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구량실(九良實) 마을은 뒷골, 앞골, 신흥촌으로 구성된 마을로 현재 80여 가구가 살고 있다. 보통 귀양실로 부르고 있다. 조선시대(朝鮮時代) 채정승(蔡政丞)이 귀양살이를 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채서방골로 불리는 골짜기와 채정승의 것으로 보이는 무덤이 있기 때문이다. '녹두밭웃머리'라 부를 만큼 척박했던 이 마을은 비가 오지 않아 흉년이 겹치면 칠보산(七寶山) 주변의 도토리를 채취하여 묵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할 정도로 살기 어려웠던 마을이다. 지금은 고사리 등 나물이 비교적 많은 편이나 예전에는 나물조차 흔치 않았던 마을이었다. 당시 주민들의 생활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이렇게 살기 어려웠던 마을에 1900년대 신자들로 구성된 교우촌이 성립되었으나 이런 내역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1970년대 중반 시절 천주교에서 구호물자를 보급하면서 상당수 신자들을 확보했으나 1980년대 중반 신자들의 모임장소인 공소(公所)가 폐지된 이후로 현재는 신자가 하나도 없는 상태이다. (공소 폐쇄)公所 閉鎖 이후 박낙규(76세)씨가 2년여 공소(公所)를 관리 했으나 지금은 공소(公所) 자리에 박화순(65세)씨가 살고 있다. 주민들 이야기처럼 귀양살이를 올 정도로 산간벽지였는가는 의문이 있다. 아무래도 정읍을 귀양지로 보는 것은 무리다.
만약에 이렇게 조선시대에 와서 글자의 뜻이 변했다고 한다면 중앙의 정치무대에서 밀려난 관리가 고향인 이곳으로 돌아와서 말년을 보냈기에 이런 내용이 구전된 것으로 보인다. 『戶口總數』에 귀량곡(歸良谷)으로 표기되어 있고, 『舊韓國 地方行政區域 名稱一覽』에는 구양리(九良里)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