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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시 문화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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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유적

구장리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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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장리공소

  • 시대근대(19세기말∼20세기 초)
  • 소재지정읍시 산외면 상두리

상세정보

산외면(山外面)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6킬로미터, 화죽리 사거리에서 서북쪽으로 4킬로미터 떨어져 있으며, 韓원서(요셉) 성인의 가족들이 살았던 곳이다. 장명동 구양실 마을의 경우와 같이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이 피난하면서 형성된 마을이었다고 구전되고 있으며, 조씨들이 터를 잡았다고 한다. 그 뒤 박해를 피해 순창 회문산에 있던 교우들이 이곳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온통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처럼 보여 관의 눈을 피하기에는 안성마춤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구장(九將)은 풍수상 아홉 명의 장군이 난다 하여 붙여진 마을이름이다. 마을 북쪽 장군봉에 '장군대좌의 혈'('將軍對座의 穴')이 있고 아랫마을을 만병(萬兵)이라 하여 장군이 만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참시내(東津)에 모여 군사회의를 했던 곳으로 구전되고 있다. 동쪽에 감투봉과 칼날, 서쪽에 가마솥, 남쪽에 조리봉, 동북쪽에 울음재 등 소지명을 하나같이 군사관련으로 풀이하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신자들이 처음 정착한 곳은 '아랫구장리' 마을로 보인다. 기와 파편이 지금도 발견되고 있고 막사기를 구었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여 살 수 없게 되자 지금의 위치에 '현'씨들이 정착하면서 새터가 형성된 것이라고 전한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교우들의 생계수단은 여전히 담배농사와 고추농사가 주를 이루고 있다. 일제 때는 중국인 신부가 이곳에 땅을 매입하여 교우들에게 골고루 소작을 시켰고 광복(光復) 이후에는 천주교의 재단소유가 되었다가 6.25전쟁 이후 7년 상환으로 현재는 개인소유로 등기가 나 있다. 1950년 이전에는 63가구가 살고 있었으나 지금은 총 23가구 가운데 9가구만이 천주교를 믿고 있다.
공소(公所)는 6.25전쟁 당시 인민군들에 의해 소실되었으며, 현 건물은 1970년대 초에 김병엽 신부가 재임 당시 부지를 매입하여 정면 3간, 측면 1간으로 신축했으나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다. 1970년대 2년간 신태인 본당에 속해 있다 그 뒤 김제 수류본당으로 소속이 이전되었다. 구장리(九將里)에서 서당골, 절골을 거쳐 장군치를 넘으면 김제시 화율리 수류 본당으로 이어지며 산길로 약 4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첫째주 일요일에 신부님이 오셔서 미사를 집전하고, 교우들은 부활절(4월)과 8.15 그리고 크리스마스와 같은 대축일에만 본당 미사에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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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부서동학문화재과/문화재정책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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