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이 건물은 신라말(新羅末)의 유현(儒賢)인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과 조선(朝鮮) 중종(中宗)때 태인현감(泰仁縣監)이었던 신 잠(申 潛)을 향사(享祀)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원래는 태산서원(泰山書院)이라 하던 것을 숙종(肅宗) 22년(1696)에 사액(賜額)됨으로써 무성서원(武城書院)이라 하게 되었다.
사우(祠宇)에는 최치원(崔致遠)을 비롯하여 신 잠(申 潛), 정극인(丁克仁), 송세림(宋世琳), 정언충(鄭彦忠), 김약묵(金若默), 김 관(金 灌) 등의 향현(鄕賢)을 배향(配享)하였다. 현존 건물로는 현가루(絃歌樓)를 비롯하여 강당(講堂), 동서재(東西齎), 사우(祠宇), 비각(碑閣) 등이 있다.
사우는 성종(成宗) 15년(1484)에 세워진 것이나 헌종(憲宗) 10년(1844)에 중수(重修)되었고, 강당은 순조(純祖) 25년(1825)에 불에 타 없어진 것을 순조(純祖) 28년(1828)에 중건하였다.
이 서원에는 성종(成宗) 17년(1486) 이후의 봉심안(奉審案), 강안(講案), 심원록(尋院錄), 원규(院規) 등의 귀중한 서원 연구자료가 보존되어 있다.
신라(新羅)시대 대문호(大文豪)이며 정치가(政治家)였던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이 신라 정강왕(定康王) 1년에 태산군수(泰山郡守: 지금의 泰仁)로 와서 있는 동안 치적(治積)이 뛰어나서 군민의 칭송을 받다가 합천(陜川)군수로 떠나게 되니 그를 흠모하는 나머지 선생의 생전(生前)에 월연대(月延臺: 지금의 칠보면 무성리 성황산의 서쪽 능선)에 생사당(生祠堂: 생존하고 있는 사람을 모시는 사당)을 세우고 태산사(泰山祠)라 부른 것이 시초였다.
이 사당은 고려(高麗) 말에 훼파(毁破)되었다가 조선(李朝) 성종(成宗) 14년(1483. 정극인 선생 사후 2년)에 유림(儒林)들의 발의로 월연대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겼으며 지금의 그 자리에는 불우헌 정극인(不憂軒 丁克仁)이 창설한 향학당(鄕學堂)이 있었다는 전설도 있다.
그 뒤 조선 중종 39년(1544)에 태인 현감(泰仁 縣監)이던 영천 신 잠(靈川 申潛)이 부임하여 7년 동안 선정(善政)을 베풀다가 동 서 남 북 학당(東 西 南 北 學堂)을 세우는 등 많은 치적을 남기고 명종 4년(明宗 1549)에 강원도 간성(杆城)군수로 이임하니 역시 주민들이 그를 사모하여 생사당(生祠堂)을 세우게 되었다.
숙종 22년(肅宗 1696)에 무성(武城)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아 이 두 사당(祠堂)을 병합하여 무성서원(武城書院)이라 했으며, 삼현(三賢)을 더 모시다가 뒤에 두 분을 더 모시니 칠 현(七賢)을 더 배향(配享)하게 되었다.
배향된 분은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영천 신 잠(靈川 申潛), 불우헌 정극인(不憂軒 丁克仁), 눌암 송세림(訥菴 宋世琳), 묵재 정언충(默齋 鄭彦忠), 성재 김약묵(誠齋 金若默), 명천 김 관(鳴川 金 灌) 등이다.
그 뒤 정조(正祖) 8년(1784)에 쌍계사(雙溪寺)로부터 최치원의 영정(影幀)을 모시었다. 이 서원은 고종(高宗) 5년(1868)에 대원군(大院君)의 서원 철폐령(撤廢令)에 의해서 위기 에 처했으나 당시의 현감, 유림(縣監, 儒林) 등이 청원하여 화를 모면했을 뿐 아니라 전라도(全羅道)의 철폐령에서 제외된 세 개(三個) 서원으로 필암(筆巖), 포충(褒忠), 무성(武城)서원 중 하나이고 원노(院奴) 30명, 세미(稅米) 3결(結: 약 9,000평)을 보조 받기에 이 르렀다.
현재 건물로는 사우(祠宇) 3칸, 명륜당(明倫堂) 5칸, 현가루(絃歌樓) 2층 3칸, 장수재(莊修齋) 4칸, 흥학당(興學堂) 4칸, 서호순비각(徐灝淳碑閣) 1칸, 고사(庫舍) 3칸 등이며 1992 년에 병오창의기적비(丙午倡義紀蹟碑)를 김성년(金成淵) 정읍군수(井邑郡守)가 세웠다. 문루(門樓)인 현가루(絃歌樓)는 원주(圓柱)를 세운 2층으로 된 기와집이며 문을 들어서면 정면 5칸, 측면 2칸의 강당(講堂)이 있고 3칸 대청(大廳)과 그 좌우에는 단칸의 협실(夾室) 이 있으며 동서재(東西齋)인 강수재(講修齋)와 흥학재(興學齋)가 있었으나 현재는 강수재만 남아 있다.
사우는 성종 15년에 지었으나 현재의 것은 1844년에 중수한 것이며 강당은 1825년에 불에 타 없어졌던 것을 1828년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동서재(東西齋)도 숙종(肅宗)때 건립하였으나 현재의 건물은 그 뒤 중수한 것이다. 사우(祠宇)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의 하나이며 이 서원에는 성종(成宗) 17년 (1486) 이후의 봉심안(奉審案), 강안(講案), 심원록(尋院錄), 원규(院規) 등의 서원연구(書院硏究)의 자료가 보존되어 있다.
제사(祭祀) 모시는 분들은 다음과 같다.
최치원(崔致遠)
경주인(慶州人)으로 자(字)는 해부(海夫)요 호(號)는 고운(孤雲)이니 신라(新羅) 헌안왕(憲安王) 1년(857)에 전라도 옥구(沃溝)에서 태어나 12세 때에 상선(商船)을 타고 당(唐)에 들어가 18세에 진사(進仕)가 되어 현위(縣尉)의 벼슬을 지내고 신라로 돌아오려 할 때 마침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 도통순관(都統巡官)이 되어 유명한 토 황소(討 黃巢)의 격문을 써서 천하에 이름을 떨쳐 전중시어사(殿中侍御使)를 제수 받았다.
그 후 4년을 지나 국신사(國信使)로 헌강왕(憲康王) 11년(885)에 귀국하니 헌강왕과 정강왕(定康王)으로부터 한림학사(翰林學士), 병부시랑(兵部侍郞)으로 태산군수(泰山郡守: 지금의 泰仁)로 부임했다.
진성왕(眞聖王)때 강양군(江陽郡: 합천의 옛 이름)에 있는 가야산에 들어가 그곳에서 남은 생애를 지냈다.
선생은 중국(中國)의 문물(文物)을 동방(東方)의 나라 신라(新羅)에 들여 왔으며 이학(理學)의 유종(儒宗)을 이루었고, 그의 저서에는 계원필경(桂苑筆耕) 등 20권이 있다.
고려(高麗) 현종(顯宗) 11년(1020)에 문창(文昌)의 시호(諡號)를 내렸다.
신 잠(申 潛)
고령인(高靈人) 자(字)는 원양(元亮) 성종 22년(成宗 1491) 3월에 서울에서 태어나다.
중종 8년(中宗 1531)에 23세로 진사(進士)시험에 합격하고 중종 14년(中宗 1519)에 문과에 등제(登第)하여 예문관 검열(藝文館 檢閱)이 제수(除授)되었다.
예로부터 신하가 입시(入侍)할 때 사관(史館)에 들어가는데 입시하는 사람보다 뒤에 들어갔다가 먼저 나오는 것으로 되어 있다(後入先出).
신 잠은 이러한 사실을 기록하는데 잘못 기록할 염려가 있으니 사람이 먼저 들어갔다가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성종(成宗)은 이에 옳다고 하여 먼저 들어갔다가 뒤에 나오는(先入後出)법으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폐지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한때 관(官)에서 파직(罷職)당하고 중종 16년(中宗 1521)에 장흥(長興)으로 유배(流配)되기도 했다가 중종 38년(中宗 1543)에 다시 주부(主簿)로 기용되어 태인 현 감(泰仁 縣監)으로 와서 7년 동안 동 서 남 북의 사학(四學)을 세우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고 명종 7년9明宗 1552)에는 상주 목사(尙州 牧使)로 부임하여 많은 치적을 남기었다.
명종 9년(明宗 1554) 12월 2일에 나이 64세로 세상을 떠나니 다음해 3월에 아차산(娥嵯山)에 장사하였다.
태인(泰仁) 백성들이 선생을 추모하여 태산사(泰山祠)에 배향(配享)하고 선정비(善政碑)를 세웠다.
정극인(丁克仁)
영광인(靈光人)이다. 자(字)는 가택(可宅)이며 호(號)는 불우헌(不憂軒)이니 태종 1년 (太宗 1401) 8월 6일에 경기도 광주군 두모포리(京畿道 廣州郡 豆毛浦里: 지금의 서울시 성동구 옥수동)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학문을 하여 세종 11년(世宗 1429) 사마시(司馬試: 進士試驗)에 합격하였다.
정극인은 평소의 소신이 척불(斥佛)이었는데 당시의 군왕(君王)이 흥천사(興天寺)에 사리전(舍利殿)을 창건하려 하자 조선조(朝鮮朝)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들어 태학생(太學生)들의 권당(捲堂: 동맹 휴학)을 앞장 서서 주장한 탓으로 왕이 크게 노하여 정극인을 참형(斬刑)에 처하라 하는 것을 간신히 사형을 면하고 북방으로 귀양살이를 갔었다.
귀양에서 돌아온 그는 처가(妻家: 古縣內에 있는 九皐林氏)가 있는 태인에 내려와 초가삼간을 짓고 그 집을 불우헌(不憂軒)이라 하였다.
그 뒤 문종(文宗)의 부름을 받아 관직(官職)에 나갔고 주위 친구들의 권유로 53세인 1453 년에 문과(文科)에 응하여 급제(及第)하였으며 1470년에 70의 나이로 벼슬에서 물러나 태인에 돌아온 1475년에 동중향음주(洞中鄕飮酒)라는 친목계(親睦契)를 만들어 고현동 향약(古縣洞 鄕約)의 시초를 만들었다.
또한 불우헌가(不憂軒歌), 불우헌곡(不憂憲曲)과 같은 왕의 성은(聖恩)에 보답하는 노래를 읊었고 또한 상춘곡(賞春曲)을 지어 후세에 남기기도 하였다.
그 뒤 1481년 8월 6일에 태인에서 돌아가니 그 나이 81세요 묘(墓)는 지금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은석동에 있다.
송세림(宋世琳)
여산인(勵山人)이다. 자(字)는 헌중(獻中)이요 호(號)는 눌암(訥菴)이니 성종 10년(成宗 1479) 12월 14일에 태인(지금의 칠보면 시산리)에서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20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장원과(壯元科)에 뽑혀연산 9년(燕山 1503)에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 전임하였다.
뒤에 태인에 돌아와 불우헌 정극인이 창설한 향학당(鄕學堂)을 다시 일으켜 향리(鄕里)의 청소년을 교육하였다.
중종 14년(中宗 1519) 1월에 돌아가니 그 때 나이 41세였다.
정언충(鄭彦忠)
경주인(慶州人)이다. 자(字)는 양구(良久)요 호(號)는 묵재(默齋)이니 태인에서 태어났다.
인품이 엄중하여 언눌행민(言訥行敏: 말은 더듬고 행동은 민첩하다는 뜻)하였던 바 진사(進士)로서 과거(科擧)에 뜻을 두지 않고서 오로지 도(道)를 구함이 홍범태극(洪範太極)에 힘써 특히 역학(易學)에 정수하여 길흉소장(吉凶消長)의 이치를 능히 풀었으며 진퇴존망(進退存亡)의 기(機)를 구분하였다.
또한 효행이 지극하여 3년간 시묘(侍墓)를 하였다.
일재 이 항(一齋 李 恒)과 더불어 제생의 사우(師友)가 되었으며 향학(鄕學)을 부흥시켜 향리(鄕里)의 후진 교육에 온 힘을 다하였다.
김약묵(金若默)
도강인(道康人)으로 자(字)는 태용(太容)이요 호(號)는 성재(誠齋)이니 연산 6년(燕山 1500) 2월 1일 곡성(谷城) 관아(官衙)에서 태어났다.
중종 35년(中宗 1540)에 별시(別試)에 급제(及第)하여 명종 4년(明宗 1549)에 통훈대부(通訓大夫) 성균직강(成均直講), 한산군수(韓山郡守)를 역임하고 명종 10년(1555)에 사성(司成)을 받고 명종 11년(1556)에 집의(執義)가 되고,
명종 12년(明宗 1557)에 양주목사(楊洲牧使)로 부임하였으며 명종 13년(1558) 7월 15일에 양주 관아에서 59세로 세상을 떠나다.
김 관(金 灌)
도강인(道康人)으로 자(字)는 옥이(沃而)이다.
호(號)는 명천(鳴川)이니 선조 8년(宣祖 1575) 5월 25일에 고현내(古縣內)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효성이 지극하여 가정의 교훈을 이어받아 성장하면서 불우헌, 눌암 등이 세워 내려온 향학당(鄕學堂)의 규약에 따라 학문을 가르쳤다.
광해 7년(光海 1615)에 진사(進士)시험에 합격을 하였으나 그 때 광해의 난정(亂政)으로 폐모(廢母)에 이르자 향리에서 송치중(宋致中), 김감(金堪) 등과 송정 십현지회(松亭 十賢之會)를 만들어 초야에 묻히고 말았다.
인조 5년(仁祖 1627) 정묘호란(丁卯胡亂)때 김사계(金沙溪)를 따라 창의(倡義)하여 의곡 (義穀)을 모집하는데 성심을 다하였다.
인조 13년(仁祖 1635) 1월에 60세로 세상을 떠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