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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의 경주(慶州)'라 불리는 칠보(七寶)에는 각종 문화유적이 산재한 유서깊은 고장이다. 특히 천주교 신자들의 교우촌인 동막(東幕)은 널리 알려진 마을이다. 동막은 대한제국시대(大韓帝國時代)에 생긴 지명으로 석탄(石灘) 마을 남쪽에 있어 여옥(餘玉) 마을 동쪽에서 보면 그래서인지 막처럼 보인다 한다. 이 마을은 대원군(大院君) 때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迫害)를 피해 순창 회문산(淳昌 回文山)으로 피신했다가 이곳 동막으로 이주하여 숯을 굽고 화전(火田)을 일구면서 생계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예전에 숯굴이 있었던 점이 이것을 뒷받침 해준다.
대부분 독(항아리)굽던 마을을 동막(東幕)이라고 한다. 즉 독막의 '독'은 뒤에 ㄴ,ㅁ이 오면 '동'으로 발음되어 동막으로 변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동막(東幕)은 이 마을 신자인 오삼봉(발도로메오/77세)씨에 의하면 병인박해(丙寅迫害) 뒤 1886년에 5대 조부께서 경상도에서 박해를 피해 처음 이곳에 정착한 이래 꾸준히 교우들이 늘어 지금은 마을 전체가 교우들로 구성된 신앙촌이 되었다고 한다. 박해를 피해 처음 자리잡은 곳은 현 마을에서 동쪽으로 약 1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이었으나 6.25전쟁 이후로 아래쪽인 현 위치에 마을이 형성되어 신촌(新村)으로 부르기도 한다. 피난 당시 신자들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하여 돌로 담장 같은 막을 쌓았다. 또한 연기가 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말린 싸리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하였다.
먹을 것이 없었던 시절 이들은 칡뿌리를 돌로 찧은 다음에 윗물은 버리고 아래쪽에 남은 찌꺼기를 쑥과 풀잎 등을 섞고 개떡을 빚어서 생계를 유지했다고 전한다. 서숙이나 수수, 옥수수, 담배가 주된 농사였으며, 흙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돌을 고르고 흙을 한곳에 모아 조그만 논을 만들어 그 높은 지대에서 벼농사를 짓기도 하였다. 박해 당시에는 선교사(宣敎師)들이 주로 옹기기술(甕器技術) 습득을 권장하고 또 가르쳤던 반면에 최근에는 신부들이 유기농법을 권장하고 있다.
드러내놓고 교우들과 교류할 수 없었던 암울했던 박해 시절에는 숨어 지내는 교우들의 숫자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다. 해서 나온 방법이 동짓날에 팥죽을 쑤어 문지방에 바르는 대신 말피를 바르는 방법이었다. 이로써 천주교 신자임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신자수를 파악했다고 한다.
수청리 청광(水靑里 靑光)마을도 비슷한 시기에 공소(公所)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나 정확한 공소(公所)건립 연대?는 파악할 수 없다. 청광(靑光)은 수청리(水靑里)에서 으뜸가는 마을로 현재 크게 외청(外靑)과 내청(內靑)으로 구분되어 있다. 수청리 광덕(水靑里 光德) 마을과 내,외청(內, 外靑)마을의 합성지명인 청광(靑光) 마을 부근에는 점골(店村)이 있었다. 이곳이 옹기를 구워 파는 가게자리였다.
이 곳 청광(靑光) 마을은 차(車)씨들이 처음 정착한 마을로 공소 건물(公所 建物)은 6.25때 인민군들에 의해 소실되었다. 현재 마을 주민 중 2가구만이 천주교를 믿고 있으며 동막공소(東幕公所)에 와서 일요일이면 미사를 드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