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입암면 등천리는 신등, 원등, 군령을 포함한 마을로 입암산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은 폐쇄되었으나 마을 위쪽으로 노령터널이 있고, 아래쪽에 호남선 철도가 놓여져 마을을 중심으로 철도가 위·아래를 지나게 되어 있다.
등천리 공소(公所)는 조화서, 조윤호 성인의 치명 사적을 소상히 아는 조프란치스코가 살았던 마을이며, 근래에는 범석규 신부를 배출한 마을이다. 공소(公所)는 6.25전쟁 때 인민군의 앞잡이들이었던 빨치산들에 의해 소실되었다. 이때 성경 공부를 위해 한지에 교리(敎理)를 적어 묶었던 책자를 포함해서 공소(公所) 집기가 모두 불타 없어졌다. 공소(公所)는 6.25전쟁 4년 뒤 교우들의 신앙심 하나로 현재의 모습으로 건축(15평)되었다.현재도 이 공소(公所)에서 일요일 8:00시부터 9시까지 회장인 서재영(야고보/65세)씨의 주관으로 예배를 보고 있다. '녹두밭웃머리'라고도 불렀을 만큼 척박했던 이 마을에서 당시 피난했던 교우들이 어떤 방법으로 생계를 유지했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
여느 교우촌(敎友村)처럼 궁벽한 산촌에서 담배농사를 지은 흔적도 없었다. 마을 앞 남쪽에 입암산이 위치하고 있어 약초로 생계를 유지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교우들은 한결같이 그런 교우들이 없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현재 입암산에 마가 자라고 있으나 이것도 상품성을 갖출 만큼 뿌리가 큰 것이 아니다. 따라서 고구마와 같은 밭농사로 생계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사실은 원등(原登) 마을 22호 중 스물 한 집이 천주교 신자였으며 전체주민 가운데 최분년(73세)씨의 남편인 김재복씨(사망)만이 보천교로 인해 이 마을로 이주했던 경상도 사람이었다. 현재는 마을 전체가 교우촌을 이룰 만큼 여전히 신심이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