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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인 고현동 향약 태인 고현동 향약 태인 고현동 향약 태인 고현동 향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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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인 고현동 향약

  • 종목보물 제1181호
  • 지정일1993년 11월 5일
  • 시대조선시대
  • 소재지정읍시 칠보면 남전길 90

상세정보

미풍양속(美風良俗)의 근본으로 주민자치(住民自治) 사회규범(社會規範)이었던 우리나라 최초(最初)이면서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태인 고현동 향약'은 현재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에서 행한 향약을 말한다.

원래 현아(懸衙: 군 소재지)의 소재지를 현내면(縣內面)이라고 하는데 본래 시산리(詩山里)는 태산현(泰山縣)의 고을터로 현내면(縣內面)으로 부르다가 태종(太宗) 9년에 인의현 (仁義縣)과 합하여 태종 16년에 고을터가 거산리(居山里: 현 태인면)로 옮겨지면서 태인은 현내면(縣內面)이 되고 시산리는 고현내면(古縣內面)이 되었다.
고현동각(古縣洞閣)은 조선시대 태인 오학당(五學堂) 중 하나인 남학당(南學堂)에서 유래되고 남학당은 성종(成宗)때 정불우헌(丁不憂軒)의 향학당(鄕學堂)에서 비롯되니 고현동각은 향학당에서 시작된 것이다.

불우헌 정극인(不憂軒 丁克仁)이 1470년(成宗 1年) 벼슬을 그만두고 나와 1475년(成宗 6 年 乙未)에 학당을 설치하고 청소년을 교육한 것이 향학당이니 여기에서 중국(中國) 남전(藍田)의 여씨(呂氏) 향약(鄕約)과 같은 고현동약(古縣洞約)을 만들어 향풍(鄕風)을 바로잡고 동민의 화합을 도모하는 향음예(鄕飮禮)를 실행했으니 우리나라 향약의 선구였다.
그 후 30년이 지나서 1500년(中宗 5年, 庚午)에 일찍이 이조좌링(吏曹佐郞)을 지낸 눌암 송세림(訥庵 宋世琳)이 고향에 돌아와서 정극인의 향약을 중흥시켜 강당(講堂)과 동서재(東西齋)를 세워 젊은이들을 가르쳤다.

또 1543년(中宗 38年)에 영천 신잠(靈川 申潛)이 태인현감(泰仁縣監)으로 와 사학당(四學堂: 태인을 포함해서 오학당)을 세웠는데 남학당(南學堂)을 세우지 않은 것은 고현내(古縣內)에 흥학당(興學堂)이 있었던 탓이다.

그 뒤 고현동약지(古顯洞約誌)에 의하면 향학당(鄕學堂)은 뒤에 무성서원(武成書院)이 되고, 1485년(成宗 14년)에 월연대(月延臺)에서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향학당 자리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향학당을 흥학당(興學堂)으로 이름을 바꾸었는지도 모른다.
오랜 세월이 지나 향약(鄕約)이 침체하여지자 1724년(景宗 4년 甲辰)에 뜻있는 동네 노인들의 마련으로 양사제(養士齎)를 만들었으며 영조(英祖) 40년경에는 현감 조정(縣監 趙晸, 호는 柱湖)이 이를 남학당(南學堂)이라 하여 보수(補修)하였다.

이로부터 120년이 지난 뒤 남학당이 퇴폐하여지니 1844년(憲宗10년, 甲辰) 송언호(宋彦浩, 宋世琳의 九世孫), 김구흠(金龜欽, 金世의 七世孫) 등이 주동이 되어 10년에 걸쳐 중건 (重建)을 하니 그 때가 철종(哲宗) 5년이었다.
이 때부터 남학당은 동각(洞閣)으로 불리워지고 완전히 동약(洞約)의 전당으로 되었으며 무성서원은 교육기관의 일을 맡았기 때문에 남학당은 교육과 동약의 실천을 위한 동각의 구실을 했던 것이다.

지금의 건물은 1873년(高宗 10년)에 중건(重建)한 것이다.
1475년(哲宗 6년)에 정극인의 동약은 30년 뒤에 송세림이 정비하고 여러차례에 걸쳐 증보(增補)를 수번하여 현재의 고현동약지(古縣洞約誌)가 계속되고 있다.
이 향약(鄕約)은 이퇴계(李退溪)와 이율곡(李栗谷)의 향약보다 90년이나 앞서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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