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이 건물은 일명 녹두장군인 전봉준 선생이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을 일으킬 당시 거주하였던 집이다.
전봉준 선생은 조선왕조(朝鮮王朝) 철종(哲宗) 6년(1855)에 이 지방의 양반 가문에서 출생, 고종(高宗) 27년(1890) 동학에 입도하였으며, 서당(書堂) 훈장(訓長)으로 있었다.
당시 전국의 농촌은 일부 탐관오리(貪官汚吏)의 학정(虐政)으로 농민들의 원성(怨聲)이 높아지고 있었으며, 이곳 고부군(古阜郡) 역시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만석보(萬石洑) 수세 (水稅) 강제징수 등 학정에 시달린 농민들의 생활은 피폐하고 원성이 높았다.
이 때 선생은 고부군(古阜郡)의 동학 접주(接主)로 분노에 찬 농민들과 동학교도의 조직을 이용 제폭구민(除暴救民) 보국안민(保國安民)의 구호를 내세우고 동학운동을 주도하였던 것이다. 고종 31년(高宗 1894) 갑오 동학(甲午 東學) 혁명(革命) 당시 전봉준(全琫準 1854~1895) 이 살았던 오두막집으로 흙담 4칸 집이다.
그런데 서편으로 한칸을 근래에 붙여 지은 것으로 원래는 방 1칸, 광 1칸, 부엌 1칸으로 당시 우리나라 가난한 농민들이 살았던 전형적인 가옥 형태이다.
이 고택(古宅)은 길이 보존하기 위하여 정읍시에서 1974년에 국비와 군비로 크게 수리한 집이다.
정면 4칸, 측면 1칸의 안채(초가)는 높이 15㎝의 잡석의 출대 위에 세워졌다.
일반적으로 부엌은 서쪽에 위치하여 이에 이어서 큰방과 윗방이 배치되는 것인데 이 집은 이 순서를 무시하고 있다.
끝방은 방(房)으로 보다는 살림살이 등을 넣어두는 헛간으로 사용된 것 같다.
큰방과 윗방은 장지로 칸막이가 되어 필요한 경우 공간으로 터놓을 수 있으며 천장은 두 가지 다 연등 천장이다. 그리고 두 방의 전면에는 퇴를 놓았으며 대살문으로 드나드는 끝방 전면에 반쪽에는 짧은 담을 두르고 이곳에 땔나무 등을 두었으나 이것이 본래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부엌의 전후벽에는 널문을 달아 필요한 때에는 잠글 수도 있도록 되었다.
대문의 동편에는 잿간을 겸한 변소가 있으며 출입문으로는 한 짝의 열매문을 달았다.
주위에는 흙담이며 짚으로 된 이엉을 덮었다.
전봉준의 공초록(供招錄)에는 이 곳에 와서 수년이 되었다고 했는데 촌로(村老)들의 말에 의하면 처음 이웃 마을 양교리(陽橋里 양간다리)에서 옮겨온 것이라 한다.
갑오년(甲午年 1894) 1월에 봉기한 후 안핵사 이용태(按 使 李容泰)가 내려와 동학교인이라고 지목되는 사람의 집을 모두 불질러 버렸는데 이 때 전봉준의 집도 불타버렸다고 한다.
그 동안에 이론(異論)이 있었으나 1974년에 보수(補修)를 하면서 해체(解體)작업을 하는 중에 밝혀진 상량문(上樑文)에 무인(戊寅) 2월 26일(高宗 15年 1878) 세운 것으로 되었으니 어쩌면 전부 타지는 않고 남아 있는 폐옥(廢屋)을 보수하여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