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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관광|정읍9경|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정읍 3 景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 위 치 :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
  • 관리기관 :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 전화번호 : 063-536-1894

장애인 휠체어이용 가능대여 가능

상세정보

1894년 반부패·반봉건·반외세의 기치를 들고 봉기한 전봉준·김개남·손화중 등 수만의 無名동학농민군이 전주감영에서 파견한 관군을 크게 이긴 최초의 전승지 황토현 전적지내에 희생자 추모시설, 연수시설, 전시체험시설 등을 갖춘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이 국가사업으로 조성 중에 있다.

동학농민혁명에 관련된 무기, 생활용품, 기록물 등을 전시·보존하고 있는 기념관, 동학농민혁명 교육관, 갑오동학혁명기념탑 등 관련 시설들이 있어 동학농민혁명의 전개 상황을 쉽게 이해 할 수 있는 역사교육현장으로 방문객들이 꾸준히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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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개요

  • 소 재 지 :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742 일원(황토현전적지 일원)
  • 면 적 : 306,428㎡ (건축 연면적 4,719㎡)
  • 시설내력 : 연구소 226㎡, 유물관 및 체험관 1,262㎡, 추모관 226㎡, 연수동 2,416㎡(2인ㆍ4인ㆍ8인실), 편의시설(방문자센터, 카페테리아, 야외캠핑장 등)589㎡
  • 사업주관 :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문화체육관광부 산하)

다시배워보는 동학농민혁명 전개과정

전봉준(全琫準)
  • 조선말기 동학농민운동 지도자로 1855(철종6)에 전북 고창에서 출생했다. 자는 명숙(明淑), 호는 해몽(海夢), 본관은 천안, 별명은 녹두장군(綠豆將軍)으로 몸이 왜소하였기 때문에 흔히 녹두(綠豆)라 불렸고, 뒷날 녹두장군의 별명이 생겼다.

    아버지가 조병갑 학정에 저항하다가 죽음을 당하자, 사회개혁의 뜻을 품고 1890년(고종27) 무렵 동학에 입교, 고부접주(古阜接主)가 되었다.
    1892년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이 탐학(貪虐)을 일삼자 이에 그는 동지 20명을 규합하여 사발통문(沙鉢通文)을 작성하고 이듬해인 1894년 정월 10일 1천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하였다.(고부봉기) 정부에서는 조병갑을 처벌하고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按핵使)로 보내어 선처를 확약하였으나, 이용태가 이를 지키지 않자 전봉준은 고창 무장에서 기포하였다.(3월 봉기) 1894년 3월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이어 전주(全州)를 점령하였다.

    한편 청·일의 개입으로 운명이 위태로워지자 폐정개혁 12개안을 정부에 제의, 정부가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전주화약으로 휴전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뒤이어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일본이 점차 한국에 대한 침략의도를 드러내자 9월 중순에 항일구국의 기치 아래 동학농민군은 전북 삼례에서 재봉기하여 (9월 재봉기) 손병희(孫秉熙) 휘하의 농민군과 함께 일본군 및 정부군과 공주 우금치(牛金峙) 전투에서 대패한 뒤 진압되었다.

    이에 그는 순창(淳昌) 피노리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이듬해 3월 사형에 처해졌다. 이 때 그의 나이 41세였다.
1.다시 살아오는 역사의 불길
  • 1894년 1월에 일어난 고부농민봉기를 시발점으로 한 동학농민혁명은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 최초로 민중의 자각에 의한 전국적 농민항쟁으로서 근대사회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1차 농민항쟁은 자유민권을 위한 반봉건 항쟁이었으며, 2차 항쟁은 일본침략군을 이땅에 몰아내기 위한 민족자존의 반외세 항쟁이었다.
    평등, 자유, 자치의 원칙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경제체제의 수립을 목표로 한 동학농민혁명은 결국 보수 양반계층의 연합세력, 그리고 이들이 끌어들인 외세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 맥은 이후 활빈당 운동, 영학당 운동으로 이어졌으며 항일 의병항쟁 및 3.1운동 등의 원동력이 되었다.
2. 동학혁명의 발자취
  • 1) 배 경
    • 19세기 후반 안동김씨, 풍양조씨로 이어지는 세도 정치가 이루어지면서 중앙정치기강의 문란을 가져왔고, 탐관오리의 득세를 가져왔으며 그로 인해 사회는 동요되었다. 전정, 군정, 환곡으로 대표하는 봉건적 수취체제의 기본인 삼정 제도는 지방관들의 농간으로 수탈수단으로 변해 농촌사회의 파탄을 가져왔다. 수탈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산속에 들어가 화전민이 되거나 고향을 떠나 거지떼가 되어 굶어 죽는 자가 속출하였고 이로 인한 민중의 불만은 더욱 커져갔으며 이러한 봉건사회의 모순을 스스로 해결하려는 주인의식이 싹트게 되었다.
      19세기 후반 안으로는 조선사회 내부의 모순이 표출되고 밖으로는 자본주의를 앞세운 서양열강의 침략이 노골화되어 봉건사회의 낡은 틀을 무너뜨리며 새로운 사회로의 발전을 모색하는 전환기였다.
      이러한 봉건적인 사회 경제관계에 대한 농민들의 불만은 봉건통치 계급의 횡포한 착취와 외세 자본주의 침략에 대항한 민중의 저항의식으로 발전되어갔다. 19세기 후반 전국적인 현상으로 나타난 농민항쟁의 조직과 사상적 기반이 된 것은 동학이었다. 동학은 경주출신의 몰락양반 최제우가 자본주의 열강이 점차 침략의 야욕을 뻗쳐오던 1860년 서학(천주교)에 대립하여 창시한 민족 종교였다. 동학은 봉건 지배계급의 입장에서 볼 때 유교적 기존질서를 뒤흔드는 불온사상으로 탄압의 대상이 되었지만 민중 계층의 요구를 반영한 이념이었기에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갔다.
  • 2) 교조신원에서 척왜양창의로
    • 동학 창시자 최제우는 1864년 봉건정부에 체포되어 대구 장대에서 처형당하고 동학은 일체 금지되어 탄압을 받았으며, 백성들에 대한 수탈은 더욱 심해졌다.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교세가 더욱 확장하게 되자 동학의 합법성을 요구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교조신원운동이다.
      • [1] 삼례집회
        1892년 10월 공주집회가 소득없이 해산되자 1892년 11월 3일 전라도 삼례에 수천명의 민중이 모여 10여일간 집회가 계속되었는데 전라감사 이경직의 관할 지방수령들의 수탈을 금하겠다는 답신을 받고 집회를 해산하였다.
      • [2] 한양의 복합상소와 척왜양운동
        하층 농민대중의 집단력을 피하고 소수인의 대표에 의한 상소 방법으로 1893년 2월 8일 40여명의 대표단이 광화문 앞에서 3일 밤낮으로 엎드려 복합상소 하였는데, 고종의 시행약속 답신으로 복합상소를 중지하고 곧장 해산하였다.
        다른 한편에서는 농민들이 상경하여 외국 공사관 및 교회에 강경한 내용으로 외세 배격의 벽보를 붙이고 다녔다.
      • [3] 보은과 원평집회
        1893년 3월 11일 전국 각지의 군중의 대열이 충청도 보은으로 몰려들었는데, 이 집회에서는 척왜양창의 라는 외세배격의 정치적 구호가 등장하였다.
        조정의 양호선무사 어윤중의 설득으로 북접계 지도부가 주도한 보은집회가 흐지부지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북접계 지도부의 투항적 태도는 농민대중의 반발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다. 한편 전라도 원평에서는 전봉준 등이 주도한 원평집회가 뜨거운 열기로 진행되고 있었으나 보은집회가 흐지부지 해산하게 되자 한양으로의 동반 진격하고자 했던 계획이 무산되어 훗날을 기약할 수 밖에 없었다.
  • 3) 사발통문 거사계획
    • 고부지역은 호남제일의 쌀 생산지이며 농산물 집결지로써 다른 어느 지역 보다도 봉건적 수탈과 일제의 경제적 침략이 극심한 곳이었다. 부패한 봉건 정부의 하수인인 고부군수 조병갑은 만석보 축조를 빌미로 수세를 받아왔는데, 마침 1893년 극심한 흉년이 들어 농민들의 만석보 수세 감면 진정이 있었으나 오히려 대표자 몇 사람을 구금하였다. 이에 전봉준 등 20여명은 송두호의 집(고부 신중리 죽산마을)에 모여 조병갑 외 탐관오리를 처단하고 전주성을 함락한 후 한양으로 진격한다는 거사계획을 결의하였다.(사발통문 거사계획)
      1893년 11월 30일 조병갑이 익산군수로 발령나고 그후 5명의 인물이 고부 군수로 발령이 났으나 조병갑의 치열한 재취임 공작에 밀려 부임하지 못하게 되자 1894년 1월 9일 조병갑이 고부군수로 재취임하게 되어 결국 고부농민 봉기를 자초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 4) 고부에서 혁명의 불꽃이
    • 농민들이 예동마을(말목장터)에 모여 들던 1894년 1월 10일 밤, 전봉준을 중심으로 농민들은 고부관아를 습격하였으나 조병갑은 이미 자취를 감추었다. 그래서 원한의 대상인 만석보를 허물어 버리고 말목장터에 진을 치는 한편, 백산에 토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신임군수 박원명은 적극적인 회유책으로 해산을 권유하고, 조병갑 타도에 뜻을 이룬 농민들은 더 이상의 사태 진전에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던 터라 전봉준은 부득불 해산을 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 5)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
    • 1894년 3월 21일 전라도 각지에서 몰려든 농민들은 고부의 백산에 집결하였다. 여기서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손화중과 김개남을 부대장격인 총령관으로 추대 하고 총사령부로써 백산에 호남창의대장소를 두고 각지에 창의문과 격문을 발하여 민중의 총궐기를 호소하였다. 아울러 반봉건, 반외세를 목표로 한 농민군의 행동강령 4개항을 발표하였다.
  • 6) 황토재에서 첫 승리의 함성
    • 전라 감영에서는 감영군과 보부상으로 구성된 2,400여명의 연합 부대를 4월 3일 백산으로 출동시켰다. 4월 7일 황토재에서 관군을 격파한 농민군은 정읍을 점령하고 4월 8일 흥덕과 고창, 4월 9일에는 무장을 점령하였다. 4월 12일 영광을 점령한 후 함평 나주를 거쳐 장성으로 향했다.
      한편, 초토사 홍계훈이 이끈 경군이 군산에 들어와 전주를 점령하고 조정에 외세를 끌여들여 진압하자는 내용의 보고문을 보내었다. 동족을 처단하기 위해 외세를 끌여들여 결국 조선은 청일 각축장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민족적 위기에 접한 농민군은 5월 8일 정부가 요청한 휴전 제의에 각종 폐단을 시정하는 내용의 개혁안을 제시한 후, 관군과 화약을 맺고 농민군들은 전라도 일대에 농민군 자치기구인 집강소를 설치, 농민군이 주체가 되어 지방자치를 실시하였다.
  • 7) 척왜의 깃발아래 다시 서는 농민군
    • 전주화약이 성립되자 정부는 청일 양국에 동시 철병을 요구했으나, 일본은 서양제국주의 열강의 지지를 받기 위한 외교적 노력에 주력하면서 일본군의 계속 주둔과 청국과의 전쟁구실을 만들기에 힘쓰는데, 마침내 6월 21일 일본군은 경복궁을 침입하여 고종을 연금시키고 친일정권을 수립케 한 후 아산만에 정박해 있던 청국 함대를 공격함으로써 전봉준 등이 그토록 우려했던 청일 전쟁이 발발하여 조선의 강토는 외적들의 싸움장이 되고 말았다.
  • 8) 통한의 우금치고개
    • 논산에 집결한 농민군은 공주를 향하여 북상하였으나 이미 일본군과 관군은 공주영의 요소요소에 병력을 배치하여 농민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공주로 진격하여 우금치 고개에서 일본군의 우세한 근대적 무기에 맞서 농민군은 4~50여차례 공방전을 펼쳤으나 농민군의 주력부대가 끝내 참패하고 말았다.
      공주전투에서 패한 농민군들은 논산, 금구, 태인 등 각지에서 일본군과 완강히 싸웠으나 또다시 패하였다. 전봉준 등은 재기를 노리며 순창 쌍치 피노리를 들렀다가 변절자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어 1895년 3월 30일 손화중, 최경선 등과 최후를 마치니 향년 41세였다.
지도가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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