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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생불(生佛) 백학명(白鶴鳴)선사
작성자 관리자

백학명(白鶴鳴, 1867∼1929)선사는 내장사(內臟寺)에 오래 머물렀던 선법(禪法)에 통달한 법사(法師)이며 고승(高僧)이다.

성이 백씨(白氏)요, 법명은 계시(啓示)이며 법호(法號)가 학명(鶴鳴)이었다. 1867년 전남 영광(靈光)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비범하고 총명한 기운이 뛰어나 장래 큰 인물이 될 사람이라고 주위 사람들은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집안이 가난했다. 너무 빈한하여 학업을 지속할 형편이 못 되었다.
마침내 자신이 필상(筆商)을 하여 부모님과 두 동생의 생계를 꾸려 가는 어려움 속에 살아갔다.
이러한 난관 속에서도 선사(禪師)는 환경에 굴하지 않고 공부만은 전력을 다했다.
대성(大成)의 길은 학문이 앞서는 길뿐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나이 20세의 소년이 되었을 때는 부모님이 이미 돌아가신 후였다.
부모를 잃은 선사의 가슴엔 항상 공허했고 인생무상(人生無常)을 절감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그는 순창 귀암사(龜岩寺)와 인연을 맺게 된다.
그때 귀암사에는 유명한 고승 설두(雪竇) 화상(和尙)이 머물고 있었다.
그는 설두화상의 설법(說法)을 듣고 크게 감명을 받은 후 스님이 될것을 결심하고 출가(出家)하고 말았다.

그 후 학명선사는 고향에 돌아와 잠시 머물면서 높은 뜻을 더욱 공고히 굳힌 후 불갑사(佛甲寺)에 들어갔다.
불갑사에 들어온 그는 즉시 금화(錦華)화상의 상좌(上佐)가 되었다.
그의 험준한 고행(苦行)의 길이 시작된 것이었다.
상좌로서 해야할 많은 일들을 조금도 혼란없이 해나가면서도 누구도 감히 따를 수 없는 굳건한 정신으로도 불도(佛道)정진에 몸을 바치고 있었다.
이어서 벽송사(碧松寺), 선암사(仙岩寺), 송광사(松廣寺) 등에서 끊임없이 수도에 전념하였다.
나이 34세 되던 해에 귀암사 금화화상의 뒤를 이어 불교강사(講師)직을 맡아보기도 했다.
이러한 수행의 고행 과정에서 곧 참선(參禪)의 깊은 경지에 들어 큰 도를 깨닫게 된다.

1914년 봄에는 홀연히 중국과 일본의 유명한 사찰을 돌아보며 그곳의 고승들과 만나 불서(佛書)를 놓고 고답적(高踏的)인 고담(古談)을 펴기도 했다.
그 후, 귀국하여 부안(扶安) 변산(邊山)에 있는 내소사(來蘇寺)와 월명암(月明庵)의 주지로 있으면서 참선의 깊이를 다져 선풍(禪風)을 일으키고 강론을 계속했다.
1923년이었다.

백양사(白羊寺)에 머물던 송만암(宋蔓庵) 선사한테서 연락이 왔다.
내장사의 주지가 되어 달라는 부탁의 내용이었다.
당시 내장사는 절의 운영부실로 인하여 퇴폐의 위험을 안고 있을 때였다.
그는 송만암선사의 간곡한 권고를 물리치지 못하고 내장사의 주지가 되었다.
내장사의 중책을 맡은 그는 즉각 극락보전(極樂寶殿)을 중건하고 선원(禪院)을 새로 지었으며 사찰 주위에 흩어져 있는 부도(浮屠 : 이름난 중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해 두는 둥근 돌탑)를 지금의 부도전(浮屠殿)으로 옮기고 각종 수목을 심고 정비하는 등 불사(佛事)에 크게 힘썼으니 내장사 일대 중흥(中興)에 박차를 가함은 물론, 드문 공적을 쌓았다.
그후에도 불사와 수도를 병행하면서 수도하는 가운데 불자(佛子)들을 교화하였다.

내장사에 있는 동안 젊은 신도들을 모아 불도(佛道) 수련과 교리의 전도에 전력했다.
그때 백학명 선사는 제자들과 불자들에게 반선반농(半禪半農)의 사상을 가르쳤다.
스님 된 사람이 놀고만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손수 농사를 지어 보아 그 고통까지도 체험하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내장사 주변의 넒은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작물을 제자들과 직접 심고 가꾸었으니 자호(自號)를 백농(白農)이라 했다고 한다.
백학명 선사의 용모는 꼭 달마상(達磨像)을 닮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달마상 그리기를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학덕이 높고 선(禪)의 깊은 도를 깨친 살아 있는 부처라 하여 생불(生佛)이라 했다고 한다. 선사가 돌아가기 몇 달 전부터 내장사에는 신기한 일들이 벌어졌다.
짐승들까지도 선사의 열반(涅槃)을 예감하고 그 징조를 보여 주었던 것이다.
내장사 뒤쪽에 자리잡은 석란정(石蘭亭)에서 밤이면 호랑이가 울었다.
깊은 밤만 되면 이곳에 내려와 슬피 울고 가는데 이런 일이 몇 달이나 지속되었다.
이런 일이 계속되는 동안 며칠간은 갑자기 수많은 까마귀 떼들이 몰려와 내장사의 상공을 오랫동안 배회하다가 사라지곤 했다.
이것을 본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무슨 큰 징조인데 알 수 없는 일이라고 걱정을 했다.
다 부처님의 영험으로 일어난 일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선사는 자기가 죽는 날을 알고 있었다 한다. 오후에 돌아갔는데 그날 아침의 일이었다.
선사는 제자인 고벽(古碧)(뒷날 내장사 주지)을 시켜
『오늘이 마침 정읍 장날이군. 얼른 정읍(井邑)시장에 나가서 무명베 4필, 짚신 10켤레, 그 외 상례(喪禮)에 필요한 물품을 알아서 사오도록 하게. 지금 당장 떠나게.』 하는 것이었다.

고벽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스승의 부탁이므로 시행은 해야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사건을 예견한 모양인데 알 길이 없었으며 그리 급한 일도 아니라고 생각됐다.
그래서, 고벽은 마침 비가 죽죽 내리고 있어 다음 장날이나 가려고 하고 있는데 선사의 독촉이 또 있었다.
『아니, 얼른 떠나질 않고 무얼 하고 있나. 지체 말고 시장을 다녀오게.』 하는 것이었다.
고벽이 장을 보러 떠난 후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선사는 손상좌(孫上佐)인 다천(茶泉)(뒷날 내장사 주지)을 불러 먹을 갈게 하며 달마상을 그렸다.
그때 6장의 달마상을 그렸는데 평소에는 갈대 타고 강을 건너는 절로도강(切蘆渡江)의 입상(立像)을 많이 그렸으나 그날은 좌상(坐像)만을 그렸다 한다.
그림을 다 그린 백학명 선사는 자리에 몸을 눕히고 제자인 운곡(雲谷)과 그 외 불자들에게 원각경(圓覺經)을 외우도록 하여 독경 속에 미소를 지으며 고요히 멸도(滅度)했다. 그때가 1929년 3월 27일 오후 2시였으니 수많은 불자들의 슬픔은 너무도 큰 것이었다.
고벽스님은 정읍 장에서 사온 상례(喪禮) 물품을 그대로 쓸 수 있었으니 백학명 선사의 영감의 계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선사가 열반(涅槃)한 이후에 또 이적(異蹟)이 일어났다. 화장한 그의 몸 속에서 70개의 백색문양사리(白色紋樣舍利)가 나왔으며 큰 고승(高僧)에서만 볼 수 있는 영골(靈骨)(손가락 사이 넓이 모양의 하얀 뼈)까지 나왔으니 현세에 드문 불도정진의 결정체(結晶體)였다. 달마상 그리기를 즐겨했던 선사는 자신이 달마상을 닮았다는 말을 듣고 한번은 달마상의 자화자찬(自畵自讚)의 화제(畵題)에서
『사람들은 혹 나를 보고 달마와 흡사하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별안간 스스로 참말인 듯 싶다.』 라고 자찬한 일화도 전한다.
또한 유고(遺稿) 작품으로 유명한 원적가(圓寂歌), 왕생가(往生歌), 신년가(新年歌), 망월가(望月歌), 해탈곡(解脫曲), 선원곡(禪園曲), 참선곡(參禪曲) 등이 전해지고 있다.
어려웠던 한 생애의 가시덤불을 헤쳐가며 손수 불사(佛事)를 하는 가운데 불도정진과 참선 속에 들어, 뭇 중생의 무명(無明)의 밤길에 등불을 밝힌 학명선사의 높은 학덕(學德)과 치적은 영원할 것이다.

 

자료제공:[ 정읍의 전설 ] 김동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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