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戶口總數』(1789)에 정읍현 남일면 신성리(井邑縣 南一面 新城里)로 기록되어 있는 마을로 월성(月成)마을 위쪽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지명으로 보인다. 1914년 일제의 대대적인 행정구역 통폐합 때 내장면 신월리 신성(內藏面 新月里 新城)으로 개편되었다. 도강 김씨(道康 金氏)가 터를 잡아 입주한 마을이며 지금도 주성(主性)을 이루고 있다.
신성 마을에 교우촌이 형성된 것은 丙寅迫害(병인박해, 1866)때였다. 순교성인 황석두(黃錫斗,루가)의 행적과 순교사실, 그리고 순교 성인(殉敎 聖人) 다블뤼(안) 주교, 위앵(민) 신부, 오메트로(오) 신부, 장주기(요셉)의 순교 사실을 알 뿐 아니라 이들의 순교 사실을 교회에 증언한 황막달레나가 살고 있었던 마을이다.
기록상으로 처음 나타나는 공소(公所)는 1882-1883년에 설립된 군령교, 불바래기, 갈재 公所이다. 1882년 2월 전주교우 김순문(全州敎友 金淳文)이 정읍군 내장면 신성리(井邑郡 內藏面 新城里)로 이사하여 살게 되었고, 1년이 지나 김찬경(金贊京), 배사진(裵四鎭), 김명보(金明寶)등 신자들이 이사해 와서, 27명의 신자가 1889년 3월에 첫 公所를 치렀다. 그 후 1885-86년 덕가리, 대숲골, 북창 公所, 1892년 부무실 公所, 1893-94년에는 개운리(開雲里), 운암리(雲岩里), 신성리(新城里) 公所가 설립되었다. 1897-1898년에는 종목안, 귀암리, 말허리골 公所가 설립되었다. 이로 보아 1900년 이전의 정읍지역에는 14개 정도의 公所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1900년대에는 김승연(金承淵,아오스딩) 신부가 관할하는 정읍 지역에는 등내, 불당골, 대숲골, 회령동, 개암리, 운암리, 구량실, 신수동 등 8개 公所가 있었다.
이 가운데 신성리(新城里) 公所 신자들은 산허리에 화전을 일구어 담배 농사를 지으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1897년에는 드예 신부가 새로운 전교지인 목포(木浦)에 진출하기 전에 순창 아천리(淳昌 阿川里)에 머물다가 훗날 신성리 본당(新城里 本堂) 구역이 된 公所를 담당하였다. 1901년 金承淵(아우구스띠노) 신부가 지금까지 드예신부가 맡아 온 신성리 본당 구역을 맡게 되었다. 김신부는 정읍(井邑)과 장성(長城) 쪽을 관할하다가 1903년에 신성리(新城里)에 부임하게 된다. 김신부의 재임기간동안 담당 구역에서 개신교(改新敎)가 정읍(井邑), 장성(長城), 덕흥(興德), 남원(南原) 등지에서 번창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정읍(井邑)에서 천주교천주교(天主敎)와 개신교(改新敎)가 동시에 교세를 확장하고 있었다는 것은 이 고장 井邑 사람들의 종교적 심성을 말해주는 대목으로 생각된다.
1905년 조선교구장(朝鮮敎區長) 뮈텔(Mutel/문덕효(閔德孝)) 신부의 순시가 있었던 것도 개신교(改新敎)의 번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신성리 11월 18일/능다리 11월 24일 방문) 김신부는 교우촌 어느 곳에 본당을 세울지를 물색하다가 신성리(新城里)에 세울 것을 결정하고 1903년 5월경 新城里에 부임하였다
김영구(金榮九,베드로/1961년 부임. 12대) 신부가 쓴 天主敎 포교(布敎)에 대한 호남지역의 역사를 다룬 천주교 호남 발전사({天主敎 湖南發展史』)의 기록에 의하면 1907년에는 프랑스의 미알롱(맹석호) 신부가 이곳에 2대 신부로 부임하여 16년간의 포교활동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때 맹 신부는 순창(淳昌), 고창(高敞), 부안(扶安), 장성(長城)을 비롯하여 담양(潭陽)등지에도 지교회 36개소를 설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