이 나온다는 전설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그런 까닭인지 월성리 근방 여러 마을엔 특히 교사 출신이 현재에도 가장 많이 배출되고 있다고 전한다.

산이 있으면 들이 있고, 들을 넘으면 또 산이 있음이 자연이다.
그런데, 산이 있으면 그 속에 또 물이 있음을 본다. 물과 인간은 불가분의 관계다.
메소포타미아나 황하 그리고 인더스 등 세계의 문명 발상지가 모두 물이 많은 주변이었음을 상기할 때 국사봉 밑 아름다웠던 물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국사봉은 상봉에서 약 10m 내려온 지점에 늪(沼)이 있었다.
그런데 이 늪은 보통의 물이 고인 곳과는 판이한 점이 많았다.
늪엔 항상 시퍼런 물이 가득했다. 물빛이 파랗다 못해 초록빛을 띠었으니 너무 깊기 때문이었다.
이 늪은 폭은 좁은데 깊이가 무진장 깊은 게 특징이었다.
얼마나 깊은가를 실험하기 위하여 돌에 명주실을 달아 넣었는데 명주실꾸리 3개가 들어갔다고 한다. 그러니 그 길이가 수백 길이 된다는 말이 된다. 한 노인에 의하면 불과 60년 전만해도 이 늪을 볼 수가 있었다고 한다.

또, 그 물이 좋다고 소문이나 물을 길어 먹는 주민들이 있었다 한다. 물이 하도 좋아 짐승들과 산새들이 달려와 먹었으며 이 물을 많이 먹으면 나는 새도 건강해 지며 장수한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다. 지금도 그 늪의 자리에는 물기가 있어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한다.

국사봉 밑이 구마석(舊磨石), 즉 가는들 부락인데 가는들 앞 400m 쯤 떨어진 곳에 낮은 야산이 있다.
병풍처럼 빙 둘러 산이 막아주고 있기 때문에 아늑하고 조용하고 편안한 마음이 든다.
그런데, 비록 낮은 산이지만 옛부터 전설이 있었다.
이 야산 속에는 국사봉의 혈맥이 뚜렷이 이어지고 있어 만약 이 산을 파게 되면은 혈맥(血脈)이 끊겨 피가 흐르게 될 것이며, 가는들 부락이 부유하고 생동하는 마을로 발전하는 것은 이 혈맥의 줄기찬 힘의 영향이라고 전해지고 있었다.
이 곳은 산이 많기 때문에 교통이 불편한 곳이었다.
옛날에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도 동네까지는 버스가 들어오질 않는다.
해방전의 일이었다. 교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길을 내야만 했다.
별 수없이 이 야산에도 길을 뚫어야만 했다.
이 산을 잘라 길을 내면 대흥리(大興里)로 통하는 길이 된다. 그러면, 상당히 교통이 편리하게 되는 것이다.

마침내 주민들이 울력을 하여 삽과 괭이를 가져와 길을 내기 위해 산허리를 잘라 놓았다.
그러자, 잘라진 땅 양쪽에서 빨간 피가 섞인 물이 계속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 산 속에 피가 흐른다는 전설을 들어온 주민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산을 갈라놓았는데 실제 핏물이 흐르는 걸보고 겁이나고 놀라 흙을 덮어 메우고 말았다.
다시 메워진 후 동네에는 아무일도 없었다.
이런 신기한 일이 일어나고 수십 년이 흐른, 지금으로부터 십 여년 전 새마을 운동의 붐을 타고 전국적으로 농로가 개설되고 넓혀지자 이 피가 흐르던 산이 다시 잘라지고 말았다 그런데 이번엔 핏물을 볼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오래 전에 길을 내다가 혈맥이 잘라졌던 탓으로 이제 피가 흐르지 않는다고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다. 지금 뚫려져 있는 길은 좁은 길이지만 대흥리로 통하는 길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길이 다시 나면서부터, 부골이었던 마을이 가난해졌고 가구 수와 인구가 부쩍 줄었으며 - 물론 도시로 떠나는 시대의 탓도 있겠지만 - 동네가 생기가 없고 삭막해졌다.

국사봉은 예나 지금이나 푸르름 속에 각시의 천연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말이 없다.
국사봉 밑이 명당이란 소문도 하도 파다하여 세상이 다 아는 일인데 거기에 가는들 부락의 남씨(南氏)집안이 묘를 쓰고 말았다.
가는들은 수백년 전부터 의령남씨(宜寧南氏)들이 많이 살고 있던 부락이다.
현재 가는들에 살고 있는 남섭희(南燮熙) 씨의 5대 할아버지인 남기화(南基和)씨의 묘를 이 곳에 썼던 것이다.

이 묘를 쓴 후, 남씨 집안은 크게 우애하고 자손이 번창했으며 즉시 진사(進士) 벼슬이 나오는 등 문중(門中)에도 아름다운 경사가 많이 나왔다 한다.
명당을 쓰게 되면 그 지기(地氣)가 자손에게 감응된다고 한다.
그러기에 생기(生氣)는 친자(親子)에게 감응된다고 했는지 모른다.
유명한 도선(道詵)의 풍수(風水)설화 중, 과부 아들이 중을 따라가다가 십년 공부를 하고 지관이 되었다.

이 지관(地官)이 깊은 산중을 내려오는데, 정승 자리를 발견하고 지팡이를 꽂았는데 지팡이가 해골 오른쪽 눈에 꽂혀 빠지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명당을 써서 많은 자손들이 조상의 덕을 본다지만 명당 잡는 지관노릇도 어려운 일이고 명당을 미리 잡아 땅 속에 누어 있는 걸 보면 그 곳도 만원인 모양이다.
신부처럼 조용하고 아담한 국사봉, 그 밑에 흐르던 물줄기, 듣기만 해도 마음 서늘하고 가슴의 정화(淨化)를 보는 듯 싶다.

 

자료제공:[ 정읍의 전설 ] 김동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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