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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 황토현 전적

  • 종목사적
  • 지정일1981년 12월 10일
  • 시대조선 말기
  • 소재지정읍시 덕천면 하학리 산3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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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정보

이곳은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 당시 동학농민군이 관군(官軍)을 물리친 전적지이다.
이 곳에서의 승리는 동학농민군의 혁명운동(革命運動)이 크게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고부군수(古阜郡守) 조병갑(趙秉甲)의 학정(虐政)에 대항하여 전봉준 선생의 지휘하에 제폭구민(除暴救民) 보국안민(保國安民)의 기치를 들고 일어난 동학혁명군은 고부(古阜) 백산 (白山)에 집결해 있다가 조선 고종(高宗) 31년(1894년 甲午) 5월 11일(음 4월 7일) 새벽에 인근 고을의 농민군과 함께 이 곳에 진을 치고 있던 전주 감영(全州 監營)의 관군을 기습 공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이로부터 동학농민군의 기세가 높아져 정읍(井邑) 흥덕(興德) 고창(高敞) 무장(茂長) 등 각 현(縣)으로 그 세력이 확장되었으며, 나아가 전주(全州)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부의 무능으로 청 일(淸 日)의 군대가 개입하게 되자 외세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하여 동학농민군은 정부와 전주(全州)에서 화약(和約)을 맺고 철수하여 전라도(全羅道) 53개 지역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고 개혁정치(改革政治)를 추진하였다.
그러다가 청일전쟁(淸日戰爭)을 일으킨 일본군의 침략이 뚜렷해지자 농민군은 일본군의 침략에 항쟁하기 위하여 다시 일어나 각지에서 용감히 싸웠다.
그러나 우세한 신무기(新武器)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공주(公州) 우금치(牛金峙) 전투에서 패한 뒤 그 세력이 크게 떨어지고 전봉준 선생을 비롯한 지도자들이 체포되어 순국하게 되자 정치의 개혁을 주장하고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동학농민운동에서 보여준 개혁정신(改革精神)은 후대에 영향을 끼쳤다.
황토현(黃土峴)은 글자 그대로 황토로 덮인 작은 언덕이다. 이곳은 태인(泰仁)에서 고부 (古阜)로 연결되는 옛날 국도인 태고선(泰古線)인 도로(道路)로서 그 때는 교통의 요지였으며 1894년 동학혁명 당시 혁명군의 전승지였다.
이 해 음력 1월 10일 배들(梨坪) 농민(農民)들이 만석보(萬石洑) 보세(洑稅)에 항거하여 봉기(蜂起)한 고부농민봉기(古阜農民蜂起)에 정부에서는 장흥부사(長興府使)인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按 使)로 보내어 다스리게 했으나 오히려 민심을 자극하여 동학의 3월 봉기(蜂起)를 야기(惹起)하였다.

백산(白山 지금 扶安郡 白山面 龍溪里. 당시는 古阜郡)에 집결한 동학농민군 약 4,000명이 전라감영군(全羅監營軍) 2,260명을 맞아 싸운 곳이다.
동학농민군이 고부, 백산(白山)에 집결해 있는데 그 때 전라감영(全羅監營)의 우영관 이 경호(右領官 李景鎬)는 영병(營兵: 監營軍) 700과 토병(土兵: 民兵) 560명, 보부상대(褓負商隊) 1,000여명을 거느리고 백산(白山)에 출동하니 이 때 동학농민군(東學農民軍)은 관군 (官軍)을 두승산(斗升山) 북쪽으로 유인하여 사시봉(德川面 憂德里에 있는 謝矢峯. 德川面 姉木里 감냉이)에 진(陣)을 치고 동학농민군을 추격하는 관군은 5월 10일 해질 무렵 황토현에 유진(留陣)하였으니 서로간의 거리는 1㎞ 정도 였다.
다음날인 5월 11일(음 4월 7일) 새벽에 관군은 동학농민군을 기습하였으나 혁명군은 관군이 이날밤 기습해 올 것으로 예측하고 관군을 유인하여 이를 격파하니 황토현의 관군 진지를 습격하여 대승(大勝)을 거두었다.

이 싸움에서 영관 이경호(領官 李景鎬)를 비롯한 많은 관군들이 전사(戰死)하였다.
1963년 갑오동학혁명기념탑건립준비위원회(甲午東學革命記念塔建立準備委員會. 委員長 李秉岐, 副委員長 黃冕周, 黃義善, 朴範相)가 구성되어 130만원 공사비로 높이 28척(尺)의 팔 각체석탑(八角體石塔)이 이해 10월 3일 제막(除幕)되었다.
그리고 1970년에는 도비(道費)로 관리답(管理沓) 400평을 주었다.

1976년 4월에 전북특별자치도(全北特別自治道) 기념물(記念物) 제34호로 지정되었는데 1981년 사적(史蹟) 제295호로 격상(格上) 성역화 사업(聖域化 事業)을 추진하여 1988년 12월 9일 그 공사를 맡았다.

총면적(總面積) : 168,501㎡

기념관(記念館) : 40평

1. 백산 3월 봉기(白山 三月 蜂起)

2. 전주집강소(全州執綱所)

3. 삼례 9월 봉기(參禮 九月 蜂起)

4. 우금치전투(우금치전투) 외 유품 자료(遺品 資料)

강당(講堂. 濟民堂) : 40평. 교육 학습장으로 사용된다. 전봉준 선생의 영정(影幀)이 뫼시여 있다.

구민사(救民詞) : 사당(祠堂)이다.

해몽 전공(海夢 全公: 全琫準)을 중심(中心)으로 좌측(左側)에 개남 김공(開南 金公: 金開南) 우측(右側)에 초산 손공(楚山 孫公: 孫華仲)과 참전제위(參戰諸位: 그 외 甲午東學革命 參戰人)를 뫼시고 있다.

이는 갑오동학혁명 100주년이 되는 해인 1994년에 정읍시(井邑市)에서 구민사(救民祠)에 4위(四位)만을 우선 모시고 갑오동학혁명 백주년 기념(甲午東學革命 百周年記念) 행사를 하였다.

전봉준(全琫準) 선생 동상(銅像) : 높이 2.7m, 좌대 3.7m
내삼문(內三門: 輔國門) : 7평
외삼문(外三門: 濟世門) : 14평
양영장(野營場) : 4,747평. 건평(建坪) 207평, 강당(講堂) 90평이다.

황토현전적지 정화기념비문(黃土峴戰迹地 淨化記念碑文)

濟世安民과 倭夷殲滅을 旗幟로 倡義한 甲午東學農民蜂起는 反封建 反侵略의 農民戰爭으로 서 韓國近代史에서 찬연히 빛난다.
위대한 先覺者 全琫準을 중심으로 한 農民軍은, 東學의 조직과 힘을 통하여, 王朝末의 구조적인 矛盾을 개혁하고, 外勢를 驅逐하며,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높은 理想을 具顯하기 위하여 封建社會의 解體와 民族의 力量을 結集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겨레와 나라의 앞날을 위하여, 자신을 불사른 농민들의 自主精神은, 近代的인 民族意識을 胎動시켜 義兵戰爭에로 그 命脈이 닿았고, 뒷날 三一運動으로 이어지는 抗日救國鬪爭의 큰 줄기를 이루었으니, 그 정신은 앞으로도 民族運動의 횃불로서 우리 가슴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民族正氣를 드높인 先烈들의 거룩한 뜻을 기리기 위하여, 全斗煥大統領의 諭示로 큰 싸움터였던 이곳을 淨化하고 碑를 세운다.

1987년 10월 1일
國 史 編 纂 委 員 會
委員長 朴 永 錫 지음
書藝家 權 甲 石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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