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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암서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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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암서원지

  • 시대조선 영조 23년(1747년)
  • 소재지정읍시 상평동 378

상세정보

조선조(朝鮮朝) 숙종(肅宗) 15년인 1689년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정읍(井邑)에서 수명(受命: 賜藥)한 후 6년이 지나서 무고(誣告)함이 밝혀져 나주(羅州) 유생(儒生) 나세기(羅世器) 등 팔백여명(八百余名)의 상소(上疏)로 숙종(肅宗) 21년(乙亥)인 1695년 6월에 창건(創建)하고 그해 9월에 고암(考巖)이라 사액(賜額)하였다.
그리고 정조(正祖) 9년(乙巳)인 1785년 10월에 민치겸(閔致謙) 등 유림(儒林)들의 상소 (上疏)로 우암(尤庵) 선생의 수제자인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를 배향(配享)하였다. 이 두분의 영정(影幀)이 봉안(奉安)되었다.

당시의 서원에서는 장의(掌議) 1명 재임(齋任) 2명 원생(院生)이 내외 60명이 였다.
고종(高宗) 7년(庚午)인 1870년에 정부(政府)의 령(令)에 의하여 헐리웠는데 그 전날 밤 에는 동네의 닭들이 초저녁부터 울어대고 마을의 샘물이 말랐다고 한다.
그 때에 건립한 묘정비(廟廷碑)가 남아 있다.
이 묘정비(廟廷碑)는 영조(英祖) 23년인 1747년(丁卯)에 건립하였는데 이재찬(李縡撰)이 지은 비문(碑文)이다. 그 유허(遺墟)에 세워져 있는 비(碑)는 귀부(龜趺: 거북이 모양으로 만든 비석의 받침돌) 위에 세워 있다.

정주시(井州市)에서 원우(院宇)를 1991년에 시장(市長) 조명근(趙明根)이 시비(市費) 4천 만원으로 사우(祠宇) 11평에 세칸(三間)을 세우고 그 주변을 정비하였으며, 1992년에 강당 (講堂)을 새로 지었고 1993년에는 외삼문(外三門) 등이 건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암서원(考巖書院)이 제사(祭祀) 지내는 주벽(主壁)은 송시열(宋時烈)이며, 배향(配享) 은 권상하(權尙夏)이다.

제사는 매년 9월 초정(初丁)에 지낸다.
서원(書院)의 규모(規模)와 사우(祠宇)는 한동(一棟)이며 맞배지붕에 동쪽으로 향하고 있 다. 강당(講堂)은 한동(一棟)으로 맞배지붕으로 동향으로 있으며, 내삼문(內三門) 한동(一棟)은 역시 맞배지붕으로 동쪽을 향하고 있다.

제사(祭祀) 받는 사람

송시열(宋時烈)

이조 중기(中期)의 학자이며, 명신(名臣)이다.
은진인(恩津人)이다. 어릴 때 이름은 성뢰(聖賚)였고 자(字)는 영보(英甫)이고 호(號)는 우암(尤庵)이며, 시호(諡號)는 문정(文正)이다.
1607년인 선조(宣祖) 40년(丁未)에 충남 옥천 구룡촌(忠南 沃川 九龍村)에서 수옹(睡翁) 갑조(甲祚)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제자로 인조(仁祖) 11년(癸酉)인 1633년에 사마시(司馬試) 에 일등으로 합격하고 경능참봉(敬陵參奉)이 되었다.
이어서 봉림대군(鳳林大君: 뒤에 孝宗)의 스승이 되니 크게 출제할 인연은 이 때에 맺은 것이다.

효종(孝宗)이 임금이 된 뒤에 벼슬에 나아가 이조판서(吏曹判書), 좌찬성(左贊成)을 지내 고 현종(顯宗) 2년에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렀으며, 주자학(朱子學)의 거유(巨儒)이다. 현종(顯宗) 15년(甲寅)인 1674년에 원자(元子)를 책봉하는 문제로 예론(禮論)의 시비(是非)가 되어 제주도(濟州道)로 유배(流配)되었다가 국문(鞠問)을 받기 위하여 다시 서울로 압송(押送) 도중에 이해 6월 7일 정읍(井邑)에서 사약이 내렸다.

제자 권상하(權尙夏), 김만준(金萬埈)의 손을 붙잡고 뒷일을 부탁한 후 약을 마시고 세상 을 떠나니, 다음 날인 8월에 최후(最後)를 마쳤으니, 그를 수원(水原)에 장사 지냈다.
그 때가 1689년(己巳)으로 숙종(肅宗) 15년이며 우암(尤庵)의 나이 여든세살 이다.
그 후 5년만에 조정(朝廷)에서 관작(官爵)을 복구하고, 시호를 내렸다.
도봉서원(道峰書院)과 문정서원(文正書院)에 그를 모셨다.

귀양살이의 어려운 가운데에도 저술에 힘?고 학문에 열중하여 제자를 가르쳤다.
저서(著書)로는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이정서분류(二程書分類), 어류소분(語類小分), 논맹문의통고(論孟問義通攷), 심경석의(心經釋義), 문집(文集) 등이 있다.

권상하(權尙夏)

숙종(肅宗) 때의 학자이며, 안동인(安東인) 이다.
자(字)는 치도(致道)이고, 호(號)는 수암(遂庵) 또는 한수재(寒水齋)이다.
시호(諡號)는 문순(文純)이다.
집의(執議)를 한 격(格)의 아들로 1641년인 인조 19년(辛巳)에 한양(漢陽) 동현(銅峴)에 서 태어 났다.

스물 한 살 때 진사(進士)에 합격했으며, 일찍이 송시열의 문하에서 배워 그의 총애를 받 았으며, 주자학(朱子學)으로 촉망을 받았다.
숙종(肅宗)께서 송시열의 무고(誣告)함을 밝힌 뒤 여러차례 관직을 내리고 불었으나, 나 가지 않았다.
송시열의 뜻을 받들어 화양동(華陽洞)에 만동묘(萬東廟)를 세우고 명(明)나라의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을 모시었다.

다시 왕의 뜻을 받들어 대보단(大報壇)을 쌓고 전기 두 왕을 제사(祭祀)하였다.
우의정(右議政)과 좌의정(左議政) 벼슬을 주었으나, 다 사양하였다.
경종(景宗) 1년(辛丑)인 1721년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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