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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충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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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충사지

  • 종목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 제74호
  • 시대조선 인조 10년(1632년) 창건, 1964년 중건
  • 소재지정읍시 흑암신흥길 62-7 (흑암동)

상세정보

정충사(旌忠祠)는 조선 인조(仁祖) 10년(서기 1632년)에 건립하였으며 효종(孝宗) 8년(서기 1657년)에 사액(賜額)을 받았다.
이 곳에서는 임진왜란시 격전분투하다 전사한 동래부사(東萊府使) 송상현(宋象賢) 정유재란시 남원성 전투에서 장열한 최후를 마친 무장공(武壯公) 신호(申浩), 병자호란 때 안주목사(安州牧使)로 성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자 처자와 함께 분사한 장무공(壯武公) 김준(金浚)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으며, 고종5년(서기 1868년) 조령에 의하여 훼철되었다가 1927년 3월 4일 이 지방 유림들에 의해 복설되었다.
같은 고향 출신인 삼충신(三忠臣)을 위한 사우(祠宇)이며, 조선조(朝鮮朝) 인조(仁祖) 10년(壬申)인 1632년에 세웠다.

임진란(壬辰亂)에 순절(殉節)한 동래부사(東萊府使) 송상현(宋象賢)을 주벽(主壁)으로 하여 임진란((壬辰亂)때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을 따라 공(功)을 세운 남원(南原) 교룡산성(蛟龍山城) 수어장(守禦將) 신호(申浩), 정묘호란(丁卯胡亂)에 순절(殉節)한 안주목사(安州牧使) 김 준(金 浚)등 이들의 순국정신(殉國精神)을 길이 빛내고 본 받기 위하여 건립(建立)하여 그 사당(祠堂)에 제사(祭祀)를 지내는데 효종(孝宗) 8년(丁酉)인 1657년에 김양기(金良器)등 선비(儒生)들이 임금에게 현판을 청하는 상소(請額疎)를 내여 정충(旌忠)이라고 현판(懸板)이 내려졌다. 정읍(井邑)에서 가장 먼저 임금의 현판(賜額)을 받은 곳이다. 처음에는 부사(府使) 송상현(宋象賢)의 사당(祠堂)과 인조(仁祖) 10년에 세운 목사(牧使) 김 준(金 浚)의 사당(祠堂)이 따로 있었는데 두 사당(祠堂)을 합하고 또 뒤에 수어장(守禦將) 신호(申浩)를 더 제사(祭祀)지내게 되었다.

그 외 송유도(宋遊道), 김정손(金鼎孫), 김응일(金應一)등 이 손질하여 고쳐 세웠으며 (重建) 고종(高宗) 5년(戊辰)인 1868년에 정부(政府)의 명령(命令)으로 헐리고 말았는데 그 때 원생(院生)이 20명 이였다.
1927(丁卯)년에 단을 세우고(設壇, 復設), 1964(甲辰)년에는 祠宇를 다시 세웠다.(重建) 1984년(甲子)에 외삼문(外三門)을 세우고, 담장을 고쳐 쌓았다.
제사 지내는 날은 음력 삼월 첫 번째 정자(上丁)가 든 날이다.

교통

역, 터미널에서 흑암, 고부행 시내버스로 10분, 승용차로 6분

주변관광소

고부향교, 장문리오층석탑, 군자정

제사(祭祀) 받는 사람

송상현(宋象賢)[1551-1592]

조선 선조(宣祖)때 충신(忠臣)이다. 여산인(勵山人)으로 자(字)는 덕구(德求)이고 호(號)를 천곡(泉谷)이라고 불렀다.
1551년인 명종 6년(明宗. 辛亥)에 현감(縣監) 복흥(復興)의 아들로 고부(古阜) 땅 천곡 (泉谷. 지금의 井邑市 農所洞)에서 태어났으며, 열살 때 이미 경사(經史)에 통하고 1570년 (宣祖 3년. 庚午)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1576년인 선조(宣祖) 9년(丙子)에 문과(文科)에 합격(급제(及第))하고, 이어 벼슬로 주서(注書) 경성판관(鏡城判官)을 거쳐 1584년인 선조(宣祖) 17년(甲申)에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 왔다.
호조(戶曹) 예조(禮曹) 공조(工曹)의 정랑(正郞)을 거쳐 사재감(司宰監) 군자감(軍資監) 의 정(正)을 역임했으며 1591년인 선조(宣祖) 24년(辛卯)에 집의(集儀. 從三品官) 통정대부 (通政大夫)로 동래부사(東萊府使)에 부임하여 임진란(任辰亂)을 만났다.
부산(釜山)을 빼앗은 왜병(倭兵)이 성(城)을 에워싸니 부민(府民)을 동원하여 전쟁준비를 하였다.

적(敵)은 성밖에서 글을 목판(木板)에 써붙여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명(明)나라로 처들어가는 길을 빌려라 하니, 이에 송상현(宋象賢) 부사(府使)는 죽음으로 바꿀지언정 길을 빌리는 일은 안될 일이다라고 하였다.
격전(激戰) 이틀째 되어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적의 힘을 감당하기 어렵게 되자 최후를 각오한 나머지 그의 아버지 송화(宋禾) 공에게 글을 보내고 조복(朝服)으로 갈아 입은 뒤에 북향배예(北向拜禮)하고 성루(城樓)에 올라 적(敵)을 꾸짖고 나서 그 곳에서 순절(殉節)하니 하인 신여로(申汝櫓)와 첩(妾)인 김 섬(金 蟾)이 따라서 절사(節死)하였다.
조정(朝廷)에서는 제관(祭官)을 보내어 예장(禮葬)하니 동래(東萊) 부민(府民)이 백리에 뻗쳐 호곡(號哭)하였다.

그 충절(忠節)에 탄복한 적장(敵將)은 동문 밖에 장사(葬事)하고 시(詩)를 지어 제사(祭祀)지냈다.
조정(朝廷)에서는 청주(淸州) 가포곡(加布谷: 지금의 忠北 淸原郡 江西面 綱常里)에 禮葬 하였다.
宣祖 38년인 1605(乙巳)년에 동래부사 윤훤(尹暄)이 사우(祠宇)를 세우니, 인조(仁祖)가 충열(忠烈)의 현판(賜額)을 내리고 효종(孝宗) 8년인 1657(丁酉)년에 좌찬성(左贊成)에 증(贈)하고 충열(忠烈)의 시호(諡號: 賢臣이나 유현들이 죽은 뒤에 그 생전의 功德을 기리어 임금님이 追贈하던 이름)를 내리며 출생지인 고부(古阜)에 정충사(旌忠祠)를 세워 합사(合祠)하고 전사지(戰死地)인 동래 낙안(東萊 樂安) 충열사(忠烈祠)와, 개성(開城) 숭절서원 (崇節書院)과 제주(濟州)의 화항서원(華巷書院)에서 제사(祭祀)지내고 있다.

신 호(申 浩)[1539-1992]

조선 인조(仁祖)때 충신(忠臣)으로 평산인(平山人)이다. 장절공(壯節公) 숭겸(崇謙)의 후손으로 자(字)는 언원(彦源)이며, 호(號)는 고정(古亭)이라 했으니, 두승산(斗升山) 아래인 고부(古阜) 우일(雨日) 원당리(元堂里), 지금의 정읍시 (井邑市) 북면(北面) 남산리(南山里)에서 명종(明宗) 34년(乙亥)인 1539년에 태어났다. 명종(明宗) 22년(丁卯)인 1567년에 무과(武科)에 올랐고 무예가 절윤하여 그 힘이 보통 사람을 능가했다.

그 뒤 도사(都事)에서 경력(經歷)으로 승진하여 낙안군수(樂安郡守)로 있을 때 임진란(任辰亂)을 당하여 이순신(李舜臣)의 좌부장(左部將)으로 옥포(玉浦) 싸움에서 전공(戰功)을 세었고 견내량(見乃梁) 안골포(安骨浦)에서 공(功)을 세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정유재란(丁酉再亂)에 교룡산성(蛟龍山城) 수어장(守禦將)이 되었는데 왜적이 남원을 포위하니, 명(明)나라 총병장(摠兵將) 양원(楊元)이 도망하였다.
이 때 남원이 함락(陷落)되면 산성(山城)을 지키기 어렵다 판단하고 병사(兵使) 이복남 (李福南)과 함께 죽음으로 지킬 것을 약속하고 동문(東門)을 빼앗아 부내(府內)로 들어가 역전분투(逆戰奮鬪) 하다가 남원성(南原城)에서 그만 전사(戰士)하니, 때가 선조(宣祖) 30 년(丁酉)으로 1597년이다.

이에 원종공신(原從功臣) 일등(一等)에 녹훈(錄勳)되고 형조판서(刑曹判書)가 추증(追贈)되었다.
그 뒤 숙종(肅宗) 8년인 1682년(壬戌)에 무장(武壯)의 시호(諡號)가 내리고 남원(南原) 충열사(忠烈祠)에서 제사(祭祀)지내고 있다.

김 준(金 俊)[1582-1627]

조선 중기(中期) 무신(武臣)이다.
언양인(彦陽人)으로 고부(古阜) 두승산(斗升山) 아래에서 태어났고 자(字)는 징언(澄彦)이니, 1582년인 선조(宣祖) 15년(壬午) 5월 10일에 고부(古阜) 금정리(金正里. 지금의 所聲面 旌門里)에서 고려(高麗) 문하시중(門下侍中) 위열공(威烈公) 취려(就礪)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선조(宣祖) 38년인 1605(乙巳)년에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선전관(宣傳官), 교동현 감(喬洞縣監. 京畿道 江華郡)을 지내고 고부 고향으로 돌아 왔다.
광해(光海) 6년인 1614년에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3년 시묘(侍墓)를 하였으니, 때마침 광해(光海)의 난정(亂政)에 벼슬을 쉬었다가 인조 반정에 참여하여 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가 되고 다시 경력(經歷)으로 승진이 되어 죽산부사(竹山府使)로 임명되었다.
인조(仁祖) 2년이 1624년에 이괄(李括)의 난(難)에 전공(戰功)을 세우고 반정(反正) 후에 의주부윤(義州府尹) 훈련원정(訓練院正) 봉산군수(鳳山郡守)를 거쳐 1625년인 인조(仁祖) 3 년(乙丑)에 안주목사(安州牧使) 겸 방어사(防禦使)로 있을 때 정유호란(丁酉胡亂)을 당하여 요새(要塞)인 안주성(安州城)에서 청군(淸軍)의 진격을 저지하였다.

그 때가 1627년인 인조(仁祖) 5년(丁卯)) 2월 13일 청(淸)군이 압록강을 건너서 의주(義州)로 침범하고 2월 19일에 안주성(安州城)을 포위하자 병사(兵使) 남이흥(南以興)과 최후의 항전을 벌였으나, 2월 21일 청군(淸軍)의 최후 공격에 지탱할 수 없게 되자 북문(北門)의 루(樓) 위에서 남이흥(南以興)과 같이 미리 준비했던 화약포대(火藥砲臺)에 불을 당겨 최후를 맡으니, 아들 유성(有聲)이 또한 아버지를 따라 순절(殉節)했으며, 종 헌충(獻忠)과 첩(妾) 김씨(金氏) 부인이 세 살난 어린 딸과 같이 적군에 희생되었다.
또한 나씨(羅氏) 문중(門中)으로 출가했던 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일을 전(傳)하여 들은 인조(仁祖)는 한 집안에 삼강(三綱)을 갖추었다고 충성(忠誠)을 치하(致賀)하고 우찬성(右贊成) 벼슬을 내렸다.

또 첩(捷) 김씨(金氏)는 정부인(貞夫人) 큰 아들 진성(振聲. 그 墓 古阜에 있음)은 주부 (主簿)에 아들 유성(有聲)은 호조참의(戶曹參議) 나씨(羅氏) 문중(門中)에 출가한 딸은 명정(命旌)이 내렸다.
숙종(肅宗) 7년(辛酉)인 1681년에 장무(壯武)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지고 인조(仁祖)때 좌찬성(左贊成)을 특별히 가(特加)하였다.
그 뒤에 고부(古阜)에 충(忠), 효(孝), 열(烈)의 정여삼강문(旌閭三綱門)이 1632년에 내려지고 부조묘(不祚廟)는 1681년에 내려졌다.
그리고 안주(安住) 충민사(忠愍祠)에 제사(祭祀) 지내도록 하였다.

유허비(遺墟碑)
충열공천곡송선생
(忠烈公泉谷宋先生)
무장공락안신선생 遺墟碑
(武裝公樂安申先生)
장무공안주김선생
(壯武公安주金先生)

숭정기원후 사 임신칠월 일(순조 15년 1815년)
(崇禎紀元後 四 壬申七月 日(純祖 15年 1815년)
유사 김 노 수
(有司 金 魯 秀)
신 재 희
(申 在 熙)
송 린
(宋 隣)
후 생 박 응 환 서
(後生 朴 應 煥 書)




정충사 사실(旌忠祠 事實)
-引逸亭 遺橋에서-

선묘(宣廟. 宣祖朝) 임진년(壬辰年. 壬辰倭亂)에 송충열공(宋忠烈公)이 동래(東萊)임소 (任所)에서 순절(殉節)함으로 고부(古阜) 사람들이 그 절의(節義)를 앙모(仰慕)하여 사당(祠堂)을 지어 제향(祭享)을 바쳤고, 인묘(仁廟) 정묘년(丁卯年. 丁酉再亂)에 김장무공(金壯武公) 또한 안주(安州) 임소(任所)에서 순절(殉節)을 한후 육년(六年)만에 송충열사(宋忠烈祠)와 합향(合享)을 하면서 김태천(金苔川) 지수(地粹)가 액(額) 받기 위한 소(疏)를 올렸으나 받지 못하고.

그 뒤 선묘(宣廟) 정유재란(丁酉再亂) 시(時)에 순절(殉節)한 신무장공(申武壯公)을 추향 (追享) 하였는데 그 후 효모(孝廟) 정유년(丁酉年. 孝宗 8年)에 유생(儒生) 김양기(金良器) 등 이 글을 올려 정충사(旌忠祠)란 액(額)을 받았고, 숙묘(肅廟) 계유(癸酉. 19년(年)에 사림(士林) 공론(公論)으로 연령(年齡) 차례로 위차(位次)를 정(定)했으며, 그 후 신사년(辛巳年)에 송유도(宋遊道), 김정손(金鼎孫), 김응일(金應一), 김응협(金應 ), 배세도(裵世度) 등이 중창(重創)하여 금년(今年)까지 이르렀을 뿐 또 삼충지(三忠誌. 宋象賢, 金 浚, 申 浩 의 사실 기록)를 간행(刊行)하였으니, 이 어찌 세도(世道)의 다행스러움이라 아니할까보냐.

旌忠祠의 賜額을 請하는 疏. -苔川 金地粹 지음-
엎드려 생각건대, 남의 臣下가 된 도리로는 忠誠보다 더 큼이 없고 충성중에서도 몸을 바치는 것보다 더 어려움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충성에 죽은 사람을 歷史에 記錄하고 나라 일에 죽은 사람을 祭享을 올리는 까닭입니다.

한번 祭祀 지내는 귀신도 있고 항상 제사지내는 忠魂도 있으니, 그 祭享드리는 곳과 또한 같지 않습니다. 혹은 壇을 모시고 혹은 사당을 세우는 데도 그 額號를 命하는 근거는 죽음을 슬퍼하고 충성을 하여 萬世의 표준이 되게 함입니다.
臣 등은 삼가 살피건대, 故 東萊府使 臣 宋象賢과, 故 安州牧使 金浚 은 모두 貞亮(마음이 곧고 信義가 있음)함이 특별히 우뚝 솟은 사람으로서 죽음을 바쳐 나라를 지켰으니 節義 의 첫째 된다고 하겠습니다.
난리로 어지러운 때를 당하니, 만약 두 臣下가 없었다면 天常을 어떻게 유지하고, 人倫紀綱은 누가 닦을 것이며, 行하는 길은 막히게 될 것이니, 節義에 죽는 자 이에 더 본 받을 곳이 없을 것입니다.

큰 행실에 때 묻지 않고 아름답게 烈烈한 이름이 있으면 四海九州의 먼데 사람들도 또한 듣고 슬퍼하여 술잔을 드리는데 하물며 같은 고을 같은 마을이겠습니까.
臣 象賢은 몸은 비록 서울에 있으나, 그 父親 以上은 이 고을에 世居하여 墳墓가 줄을 이었고, 臣 浚은 이 地方 백성으로 이 고을에서 生長했습니다. 臣 등을 포함한 고을 사람들은 그 義理에 있어서 몸과 생명을 바쳐 主上에게 報答을 하여 그 충성이 나라의 근간(國楨)이 되고, 그 행실이 세상의 교훈이 된 것에 감격하고 있습니다.

또 한편 사람은 가고 세월은 오래되어 事蹟이 매몰되고, 그 자손이 零丁(외로운 몸이 되어 依支할 곳이 없고)하여 때마다 展拜(참배)하지 못하고 窮鄕(窮僻한 시골)이 貿貿(無智하 고 서툴러서)하여 후배가 알지 못할까 두려워하며, 비로소 今年 五月에 祠堂을 創建하여 象賢과 浚의 位版을 모시고, 香火를 드리고져 祠堂을 이루었으나, 이름이 없고 祭祀에 절차가 잘못 빠졌으니 이 忠魂에게 未安함이 있는 듯 하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主上殿下께서는 褒忠祠, 旌烈祠등의 祠例에 의거하여, 특별히 祠額을 내리시어 寵光을(恩寵을 받는 榮光) 베푸시면 臣등이 慕忠修祠한 정성을 크게 위로할 뿐만 아니라 또한 국가의 義烈을 표상하고 풍속을 敦厚하게 하는 道理일가 하오니,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옵니다.

賜額을 請하는 疏. -金良器 等 지음-
幼學 金良器 등은 삼가 목욕재계하고, 主上殿下에게 百拜上言하나이다.
엎드려 생각건대, 忠臣, 節士의 祠堂을 그 고을에 세우는 것은 古今의 通誼요, 賜額을 내리고 揚하는 것은 국가의 令典이옵니다.

贈은 吏曹判書 宋相賢, 贈 刑曹判書 申 浩, 贈 左贊成 金 浚은 本 고을 사람입니다. 세 臣下의 行績은 모두 여러 사람의 耳目에 빛나, 萬人이 한결같이 말하오니, 진실로 臣 등이 말할 바 아니오나, 白面書生으로서, 일찍 將材를 품고 臺諫을 거쳐 東萊府使로 나갔다가 壬辰倭亂에 먼저 賊의 칼날을 받고, 朝衣(公的 衣服)로 床에 걸터앉아, 몸소 賊을 쏘고 힘이 다하자 君臣의 義理는 중하고 父子의 은혜는 가볍다 하며, 從容히 임금에게 拜辭한 뒤에, 죽으면서 발꿈치를 돌리지 아니하였습니다. 賊들도 義롭게 여겨 그 해친자를 죽이고 屍身을 거두어 斂葬(염장)한 뒤에 나무를 심어 表를 하니, 宋象賢 의 죽음은 凜凜(늠름)한 生氣가 있었습니다.

妙年(묘년: 스물 안짝의 꽃다운 나이)에 붓을 던지고 전쟁의 나갈 뜻을 가지고, 세 번 고을원이 되어서는 나라만을 생각 私利를 잊고, 두 번 海戰에 나가 번번이 奇計를 내고 끝내는 明將과 함께 南原城을 지키다가 兵力은 弱하고 賊軍은 强하여 城은 외롭고 氣力은 모자라 미리 姓名을 써서 衣帶에 갈무리하였다가 집사람에게 보내어 이것으로 葬事지내라 하고, 城이 陷落되니 힘껏 싸우다가 죽은 申 浩의 죽음은 죽었어도 죽지 않았다 하겠다.

온몸이 담덩어리로 慷慨(강개)한 뜻을 펴지 못하고, 光海君의 昏政 에 十年동안 자취를 田野에 감추고 社稷을 편케 하기 위하여 仁祖를 推載하였고, 李适의 逆亂에는 적은 군사로 홀로 나아가 安州城 하룻밤에 防禦使에 임명되고 賊兵이 졸지에 몰아닥치어 氣勢는 산이 무너지는 듯 하였고, 城에 올라서서 외치는 한마디에 降伏한 자들 부끄러움을 알았지요 혼자 中營에서 힘껏 싸웠으나, 화살이 다하니 사나이에게 죽음이 있음 뿐이라 불을 질러 스스로 타 죽었습니다.

아비는 임금 위해 죽고, 아들은 아비 위해 죽고, 첩은 남편위해 죽어서 한 집안에 三綱이 구비 하였으니, 金 浚의 죽음은 張 巡, 許 遠과 다를게 없습니다.
嗚呼라!
孔子는 殺身成仁이라 하였고, 孟子는 十生取義라 하여 죽음을 鴻毛보다 가볍게 여기고, 義理를 泰山보다 무겁게 여겼으니 取捨는 이미 정해졌습니다.
세 분은 스스로 편하게 하므로 남들이 스스로 추앙하는 마음 비록 九泉에 바랄 것이 없으나, 세 분은 여기에서 나고 여기에서 자란 곳이라 한 고을에서 祭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同氣는 서로 구하고 同聲은 서로 應하여(같은 종류의 것은 서로 자연히 모인다는 말) 재물을 모으고, 匠人을 불러서 祠堂을 이룩하니 春秋의 香火에 제사드릴 곳이 있습니다.
臣 등은 가만히 생각건대 湖南의 여러 고을에 壬辰, 丁酉倭亂에 절의를 지켜 賊을 討滅하고 몸을 던져 나라에 바친 이는 高敬命,父子와 金千鎰, 趙 憲 같은 분들이 있었으니, 그 분들은 그 곳에 따라 祠堂을 세우고, 血食(나라의 儀式으로 祭祀를 지냄)을 드리며 모두 賜額 이 내려졌습니다.

臣 등은 일을 함에 더디고 성의가 淺薄하여 세월을 遷延하다가 아직까지 請額을 못하였습니다. 지금 闕下에 와서 감히 이 天疏를 드리옵니다.
엎드려 비옵건대 殿下께서는 특히 該曹에 命하여 조례에 비추어 거행해 주시면 臣등의 기쁨은 한이 없겠습니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나이다.
임금이 傳敎를 내리시되 올린 글 잘 보았다 該曹로 하여금 相議하여 처리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禮曹의 回啓 및 再啓
禮曹의 回啓
이 上言을 보니, 그의 五代祖 贈 左贊成 壯武公 金 浚의 不之典을 請하여, 이같이 호소해 왔습니다.
金 浚의 一家三綱은 千古에 빛나는 일이니, 그 때 기둥에 기대어 적을 쏘고, 火藥을 쌓아 놓고 스스로 焚死한 事蹟이나, 또 그 아들 딸로 하여금 城을 빠져나가 화를 피하지 못하게 한 것을 상상해 보면 그 憤慨한 얼굴을 보는 듯 하고, 그 비통한 말을 듣는 것 같아 千百代 의 후에까지 오히려 사람으로 하여금 강개히 슬픈 눈물을 흘리게 하고, 列聖朝에서 旌閭를 命하고, 致祭를 드리며 祠堂을 세워 賜額한 恩典은 지극하다 하겠다.
그러나 不의 恩典이 전후에 殉節한 諸臣들에게는 두루 미쳤으나, 유독 壯武公에게는 같은 은혜를 입지 못하였으니, 지금 그 子孫들의 원통한 호소는 망령되이 天恩을 구하는 자들과는 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땅히 同時에 순절한 南以興에게 이미 베푼 例에 따라 施行하는 것이 옳을까 합니다.
또한 不의 은전은 事體가 至重하여 臣 등이 敢히 擅便(천편,천단)할 수 없으니, 大臣들에게 문의하여 처리하는 것이 어떠하오리까?

정충사 중건기(旌忠祠 重建記)

영주(지금의 古阜) 동쪽의 山이 靈山이다. 그 산 아래에 祠堂이 있으니, 바로 旌忠祠이 다.
이는 泉谷 宋忠烈, 樂安 申武壯, 安州 金壯武 등 세분 先生의 神主를 모신 곳이다.
세분 선생은 깨끗한 충성과 장대한 절개가 햇볕같이 빛나고, 태산같이 높음으로 거리가 멀고 가깝고 사람이 지혜롭고 우매해도 우러러 모시였다.
高宗 戊辰年에 朝庭의 명령으로 겹처 모신 祠堂을 철폐하였다. 이 사당은 泉谷의 높은 節槪, 樂安의 忠節, 安州의 忠愍을 祭祀하다가 철폐되었다.
그 터에 단(壇)을 세우고 祭享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거친풀과 들친 자리에 제사를 모시는 것이 실례될까 해서 그 怨恨이 구십년에 ?쳐 있었다.
이에 復設하자는 議論이 되어, 丙午년 봄에 시작하여 몇 달 가지 않아서 工事가 끝나고 丹靑하였으니, 어찌 偶然한 일이리오.

슬프다! 여러 선비는 이 사당을 중건하여 세사를 제멋대로 가는 것을 가로막고, 어두운 길을 밝게 밝힐 것이다. 이 사당이 복설되는 것은 우연함이 아니다.
반드시 어진 이를 높히고, 道를 講義하여 세 분 先生의 마음을 거울삼아 春秋의 義理를 講論하고 밝혀 정성을 다하는 나라를 바르게 잡고 힘을 합하여 倭를 물리쳐서 세 분 先生의 道理가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할 것이며, 만일 그러지 아니하면 祭需가 많고 焚香이 그윽하여도 이는 形式的인 文章이고 淺薄한 學問에 不過하다. 세 분 선생의 神靈이 어찌 즐거이 祭享을 받을 것인가.

이 役事를 시작한 士林의 金倫洛, 朴昌坤 두분과 竣工에 功이 많은 李鍾仁, 柳相容, 朴洋圭이다.
나에게 글을 請한 사람은 安州 先生의 후손 昞洪씨이다.

隆熙 紀元 六十一年 丁未 八月 下
後 學 密 陽 朴 仁 圭 謹 記
後 學 密 陽 洪 景 漢 謹 書

정충사 유지 강당 사실기(旌忠祠 遺址 講堂 事實記)

忠烈公 宋先生이 東萊고을 수령을 하다가 壬辰倭亂을 당하며, 분개하여 민중에게 맹세하고 城을 돌며 막다가 그 성이 함락됨에 城 위에 올라 北을 向하여 임금에게 절하며 謝罪하고 죽음을 盟誓하였다.
武壯公 申先生은 교룡산성을 지키다가 丁酉變亂을 당하여 종일 力戰하여 적군 수백명을 죽였으나, 衆寡不敵으로 싸움에 이기지 못할 것을 알고, 몸을 죽여 충성을 하며 조금도 후회함이 없었다.
장무공 金先生은 安州고을 수령을 하던 중 丁卯亂을 당하여 군사를 모아 분전을 하였다.
적군과 講和를 하니, 선생이 城에 올라 이를 배척하고 꾸짖으니, 적군이 근접해 오니, 선생 스스로 앉아 있는 자리 밑에 초황을 넣고 불을 질러 自殺을 하고 그의 아들과 첩이 같이 죽고 말았다.

공자와 맹자가 말했던 殺身成仁을 이룬 것이다. 그 충성과 절개가 해와 별의 빛보다 더 하니, 그 빛이 후세에까지 빛날 것이다.
그러므로 선비들이 祠堂을 세우고 孝宗이 旌忠이라 賜額을 내리기도 하였다.
수백년을 祭祀를 지내다가 高宗 5년에 헐리게 되니, 선비로서 제사를 지내지 못하기 4년이 지나간 壬申년에 그 남아 있는 자리에 남쪽으로 壇을 쌓아 宋先生이 오른쪽에, 申先生이 그 다음으로, 金先生이 또 그 다음으로 하였다.

해마다 八月 중순에 祭祀를 지내나, 講堂을 세우지 못하였다. 그 뒤 선비와 有志들이 負擔하여 글방을 세울 資金을 모았으나, 그것이 부족하여 契를 하여 조직하자는 말이 있어 그 중 두어 사람의 有志가 다시 더 出損을 하여 丙子년 3월에 집을 시작하여 그 해 10月에 준공을하니, 學習하고 硏磨할 講堂이 갖추어진 셈이다.
이는 누가 시킨 것이 아니고 學問과 德을 좋아하는 마음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슬프다! 세 분 선생님의 軍士가 敵은 많고, 우리 軍은 적어 能히 制壓하여 이기지 못하고, 나라에는 殉節을 하고 임금에게는 忠誠을 하여 국가의 洪福을 연장하며, 綱常을 세워 後世 에 模範이 無窮하였다.

이는 참으로 孔子와 孟子의 교훈에 따른 것이다.
뒤에 이 壇에 참배하는 모든 선비는 祭祀를 올리는 것만으로 생각하지 말고, 반드시 禮儀 와 辭讓의 義理를 강구할 것이며, 이 집에 오는 선비는 經典을 읽은 것으로만 생각치 말고 반드시 성현의 마음인 父子간의 親愛와 君臣간의 義理를 부지런히 찾으면 임금과 어버이의 환란에 충성하고 효도함에 힘쓸 것이다.
만일 祭祀에만 힘쓰고 입과 귀로만 배웠다면 선생을 위한 것이 아니요. 孔孟의 後學으로 써 마땅한 바가 아니다.
義損을 하여준 선비들의 이름을 벽에 붙여서 여기에 오는 분들이 보아 어진 先生의 祭祀 를 높이 올리는 精誠을 世上에 알려 배우게 할지어다.

丁丑 十月 日
密 陽 朴 仁 圭 記
都有司 兼 掌財 金 昞 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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